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며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긴긴밤’ 中)
어둠이 끝도 없이 계속될 것 같던 밤이 저물고 다시 아침이 밝아왔다. 유난히 길고 길었던 지난해, 소중한 존재들을 떠나보낸 아픔과 상처를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곁에 남은 사람들,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손을 맞잡고,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 ‘긴긴밤’을 지나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극복할 가장 강한 힘은 ‘사랑’이 아닐까. 새롭게 떠오른 해, 지난 2021년 출간한 도서 ‘긴긴밤’(문학동네 刊)을 다시 소환하는 이유다.
긴긴밤은 지구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지금은 세상을 떠난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의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책은 뿔이 잘리고 다리가 불편한 코뿔소와 엄마, 아빠를 잃어버린 어린 펭귄이 함께 바다를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다.
코끼리 무리에서 자란 코뿔소 ‘노든’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흰바위코뿔소다.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코뿔소는 소중한 이를 다 잃고도 ‘마지막 하나 남은 존재’의 무게를 온 영혼으로 감당하고 있다. 노든은 울타리가 되어준 친구들이 가득했던 코끼리 고아원을 떠나, 자유를 찾아 야생의 넓은 세상으로 발을 내디딘다.
새로운 세상은 녹록지 않았지만, 그의 곁에는 언제나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준 친구들이 존재했다. 야생에서 살아가는 게 서툰 노든을 ‘엉뚱하지만 특별한 코뿔소’라고 불러준 아내, 야생에서 동물원에 갇힌 노든에게 악몽을 꾸지 않고 긴긴밤을 견딜 방법을 알려준 친구 ‘앙가부’, 내일을 맞이할 수 있게 해준 ‘치쿠’까지.
밀렵꾼에 의해 아내와 아이가 곁을 떠나고, 친구들도 하나씩 곁을 떠나지만 그럼에도 노든이 긴긴밤 다시 걸을 수 있었던 건 친구들이 보여줬던 단단한 사랑의 힘 덕분이다.
그리고 그의 곁엔 전혀 다른 존재의 어린 펭귄이 나타난다. 노든과 어린 존재의 만남은 사실 기적이었다. 친구 ‘웜보’와 ‘치쿠’가 전쟁 속에 버려진 알을 온몸으로 지켜내며, 마지막 순간까지 부탁한 어린 존재에게 노든은 자신이 받았던 사랑을 전한다.
노든은 어린 존재를 위해, 치쿠의 마지막 부탁을 지키기 위해 어린 펭귄과 함께 긴긴밤을 건너며 파란 지평선의 바다로 떠난다. 사랑하는 이들의 몫까지 살아내야 하는 노든과 악착같이 생을 지켜내는 어린 펭귄, 모든 것이 다른 두 존재는 사랑의 힘으로 걸어 나간다. 동화는 언젠가 펭귄이 노든의 곁을 떠나 자신만의 세계로 힘차게 향하듯 어른으로 자라나는 방법을 알려준다.
“너는 펭귄이잖아. 펭귄은 바다를 찾아가야 돼.”/ “그럼 나 코뿔소로 살게요. 내 부리를 봐요. 꼭 코뿔같이 생겼잖아요.”/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이리 와. 안아 줄게. 그리고 이야기를 해 줄게. 오늘 밤 내내 말이야. 너는 파란 지평선을 찾아서, 바다를 찾아서, 친구들을 만나고, 우리 이야기를 전해 줘.”
동물들이 등장하는 우화에는 우리가 겪는 죽음과 이별, 전쟁 등 현실의 아픔이 녹아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는 내내 온기를 잃지 않고 희망적이다. 서정적 그림과 함께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일들과 감정이 깊이 있는 질문과 그것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글로 풀어지며 울림을 준다.
수단의 실제 삶에서 동화를 이끌어낸 루리 작가는 글과 그림을 통해 ‘긴긴밤’의 이야기를 그려내며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책은 50만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로, 지난해엔 이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도 제작돼 오는 5일까지 대학로 무대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작품은 흰바위코뿔소와 아프리카 펭귄, 코끼리 등 각기 다른 동물의 이야기를 네 명의 배우가 무대 위에서 그려내며 100여분의 시간을 채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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