ABC 디지털 디톡스

ABC 디지털 디톡스

코스모폴리탄 2025-01-09 00:00:00 신고

3줄요약
이번 디지털 디톡스 경험의 의미는 단순히 IT 기기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의존으로부터 잃었던 의지와 사유와 감각을 찾는 과정에 있었다. 스마트폰 대신 더 스마트한 나를 믿고, 내 나름의 감각과 의지와 사유로 스마트한 선택을 해보자는 것.


예전에 그런 밈을 본 적이 있다. 워낙 많은 SNS를 돌려가며 보는 탓에 어디서 봤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휴대폰 배터리가 1% 남은 긴급하고 다급한 상황에서 급기야 전원이 꺼져버리자 입은 옷은 중세 시대의 의복으로 돌아가고, 촛불을 켜고 문명이 없는 시대의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는 모습이 우스웠다. 물론 과장이 있지만 현대인이라면 십분 공감하는 영상이다. 스마트폰에 대한 현대인의 의존도를 보여주는 대목이자, 문명의 실익이 모두 스마트폰에 몰려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밈은 그래도 기억을 어느 정도 해내어 다행이다. 요새는 허구한 날 기억이 날 듯 말 듯 가물가물하고, 검색해야 하는 키워드조차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 경험을 종종 한다. 간단한 단어도 잘 떠오르지 않을 때면 이게 혹시 노화의 한 부분일까 혹은 정말 ‘영츠하이머’인가 의심하게 된다.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늘 어제보다 조금씩 아둔해져간다는 생각만큼은 명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디지털 디톡스’ 체험에 관한 글을 청탁받았다. 청탁 메일이 도착했을 당시 내 책상 위 풍경은 그야말로 ‘디지털 아사리판’이었다. 바로 앞에 있는 맥북 모니터에는 웹 브라우저 창이 촘촘히 열려 있었고, 그 뒤 아이패드에서는 알고리즘이 알아서 재생해주는 영상의 소리가 의미 없이 허공을 메우고 있었다. 그 옆에는 애플 워치와 에어팟이 함께 충전되고 있는 3 in 1 충전기에, 맥 세이프로 충전 중인 아이폰의 화면으로 여러 가지 앱 알림이 줄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흔한 앱등이의 책상. jpg’라 명명할 만했다. ‘디지털 옆에 디지털 그리고 또 디지털’이 병렬적으로 산재하는 모습이 어지러워 보였다. 하드웨어 속의 소프트웨어를 들여다보면, 앱(App)과 브라우저(Browser)와 콘텐츠(Contents)가 수도 없이 지껄이고 떠들어 재끼는 모양새였다. 융숭하다 못해 과하게 차려진 테이블 위에 날아든 청탁 메일 한 통은 마치 디지털 단식원으로부터 받은 전갈 같았다. 갖가지 콘텐츠와 갖은 양념과 소스로 절여진 도파민의 진수성찬을 뒤로하고, 소박하게 삶아낸 구황작물 한 덩이를 달랑달랑 들고 자유로이 걷는, 현대 문명 없던 어느 시절의 옛날 사람. 나한테 디지털 디톡스의 이미지는 그런 심상이었다. 이미 디지털에 절여질 대로 절여진 사람이 디지털 디톡스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이마저 ‘검색’하는 것이었다. 언제나 머리보다 손이 빠르게 상황을 타진했다. 가장 많이들 설명하는 방법은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정하라는 것이었다. 하루 중 특정 시간대를 정해놓고 그 시간 안에서만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출근도 퇴근도 없는 콘텐츠업자 프리랜서에게 조금은 부담이 따르는 선택이었다. 언제 절체절명의 이슈가 생길지 모르는 상황에 카톡, DM, 이메일, 전화 등등 갖은 연락망을 활짝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공간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어떤 공간에서는 와이파이나 어떤 전자 기기도 이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원룸이라 이 또한 패스다. 그렇다면 작은 공간을 분리하는 방법이 있다. 박스에 휴대폰을 일정 시간 넣어놓는 것이다. 타이머로 시간을 정해두고 그 시간 동안 열 수 없게 만든 상자에 휴대폰을 넣어놓는 것. 그러나 아이클라우드로 연동된 디지털 기기 과식자에게 이는 그다지 뾰족한 방법이 될 수는 없었다.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다며 빠져나갈 핑계만 만들어 ‘디지털 디톡스’라는 과업마저 미루고 미루던 중 의도치 않게 디지털 디톡스를 실행하게 됐다. ‘영츠하이머’를 역이용하게 된 것. 다시 말해 기억력 저하가 디지털 디톡스를 가능하게 했다. 전말인즉 화장실에 휴대폰을 가져갔다가 두고 나온 줄도 모르고 네 시간씩이나 휴대폰 없이 있었다. 물론 랩톱으로 메신저나 업무에 필요한 검색은 했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 네 시간 동안은 필요하거나 궁금한 적도 없었는데 갑자기 마주하게 된 옛날 드라마 클립이랄지, 인도 신부 메이크업 챌린지랄지, 알고 싶지 않았던 연예계 소식 등을 꼬리의 꼬리를 물며 보느라 허비하는 시간은 없었다는 것. 손에 휴대폰이 쥐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스크롤을 당겨 바라보게 되는 릴스와 숏츠로 허송세월을 보내본 사람이면 안다. 이게 얼마나 큰 장족의 발전인지. 식이요법으로 치면, 백색 밀가루 정도는 끊게 된 것 아닐까?

