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500년을 돌아보면, 드물게 성군도 있었고 그저 그런 많은 임금과 때로는 폭군도 있었다. 대표적인 성군은 세종과 정조였다. 두 임금의 공통적인 특징은 개혁(改革), 애민(愛民), 포용(包容), 호학(好學)이었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위업을 남겼다. 정조는 당쟁으로 희생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뼈아픈 가족사로 인해,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해 고루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蕩平策)을 뿌리내리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두 분 다, 자주 신하들을 불러 모아 학문을 토론하였다. 나라의 방향을 어디로 잡을지, 무엇이 잘못이었고 무엇을 바로잡아야 할지를 두고 자주 경연을 열었다. 신하들의 의견을 열심히 경청하고 좋은 의견을 채택, 나라 정책에 반영하였다. 호학이란 단순히 책만 읽는 것이 아니다. 고금동서(古今東西) 현인들의 지혜를 빌려서 국사에 반영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와 반대로 조선시대 폭군의 대명사는 단연 연산군이다.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은 데 대해 앙심을 품고 갑자사화(1504년)를 일으켜 그에 가담한 수많은 신하를 학살하였다. 그 외에도 주색잡기와 인륜에 반하는 악행을 수없이 저질렀다. 임금의 품격이라곤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무도한 자였다. 이런 씨앗이 어릴 때의 이름인 무작금(無作金)이라는 데서 잉태되지나 않았는지 추측해 본다. ‘무작’이란 ‘무지막지하고 우악스럽다’는 뜻이다.
연산군은 경연을 극도로 싫어하였다. 경연 때 신하들의 좋은 의견을 잔소리로 알고, 자기 발목을 잡는 장으로 여겨서 귀찮게 여겼다. 흥청망청 연회는 많이 열었으나 정작 꼭 필요한 경연은 못 열게 하였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혼란스러운 사태도 비슷한 면이 있다. 주군의 별명이 59분, 또는 95분이라 불릴 정도로 참모들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고 한다. 1시간짜리 회의이면 59분을 혼자 떠들고, 100분 회의라면 95분을 일방적인 자기 의견만 내뱉는다는 것이다. 장관이나 참모들이 좋은 의견을 개진할 틈조차 갖지 못한 것이다. 이러면 나라 정책이 ‘배가 산으로 가도’ 바로잡을 기회가 없어진다.
특히 그의 아내에 대하여 시중 여론을 전하려 하면 그 누구도 입도 뻥긋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술 잘하는 측근들은 틈만 나면 불러서 자주 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취기에 절어서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 민심에는 귀를 막고 정사를 보다가 이번 사태를 불러온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사실이라면, 이런 자가 폭군이다. 폭군이 따로 없다.
지금은 구중궁궐 관저에 갇혀 있으면서도 한 줌도 안 되는 극우세력들을 선동, ‘끝까지 버티겠다. 나를 호위해 달라’는 메시지를 흘리면서 나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부추기고 있다. 그런 자에게 소위 말하는 ‘임금의 품격’이라 부를만한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지 의문스럽다.
연산군 다음으로는 임금 자리에서 폐위된 자가 선조의 아들 광해군이다. 임진왜란 당시 무능한 임금 아버지 선조는 피신하고, 전장에 나가 임금을 대신하여 전쟁을 지휘하고 임진왜란의 참상을 몸소 경험한 것이 그였다. 그는 무능한 임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후세 사가들에게 실리외교를 한 유능한 군주로 재평가받는다.
광해는 서자로 태어난다. 그의 친형 임해군이 포악하다는 이유로 차남인 그가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후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너무 어려서 선조 사후에 임금이 된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태생적인 한계로 왕권에 대한 불안을 늘 느끼게 된다. 그러다가, 그가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비하고 이복동생 영창 대군을 죽인 죄로 재위(1608~1623) 15년 만에 폐위된다. 그것이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으로 나라가 안정되기는커녕, 오히려 위험한 지경으로 흘러간다. 임진왜란을 겪었던 조선의 비극이 광해군의 폐위로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유는 인조가 대외정책을 무모하게도 급격하게 변화를 시도한 게 발단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전장에서 몸소 겪으면서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대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느낀 터였다. 그는 명을 불신했다. 그러나 인조가 등극하면서 쇠락해 가는 명나라를 떠받들고 중원의 강자로 떠오르는 후금의 후신 청나라를 정면으로 배척하기 시작한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역행하여 어리석게도 친명배금(親明拜金)으로 선회한 것이 화근을 불러온 것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청나라 태종이 명나라를 치기 전에 먼저 조선을 쳐서 배후의 안정을 도모한다. 이것이 1637년 일어난 병자호란이다. 청의 전격적인 침략에 인조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삼전도에 나가서 오랑캐로 취급했던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굽히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이 역사적인 사건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비록 폭군을 쫓아내고 반정으로 집권한다고 하더라도 나라가 안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에 반하여 대외노선을 급하게 바꾸면 더욱 위험한 지경에 빠져든다는 좋은 교훈이다.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은 친중 친북을 은근히 지향하는 정치집단이다. 만약 지금 정권이 그들 바람대로 몰락하고 조기 대선으로 집권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후 그들이 선호하는 대외정책에 따라 북방으로 머리를 돌리고 급격하게 ‘반일 반미’ 정책을 추진한다면 한국의 국제 관계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 궁극적으로 미군 철수를 숨은 목표로 하는 그들의 대외정책은 70년 동맹 미국을 서서히 배척하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 안보 지형을 180도 바꾸는 것으로 그 파장이 작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나 북한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급격한 반일·반미 정책 추진은 위험하다. 어리석고 무능한 임금 때문에 갑자기 정권을 잡는다 하더라도 대외정책을 급선회하는 것은 나라의 안보를 위협하는 불행한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기를 바란다.
혹시 이번 정변을 기회로 집권하더라도 너무 좋다고 기고만장할 일이 아니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는,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정당으로 거듭나기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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