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코리아 게이트가 터졌다.
1976년 10월 25일 워싱턴포스트는 워싱턴에 거주하는 한국인 실업가가 박종희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아 미국 의원들에게 매년 100만 달러를 정치자금으로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미국 언론들은 이를 ‘코리아 게이트’라고 불렀다.
박종희는 주한미군 감축을 막아내고,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미국 의회로부터 승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미국 의회에 대한 로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주재 정보원이었던 김상근이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정보부 요원에 대해 폭로하는 바람에 박동수의 코리아 게이트가 터진 것이다.
1975년에 뉴욕의 한남체인을 인수하고 미국 쌀 중개권으로 크게 성공한 미국 영주권자 박동수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1971년 1월 중개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청문회에서 질의와 답변이 끝나자 박동수는 최후 진술을 요청했다.
“나는 단지 내 친구들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했을 뿐이다. 나는 한국 정부의 요원이 아니고, 한국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은 적도, 지시를 받은 적도 없다.”
미 의원들에게 준 돈이 선거자금이었다는 말은 합법적이라는 진술이었다. 당시는 외국인도 의원들에게 선거자금을 후원하는 것은 합법이었다.
박동수는 한국 정부의 요원이 아니라는 것을 필사적으로 진술했다. 박동수의 최후 진술로 코리아 게이트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급속히 멀어져갔다.
영국에 머물던 박동수는 청문회 조사팀의 매혹적인 수석 비서인 스테파니에게 연락했다.
“덕분에 기소가 철회되어 깨끗하게 마무리되었어. 고마워.”
“다음 주 영국으로 휴가 갈 테니 거기서 만나요.”
귀공자 같은 외모와 돈 많은 박동수에게 조사팀 여비서가 유혹을 당한 것이다.
한편 2학년이 되자 정열은 모든 게 시시해지고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군대에 입대하기로 마음먹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영숙은 아들이 군대 간다고 했을 때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했다.
“청하야, 열이가 군대를 간다는데 잘 된 거지?”
영숙은 아들의 문제만큼은 청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어차피 갈 거면 지금 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요즈음 열이 저놈이 내 눈을 마주치려고 하질 않아.”
“조금만 기다리시면… 혼자 견뎌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논산훈련소에서 M1 소총을 거꾸로 잡고 오리걸음으로 쪼그리고 걷던 눈물의 미아리 고개, 400고지 산악 구보, 10km 군장 구보 같은 훈련을 정신없이 받다 보니 어느새 1개월이 후딱 지나갔고, 부산 종합정비창 본부중대 정보계 영작과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주로 무기류에 대한 매뉴얼을 번역하는 중대였다.
종합정비창은 전차, 장갑차, 자주포, 곡사포, 전투차량, 개인화기, 공용화기, 통신장비, 의무장비 등 육군을 포함한 국군 전체에서 사용되는 지상 장비의 정비와 재생을 담당하는 공장형 부대였다.
부대의 특성상 군 장비의 정비에 특화된 기술직 군무원이 많았기 때문에 타 부대와는 다르게 군기가 느슨한 편이었다.
본부중대로 간 정열은 대기병 신분으로 이틀을 아무것도 안 하고 내무반에서 분위기를 익히고 있었다. 그때, 지 상병이 정열에게 다가와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지더니 정열의 볼을 가볍게 몇 차례 때렸다.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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