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보름도 안 되는 기간에 한국 국민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정치적 사건을 경험했다. 12월3일 밤에 대통령이 느닷없이 계엄령을 선포해 무장 군인이 국회에 총부리를 겨누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고 용감한 시민들이 그들을 맨몸으로 막는 사이에 국회가 계엄 해제를 신속히 의결했다. 그 후 10일 가까이 대통령의 이 무도한 행위에 분노한 국민의 거국적인 촛불 시위가 뜨겁게 타올랐고 국회에서는 현직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이 일련의 사건은 너무도 ‘한국적’이어서 국제사회는 이를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한다. 이 사건의 어떤 점들이 한국적인가.
대다수 한국인은 대통령의 계엄령과 계엄군 동원을 공포스럽게 지켜보며 1980년의 비상계엄과 광주학살을 떠올렸다. 정치적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나 최근 극우세력의 득세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정치적 ‘색깔’을 덧씌워 잔인무도한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는 행위는 우리에게는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역사의 시야를 좀 더 넓혀 보면 그 같은 국가폭력은 20세기 전반기의 독립운동가 탄압, 19세기의 100년 가까운 천주교 박해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역설적이지만 자신이 믿는 정치적 신념 체계가 현실에서 탄탄한 기반을 잃을수록 권력욕에 사로잡힌 자들은 그 신념을 더욱 절대화하고 다른 신념은 적대시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하려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정치문화는 이런 고질병을 앓고 있다.
그래도 계엄 사태에 기민하게 대처해 해제를 압박하고 마침내 탄핵소추안 가결까지 추동한 한국 국민에게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쉽게 따라가지 못하는 역동적인 면모가 분명히 있다. 이를 간파한 국내외 언론에서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비상한 시기에 시민들의 기민한 정치적 행동으로 표출됐다고 하기도 하고 응원봉을 손에 쥐고 케이팝을 개사한 노래를 흥겹게 부르는 시위대의 거대한 ‘물결’을 보고는 K-시위 문화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엄밀히 말해 ‘빨리빨리’는 가속 기술을 추구하는 근대 상공업사회의 공통된 특징이지만 외국인이 이구동성으로 한국 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빨리빨리’를 지적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근대 이후 한민족이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 남기 위한 생존술을 몸에 익혔기 때문이겠지만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야성 혹은 신기(神氣)가 문화 전통이 돼 한국인의 마음속에 면면히 흘러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옛적에 이 땅에 살았던 백성들이 양반의 횡포에 맞서 풍자와 해학으로 쌓인 한을 푸는 놀이판을 벌였던 그 전통을 계승해 21세기에 한국인은 신명 나는 축제의 장으로 시위문화의 새로운 전범을 만들어 가고 있다.
K-민주정치가 비상한 시기에 일시적으로 주목되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는 현 시대에 참으로 의미 있는 정치적 대안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무엇보다 사익을 ‘옳음’으로 둔갑시켜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를 악마화하는 정치풍토를 일소해야 한다. 그런 풍토로 인해 우리 사회에는 비단 대통령이나 정당 지지의 문제뿐 아니라 여성, 성소수자, 환경 등과 관련한 21세기의 중요한 정치 의제에 대해서도 무관심, 무지, 혐오가 난무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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