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원 칼럼] 작업실을 정리하며①

[정혜원 칼럼] 작업실을 정리하며①

문화매거진 2025-01-07 11:45:00 신고

3줄요약

[문화매거진=정혜원 작가] 작업실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계약 기간이 두 달 남은 시점이었다. 건물주에게 월세를 송금하며 문자로 계약 연장 의사가 없음을 알렸고, 그때부터 틈틈이 이삿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작업실은 일 년간 방치되어 월세만 나가던 상황이었다. 아직은 두 달간의 월세를 더 지불해야 했지만 조만간 헛돈이 나가는 일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일찌감치 해방감이 몰려왔다. 

새해 들어 나만의 공간을 꿈꾸며 충동적으로 얻은 작업실이었다. 프리랜서로서 고정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매물을 보자마자 겁없이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별로 특별한 곳은 아니었다. 외딴 상가 건물 1층에 자리한 5평 크기의 작은 공간이었다. 창고나 다름없이 허름했지만, 다른 건 둘째 치고 구조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한 칸짜리 통으로 된 곳에 칸막이가 쳐져 있고 단차가 나 있어 공간을 짜임새 있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에 수도시설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업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으로 보였다. 그래서 다른 조건은 꼼꼼히 따져 보지도 않았다. 뭔가에 살짝 홀렸거나, 새해를 맞아 지나치게 의욕에 차 있었나 보다.

▲ 구조는 짜임새 있어 좋았으나 벽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초기의 작업실 / 사진: 정혜원 제공
▲ 구조는 짜임새 있어 좋았으나 벽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초기의 작업실 / 사진: 정혜원 제공


섣부른 결정에 대한 뉘우침은 너무도 일찍, 정식 계약 후 인테리어를 위해 얻은 보름의 유예 기간에 찾아왔다. 이전 세입자가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엉망이 된 벽면을 손질하는 데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정식 인테리어는 꿈도 꾸지 못하고 손수 페인트만 칠하는데도 그 자재와 부자재, 공구값이 만만치 않았다. 페인트칠을 하면서 앞으로 또 어디에 돈을 써야 할지 곰곰이 따져 봤다. 일단 한겨울이라 추우니까 냉난방기를 달아야 했고, 이전 세입자가 싱크대를 떼어 갔으므로 새 싱크대를 달아야 했다. 아무런 집기 없이 휑한 로비에 책상과 의자, 선반을 배치해야 했고, 외식비를 줄이기 위해 최소한 전자레인지는 있었으면 했다. 호흡기 건강을 고려하여 먼지가 날리는 맨 시멘트 바닥 위에는 카펫을 깔고 싶었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다 돈이었다.

보증금과 월세, 관리비만 염두에 두어서는 절대 안 됐다. 공간을 얻고 나니 한동안 생각지도 못한 자잘한 일들에 끝없이 돈이 들어갔다. 보수나 수리처럼 전부 필요하면서도 돈이 많이 드는 일들이라, 모아 두었던 돈이 물 새듯 흘러나가는 꼴을 그냥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때마침 일감이 끊겨 돈 나올 구멍이 막혀 버렸다. 그야말로 공포였다.

▲ 보름간의 단장 끝에 말끔해진 작업실. 흰색이 콘셉트였다 / 사진: 정혜원 제공
▲ 보름간의 단장 끝에 말끔해진 작업실. 흰색이 콘셉트였다 / 사진: 정혜원 제공


보름간 덕지덕지 발린 벽지와 시트지를 뜯어내고, 시멘트벽의 구멍들을 하나하나 핸디코트로 메우고, 울퉁불퉁한 벽면을 사포로 곱게 갈아 고르고, 프라이머로 밑바탕을 한 차례 칠한 뒤 페인트를 덧바른 끝에 마침내 완벽하게 하얘진 작업실에서, 나는 하얗게 공포에 질렸다. 준비된 공간에서 이제 열심히 작업만 하면 되는데도, 일감이 끊겨 시간이 많은데도 작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일감이 끊겨 한가하게 작업만 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다.

다행히 나는 아주 대책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무모하게 작업실을 얻어 한 번에 큰돈을 쓰기는 했지만 신중한 일면도 있어서, 미리 1년치 월세를 따로 떼어 두었다. 게다가 일감이 끊겼을 때를 대비하여 평상시 이중 삼중으로 저금을 해 두었기에 월세가 밀린다든지 생활비가 없어 밥을 굶는다든지 하는 극단적인 일은 결국 벌어지지 않았다. 이게 다 오랜 프리랜서 생활로 몸에 밴 위기의식과 준비성 덕분이다. 

하지만 나를 지탱해 온 마음의 뿌리(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만)에는 큰 타격을 입었다. 지금까지 내 삶의 1순위는 창작이었다. 일을 얻을 때도 창작에 방해가 되지 않는 일, 창작과 조금이나마 관련이 있는 일을 골랐고 그 일은 반드시 내가 좋아하는 일이어야 했다. 설령 그 원칙 때문에 돈을 적게 벌게 되더라도 적게 쓰면서 살면 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내가 고른 번역이라는 일은, 정말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날이 보수가 낮아져만 갔고 일감도 줄어만 갔다. 앞으로도 계속 그 일에만 목을 매고 있으면 인생에 위기가 닥쳐 돈이 간절히 필요한 순간 정말 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최악의 경우 밥까지 굶을 수도 있음을), 이번에 작업실을 얻어 보고 깨달았다.

엄밀히 말해 작업실은 나만의 공간에 대한 욕심의 표상이자, 그와 동시에 독립 가능성에 대한 조심스러운 타진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나는 아직 본가에서 독립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대로 독립하지 않은 채 내가 좋아하는 일로 최소한의 내 생활비만 벌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만을 고집하는 대가로 늘상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초조하게 매사에 대비해야 하는 삶은 이제 그만 살고 싶다. 이것이 공포 속에서 작업실을 방치한 채 다달이 월세라는 이름으로 인생 수업료를 치르며 얻은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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