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3일, 오랜만에 상하이를 찾았다. 2019년 개봉한 랄프 로렌의 첫 다큐멘터리 〈베리 랄프(Very Ralph)〉가 중국에서 첫 프리미어를 개최하며 스크리닝 이벤트를 열었기 때문. 푸둥국제공항에 도착하자 랄프 로렌의 얼굴과 ‘Very Ralph’가 쓰인 포스터가 커다란 광고판에 담겨 여행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포스터는 호텔로 이동하는 길목 곳곳에서도 바람에 너풀거렸다. ‘랄프 로렌의, 랄프 로렌에 의한, 랄프 로렌을 위한’ 이번 이벤트에 브랜드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온 상하이의 밤, 전야제가 시작되었다. 시곗바늘이 아홉시를 향하자 도시의 대표 야경 명소인 와이탄의 밤하늘은 랄프 로렌의 초상화를 비롯해 브랜드의 아이코닉한 요소를 수놓은 드론 쇼로 화려하게 물들었다.
다음 날 〈베리 랄프〉를 보기 위해 상하이 콘서트 홀을 찾았다. 저명한 감독 수전 레이시(Susan Lacy)가 메가폰을 잡고 3년에 걸쳐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아메리칸 스타일’을 정의하며 패션계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한 남자의 여정을 따라 나선다. 러닝 타임은 1시간 48분. 영상은 1992년 뉴욕 CFDA 평생공로상을 수상할 때 상을 수여했던 오드리 헵번의 코멘트로 시작한다. “우리는 누군가 ‘랄프스럽다(Very Ralph)’고 말했을 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계 이민자이자 브롱크스 출신의 젊은 남자는 1967년 오래전 귀족들의 스포츠에서 이름을 딴 넥타이 브랜드 폴로(Polo)를 론칭한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한쪽 책상 하나 겨우 놓을 정도로 작은 사무실에서 시작된 사업은 넥타이에 걸맞는 셔츠, 재킷, 수트를 만들며 확장해갔다. 그리고 이 자수성가의 아이콘은 반세기에 걸쳐 남성복, 여성복, 애슬레저, 칠드런, 라이프스타일까지 성공시키며 수십억 달러 가치를 지닌 거대 제국을 건설하기 이른다. 이 밖에도 못다 이룬 영화감독의 꿈을 펼쳐낸 스토리텔링적인 광고 캠페인 이야기, 고인이 된 칼 라거펠트부터 칸예 웨스트, 나오미 캠벨, 안나 윈투어, 캘빈 클라인, 힐러리 클린턴, 마사 스튜어트,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제시카 차스테인 등 가까운 친구들의 인터뷰도 흥미롭다.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담았다. 19살이었던 아내 리키와 만나 사랑에 빠진 러브 스토리부터 가족과 함께 춤을 추고 휴가를 즐기는 등 쉽사리 보기 힘든 랄프 로렌의 가정적인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가 끝난 뒤 게스트들은 갈라 디너로 자리를 이동했다. 호스트는 로렌가를 대표해 아들 데이비드 로렌이 맡았다. 한국에서는 정수정(크리스탈)과 하정우가 참석했고, 수많은 중화권 셀럽이 자리를 빛냈다. 미리 크리스마스를 즐기듯 온통 빨간색으로 꾸며진 갈라 디너 현장, 이곳에서 발견한 랄프 로렌의 철학은 마치 그의 패션 세계를 대변하는 듯했다. “I don’t design clothes, I design dream.” 상상해보자. 랄프 로렌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의 ‘아메리칸 스타일’이 조금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미국 상류층, 카우보이, 인디안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미국적인 아름다움을 탐미하는 이는 흔치 않을 테니 말이다. 빛바랜 듯한 스웨이드 가죽 재킷에 워싱된 데님 팬츠, 카우보이 벨트, 웨스턴 부츠를 즐겨 입던 랄프 로렌을 떠올리며, 베리 랄프한 상하이의 밤의 그렇게 저물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