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퍼스 바자 먼저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수상을 축하한다. 꽤 긴장한 모습이던데.
노상현 긴장하고 당황하고.(웃음) 전혀 예상 못했다. 그래서 수상 소감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렇다고 또 아무 말이나 횡설수설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고르느라 정적이 좀 있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 찰나의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퍼스 바자 배우라면 언젠가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받는 상상을 한번쯤 해봤을 것 같다.
노상현 아주 오래전이었다. 이 일에 대해 잘 모를 때는 환상 아니, 망상을 했던 것도 같은데. 오히려 한창 일을 하는 와중에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했다. 양가 감정인데, 상을 받는다는 건 명예롭고 감사한 일이지만 사실 상을 바라보고 일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상은 그냥 선물처럼 따라오는 거라 생각하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달까. 그보다는 영화가 잘되고 관객들이 좋아해주고 좋은 평가를 받는 게 더 감동적이니까. 수상을 한 날, 딱 그날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기뻐했지만 그 다음 날부터는 나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다. 분위기에 휩쓸릴까 봐 내 마음을 자꾸 경계하고 있다.
하퍼스 바자 이삭이 선자를 만나 자기 인생이 커진 것처럼, 본인에게 〈파친코〉가 그런 작품이라고 언급한 적 있다. 〈파친코〉가 배우 노상현을 확장시킨 작품이라면 〈대도시의 사랑법〉은 추진력을 얻게 해준 작품일까?
노상현 확실히 큰 힘을 얻었다.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처음 무대 인사를 경험했는데, 관객과 직접적으로 교류하면서 얻는 에너지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흥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이 영화를 보고 힘을 얻었다고 말씀해주실 땐 정말 뿌듯했다. 이런 영화 더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하퍼스 바자 성소수자 ‘흥수’는 잘못 연기하면 한없이 납작해 보일 위험성이 있는 캐릭터다. 선뜻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노상현 직관적이었다. 시나리오를 읽는데 그냥 느껴졌던 것 같다. 내가 연기를 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자신감이 있었다. 내가 생각한 대로 하면 될 것 같다는. 감독님도 애드리브를 날릴 수 있는 장을 열어주기도 했고 그야말로 즐기면서 연기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실제 내 모습이 가장 많이 담겼다.
슬리브리스 톱은 H&M. 팬츠, 벨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경영학도에서 배우로 선회했지만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여기까지 왔다. 2015년 단역으로 얼굴을 비춘 이래 딱 10년째다. 그 시간 동안 대중은 모르는 기다림의 순간들이 있었을 텐데.
노상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21살 모델 일을 할 때부터 연기에 대한 꿈이 있었다. 일단 졸업은 해야 할 것 같아 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일을 시작한 게 스물다섯 즈음인데, 연기에 대한 열망이 점점 커지더라. 그런데 그 즈음 같이 일하던 매니저와도 이별하고, 현실과 이상이 달라서 괴로웠다. 내면에 뭔가 해결해야 될 것들이 남아 있다는 느낌. 아까도 말했듯 이 일에 대한 망상, 환상, 혼란이 내 마음 안에 다 있었다. 그걸 깨야 했다. 자존심도 상해보고, 자존감도 떨어져보고. 그런데 한편으론 이게 다 연기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는 믿음도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알아가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연기를 위해 노력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믿음. 결국엔 내 능력치를 넓혀주고 밑거름이 될 거라는 어찌 보면 막연한 믿음이었다.
하퍼스 바자 그렇게 혼돈의 20대를 보내고 30대에 접어드니 마음이 좀 편해지던가?
노상현 29살에 뒤늦게 입대했는데 그때가 힘듦의 절정이었다. 왜 20대 때는 30대가 되면 인생이 달라질 것 같고 나는 이제 끝난 것 같지 않나. 그때까지 나는 몇 개의 웹드라마를 경험한 게 전부였다. 그게 2년이라는 공백기를 이어줄 만큼 대단한 커리어는 아니라고 생각했고 불안했다. 그런데 군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생각이 깨끗해졌달까.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주어지니 쓸데없는 고민이나 부정적인 감정은 없어지고 내면을 회복하게 되더라. 전역하고 나서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노력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자존심을 내려놓으니 태도가 달라지더라. 나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가 들어와도 최선을 다해서 연기했고, 나를 향한 피드백들이 아무리 부정적이어도 그러려니 했다. 그냥 도 닦는 사람처럼 모든 걸 받아들이면서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수도 없이 오디션을 보다가 마지막에 만난 작품이 〈파친코〉였다.
