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말자 사건', 60년만에 재심 길 열려…"실감 안 나고 책임감 느껴"
1990년 관련 영화 개봉 후에도 30여년…'최말자는 무죄다' 서명 8천명 참여
(서울=연합뉴스) 이승연 기자 =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한 피해자의 행동은 정당방위인가 아닌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에 대한 정당방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를 두고 60년 전 사건이 소환됐다.
1964년 5월 6일 당시 18세였던 최말자 씨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 노모(당시 21세) 씨의 혀를 깨물어 1.5㎝ 자른 혐의로 부산지법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최씨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남성을) 불구의 몸이 되게 한 방위 행위는 법이 허용한 상당한 정도를 지나쳤다"며 중상해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6개월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성폭행 피해자가 가해자가 돼버린 것이다.
출소 후 와이셔츠 공장과 노점상을 전전하며 살아온 최씨는 검정고시를 쳐 60대에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여성의 삶과 역사, 인권에 대한 수업을 듣게 된 최씨는 학우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다가 재심을 청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후 2018년 국내에서는 많은 여성이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공론화하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벌어졌다.
최씨는 자신의 사건 판결문과 당시 언론보도를 찾아가며 증거를 수집했고,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의 상담을 받아 준비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56년째 되는 2020년 5월 6일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최씨는 자신의 피해를 공개하며 과거 수사 과정에서 발생한 절차적 결함 및 인권침해를 정면으로 지적했다.
그는 검찰이 조사 첫날 아무런 고지 없이 자신을 구속했으며, 기소된 뒤 재판부는 '남성에게 호감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 '남성과 결혼할 생각이 없느냐'는 등 2차 가해를 했다고 폭로했다.
성관계 경험 유무에 대한 감정을 받았고 그 결과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최씨는 "그때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밝혔다.
최씨 사건은 형법학 교과서에 수록될 만큼 중요한 판례로 꼽혀왔다. 부당한 침해로부터 자신의 법익을 방위하는 행위가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는지에 관한 형법 제21조 '정당방위'에 관한 대표적인 판례다.
법원행정처가 법원 100년사를 정리하며 1995년 발간한 '법원사'에도 이 사건은 '강제 키스 절단 사건'으로 기록됐다.
같은 해 최씨를 향한 유죄 판결이 잘못됐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고(故) 심재우 고려대 법학과 교수는 '강제키스에 대한 혀 절단사건은 정당방위인가 과잉방위인가' 논문을 통해 "(혀를 자르는 방위 행위는) 침해를 즉각, 유효하게, 종국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보다 확실한 방어 수단"이라고 했다.
집으로부터 150m 거리밖에 안 되므로 소리를 지를 수 있었는데도 혀를 절단한 것은 과잉방위라는 법원 판단에 대해 심 교수는 "오히려 소리를 질렀을 때 그것을 저지하려고 입을 틀어막는다거나 목을 조르는 경우 더 큰 위험을 부담할 수 있을 텐데 왜 그것을 방위자에게 요구해야 하는가"라고 적었다.
최씨 사건은 1990년 개봉한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와 함께 소개되곤 한다.
이 영화는 1988년 귀가하던 도중 골목길에서 청년에게 성폭행당하다 청년의 혀를 절단한 혐의로 기소된 변월수 씨 사건을 토대로 한다.
여성이 성폭행당하다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한 점, 사건 이후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를 본 점, 가족 및 사회로부터 점차 고립되는 점 등이 유사해 최씨 사건에 따라붙어 인용돼왔다.
영화 속 주인공(원미경 분)이 판사에게 "만일 또다시 이런 사건이 제게 닥친다면 순순히 당하겠습니다", "여자들한테 말하겠습니다. 반항하는 것은 안된다고, 얘기하는 것도 안된다고, 재판을 받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고 말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영화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음에도 최씨가 재심을 청구하기까지는 그로부터 다시 30년이 걸렸다.
10대였던 최씨가 70대가 되는 동안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고 여성 인권과 성인지 감수성이 신장했다는 한국이지만 '성폭행범의 혀를 깨물어 절단한' 어떤 이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굴레를 쓴 채 60년을 살아온 것이다.
그러다 지난 20일 최씨의 재심 여정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재심 청구 4년여만이다.
대법원은 최씨의 재심 청구를 기각한 원심 결정을 파기해 부산고법에 사건을 돌려보냈다. 사실상 최씨에 대한 재심이 개시돼야 한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 결정 소식을 듣고 만세를 외쳤다던 올해 78세의 최씨는 감사를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 방울, 한 방울…물방울이 바위를 뚫었습니다. 앞으로 재심을 열어 무죄가 나오고 정당방위가 인정될 때까지 여러분들 도와주십시오."
최씨의 재심 청구는 여성을 향한 성폭력을 공론화할 뿐 아니라 남성 중심으로 운영된 사법 제도가 여성에게 가한 2차 가해를 폭로한 측면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여성계를 중심으로 만시지탄이라는 탄식이 나오는 가운데 우리 사회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뭉개서는 안 되는 과거라는 지적도 나온다.
재심을 향한 물꼬는 텄지만, 최씨의 혀 절단 행위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은 여전히 '과잉방어'다. 이번 대법원 결정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인 이유다.
최씨의 재심을 앞두고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24일부터 '최말자는 무죄다'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서명 시작 사흘만에 약 8천명이 서명했다.
변호인단은 당시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증거와 재판·수사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등을 토대로 향후 재심에서 무죄를 다툴 예정이다.
법무법인 지향 김수정 변호사는 "최씨의 판결을 통해 법원이 스스로 과오를 바로잡길 바란다"며 "법적 안정성만큼이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최씨는 한국여성의전화를 통해 연합뉴스에 "아직 재심을 할 수 있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다"며 "앞으로도 무죄를 향한 투쟁이 이어질 만큼 마음이 무겁고 책임감도 느낀다. 지금까지 응원과 연대를 보내준 시민들께 감사하고 앞으로도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했다.
winkit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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