이후 의도적으로 화장실 선반에 종종 휴대폰을 두고 시간을 보내봤다. 소감은, “뭐야 생각보다 괜찮은데?” 따로 돈을 들여 ‘금욕 상자’, ‘휴대폰 감옥’을 마련하지 않더라도 공간을 분리한 효과가 있었을뿐더러, 다시 화장실에 가기 전까지 시간의 공백이 있으니 몸의 생리 주기에 맞춰 자연스럽게 시간을 정한 효과까지 있었다. 영츠하이머를 역으로 이용했던 케이스는 꽤나 효과적이었다.

영츠하이머 덕분에 얼렁뚱땅 디지털 디톡스를 시작했다면, 그다음은 의지의 영역이다. 검색에 의존하지 않고 나의 디지털 디톡스를 정의해보고자 했다. 디톡스 주스로 유명한 ABC주스가 ‘Apple(사과)’, ‘Beet(비트)’, ‘Carrot(당근)’을 의미한다면, 나의 디지털 디톡스는 ‘앱(App)’과 ‘브라우저(Browser)’와 ‘콘텐츠(Contents)’로 이뤄진 ABC를 하나씩 줄여가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일단 의미 없는 스크롤을 당기게 만들었던 휴대폰이 화장실에 있어준 덕분에 앱은 우선적으로 해결한 셈. 두 번째 스텝은 콘텐츠를 줄여가는 일이었다. 1인 가구의 헛헛함을 메우려고 아이패드를 켜두는 건 필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고요함이 잔잔히 흐르는 집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적적함보다는 그곳에 깔린 ‘FOMO(Fear of Missing Out)’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뉴스는 실시간으로 알아야 하고, 인기 급상승 동영상들도 체크해야 한다는 강박. 나는 그런 시류에서 멀어지지 않으려 애쓰며, 멀티태스킹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콘텐츠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 멀티태스킹은 생산적으로 만들어주는 여러 가지 행동이라기보다 디지털의 도가니 속에서 나를 소모시키는 것이 아닐까? 오랜만에 머릿속에 여러 질문과 문장이 떠올랐다. 스스로 사유를 하게 됐다는 자각이 든 것. 멀티태스킹이라는 이름으로 그간 나의 사유는 영상 속 사람의 생각, 또 댓글 속 사람의 생각에 의존했는지도 모른다. 간만에 머리에 신선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고요함이 가져다준 공백의 바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고유함을 데려왔다. 그다음은 모니터에 촘촘하게 켜져 있던 웹 브라우저와 탭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나중에 혹시 필요할지도 몰라’라는 두려움으로 너저분해진 디지털 공간. 고개를 들어 방을 살펴보니 꼬라지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니터 속 환경을 정리하는 것을 넘어, 모니터 밖의 집도 새롭게 정리할 결심을 했다. 미뤄왔던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분리수거까지 하니 한참이 걸렸다. 허기가 느껴졌다. 명색이 디지털 디톡스로 시작한 이 정리에서 배달 앱을 켜는 건 무의미한 결정이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양배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요리할 때면 유튜브 선생님에게 의지하곤 했지만, 이번엔 검색을 잠시 뒤로하고 기억에 의존해보기로 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배우 문소리가 한 대사가 떠올랐다. “양배추는 생으로 먹는 게 가장 좋다.” 잘 안 하는 선택이지만 양배추를 가벼운 드레싱이나 어떤 양념도 없이 생으로 씹어봤다. 달고도 매운 맛이 났다. 찌고 볶아 먹을 땐 모르던 맛이다. 며칠 그렇게 먹으니 생으로 먹는, 조리 없이 먹는다는 것이 편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지털 디톡스가 다이어트까지 야기할 줄이야!

디톡스 주스 며칠 마셨다고 금방 다이어트가 되지 않듯, 디지털 디톡스도 요 며칠 시도했다고 해서 바로 새 삶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완전히 디지털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수많은 유혹과 혼란을 부르는 디지털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세상인 덕분에 긍정적이고 효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 느닷없이 벌어지는 참담한 사건에 분노하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할 수 있고,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가정식 요리법을 구경할 수도 있고, 간밤에 갑자기 브라질리언 왁싱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금방 예약할 수 있는 것도 이 디지털 세상이 만든 자명한 편리함이다. 그 편리한 세계 안에서 필요한 것을 선택적으로 소비하고, 적절한 시간을 할애해 내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채워나가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이번 디지털 디톡스 경험의 의미는 단순히 IT 기기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의존으로부터 잃었던 의지와 사유와 감각을 찾는 과정에 있었다. 스마트폰 대신 더 스마트한 나를 믿고, 내 나름의 감각과 의지와 사유로 스마트한 선택을 해보자는 것. 결국 디지털 디톡스는 디지털의 의존도를 조절하는 주체가 다시 내가 돼보는 과정에 있지 않을까?

Copyright ⓒ 코스모폴리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지금 쿠팡 방문하고
2시간동안 광고 제거하기!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