하퍼스 바자 마침 윤여정 선생님이 이번 달 〈바자〉의 커버를 장식했다. 인터뷰에서 〈파친코〉의 선자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바가 명확히 있었다고 말씀하시더라. 당신의 경우엔 어떤가? 이삭을 연기하면서 반드시 전달하고 싶은 바가 있었나?
노상현 윤여정 선생님께는 커리어의 절정에 만난 작품이지만 내 입장에는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제 막 시작하는 시기에 참여하게 된 작품이다. 그렇다 보니 난 그저 무엇이 됐든 해내야만 했다.(웃음) 딱히 어떤 걸 표현하고 싶다기보다 그냥 이삭이라는 인물로 살아 숨 쉬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말들이 진실로 다가가게끔 그렇게 뱉어지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었다.
하퍼스 바자 서른 즈음에 접어든 남자 배우들의 고민을 거칠게 두 가지로 나누자면 한쪽은 빨리 나이 들고 싶다, 한쪽은 나이 들고 싶지 않다는 쪽이더라. 당신은 어느 쪽인가?
노상현 20대가 훌쩍 지나간 건 좋다. 그때보다는 마음이 편하니까. 결국 나이를 먹는다는 건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이지 않나. 우리는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존재고. 그래서 최대한 천천히 나이 들고 싶다. 그런데 요즘 주변에서 내 나이로 보인다고 해서 솔직히 흠칫 놀랐다. 20대로 보일 줄 알았는데.(웃음) 쉼 없이 촬영만 해서 그런지 30대 중반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마음은 20대에 멈춰 있는 느낌이다.(웃음) 다 내 착각이었다. 나도 이제 아저씨가 다 됐구나 싶다.
하퍼스 바자 〈파친코〉 전후로 노상현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나?
노상현 〈파친코〉를 찍은 다음부터는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는 굉장히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20대 때 바란 건 요행이었던 것 같다. 결국 세상에 지름길 같은 건 없고 지금 내가 걸어온 길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는 걸 느끼니까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된다. 어쩌면 너무 빠른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상을 받아도 혹여 마음이 붕 뜰까 봐 나 자신을 다잡는 것 같기도 하고.
하퍼스 바자 MBTI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들었다. 오늘 대화만 봐도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는 타입 같다. 과연 로봇이라 불리는 INTP답달까.
노상현 테스트를 해보니 T 지수가 75%나 나오더라. 로봇 맞다. 그런데 가슴이 따뜻한 로봇이다. 딱히 재밌는 이야기를 못 드리는 것 같은데,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내 삶이 재밌다. 가끔 요리도 해 먹고, 청소도 하고…. 하루가 금방 간다.
톱은 Münn.
하퍼스 바자 2025년엔 넷플릭스 드라마 〈다 이루어질지니〉가 공개된다. 김은숙 작가와 이병헌 감독의 만남으로도 기대를 모으는 작품이다. ‘램프의 지니’ 김우빈에게 대적하는 천사 역할이라고 들었다. 시놉 라인만 보면 어떤 내용일지 감도 안 온다.
노상현 장르는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인데, 김은숙 작가 특유의 거대한 세계관이 펼쳐진다고 보면 된다. 여러 가지 콘셉트가 결합되어 있고 그 안에 철학적인 메시지도 담겨 있다. 배우로선 그 세계 안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일상적이지 않은 말투 같은 것들을 최대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쉽지 않은 과업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기대해달라.
하퍼스 바자 이제 막 신인상을 거머쥔 전도유망한 배우는 어떤 끝을 상상하는지 궁금하다. 말하자면 언제까지 연기할까?
노상현 내가 언제든 그만두고 싶을 때까지. 모르겠다. 그런 게 다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난 오늘만 살자 주의다. 그렇게 사니까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 같다. 난 이게 좋다.
레더 재킷은 Versace. 팬츠는 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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