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관계개선을 대외 정책 1순위로 정한 윤석열 정부는 3.1절과 광복절에 단 한 번도 일본 식민 지배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급기야 지난 8월 16일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이 한국방송(KBS)에 출연해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 이라며 일본 식민 지배 역사에 대해 가해자인 일본을 이해하려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서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를 연재 중인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는 최근 출간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역사 교과서, 독도 영유권,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 한일 간 과거사에서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철저히 파헤쳤다.
김재명 전문기자는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주로 중동 지역의 분쟁을 많이 취재하고 기사로 기록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를 <오늘의 세계 분쟁>,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등의 책으로 펴내며 분쟁지역의 현실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봤다.
이처럼 오랜 기간 전 세계의 분쟁 지역을 취재하고 연구한 김재명 전문기자는 이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관점에서 일본의 전쟁범죄를 들여다봤다. 이미 중동 등 여러 지역에서 많은 전쟁과 분쟁을 봐왔던 그에게도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일본의 전쟁범죄는 "분쟁지역을 취재하면서 폭력과 죽음이 일상화된 모습들을 보긴 했지만, 막상 일본의 만행 기록들은 훨씬 끔찍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세계 분쟁을 주로 다뤘던 만큼 김 전문기자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고 동아시아로 확장해 관찰했다. 그 중 그가 주목한 것은 1937년~1938년 일본군이 벌인 난징 학살이었다.
김 전문기자에 따르면 일본군은 포로로 잡은 중국군인 당시 장제스 휘하의 국민당군을 양쯔강 변에 일렬로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집단 학살했다. 심지어 일본군 장교들은 군도로 누가 빨리 더 많은 포로의 목을 베느냐며 '100인 목 베기'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길 가던 민간인들도 붙잡혀 생매장 당하는 등 "한마디로 온갖 잔혹한 전쟁범죄들이 한꺼번에 난징에서 저질러졌다"고 김 기자는 고발했다.
난징대학살은 성폭행 피해도 심각했는데, 피해자가 최소 2만 명에서 최대 8만 명으로 추정된다. 1937년 당시 난징 인구가 50만 명 정도였고 이 중 중국군 병력이 15만 명이었는데 난징을 탈출한 병사는 4만 명에 그칠 정도로 엄청난 학살이 이어졌다. 김 전문기자에 따르면 현재 난징 희생자 규모는 여전히 논란인데 최소 20만 명 이상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물론 일본 극우들은 관련 문서가 없다며 '난징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김 전문기자는 731부대가 벌인 생체실험, 일명 '마루타'라고 불리는 사람을 실험에 활용했다는 점도 "유례를 찾기 힘든 잔인한 전쟁범죄"라고 진단했다. 당시 일본군은 세균무기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방안이라고 여겨, 세균무기 개발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생체실험 도구로 사용했는데 최소 3,000명에서 최대 1만 명으로 추정되는 '마루타'들이 반복되는 생체실험 끝에 죽어나갔다.
"일단 731부대 건물로 잡혀 들어간 사람들은 '마루타(통나무)' 취급을 받고 고통 속에 여러 생체실험을 거치며 죽어서야 그곳을 벗어났다. … 한 생체실험에서 살아남으면, 그다음 실험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게 이어진 여러 가학적인 과정을 겪으면서 끝내는 숨을 거두었다. 그래도 살아남았다면 독가스 실험으로 죽고 소각로로 실려 갔다"
이렇듯 일본의 전쟁범죄는 글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했지만,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축소·왜곡·미화하려 한다. 여기에 한국의 일부 학자들도 가세하고 있다.
일본 후소샤의 <새로운 역사교과서>와 한국의 '교학사' 출판사가 내놓은 교과서는 유사한 과거사 인식을 가지고 있다. 후소샤의 교과서에서는 일본 전쟁범죄를 두고 '전쟁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는 식의 주장을 한다. 교학사 교과서는 일제 식민지배 시기에 조선에 철도와 학교가 다수 세워졌다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 극우파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주장을 옹호해주는 세력도 있다. 김 전문기자는 "<반일 종족주의> 공저자 이우연은 일본 극우파 후지키 슌이치가 지원한 항공표와 체류비로 UN인권이사회에 참석해 '일제 식민지 시기에 강제 동원은 없었다'고 연설"했으며 "<반일 종족주의> 대표 필자 이영훈, 그의 스승 안병직이 속한 낙성대경제연구소는 도요타재단의 지원을 받은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방법은 주로 구조를 보는 것이 아닌, 세부적인 사항을 주로 관찰하면서 제국주의 일본의 행태를 좁게 해석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김 전문기자는 토지조사사업과 관련, 이들은 당시 만든 각종 자료가 지금도 요긴하게 쓰인다는 식으로 긍정적 측면을 강조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식민지배를 통해 구조적인 폭력 속에서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이 벌어졌다는 것이 김 전문기자의 분석이다. 그는 1910년 일본인이 소유한 논 면적은 조선 전체 논의 5.1%였는데, 1932년에는 16.1%까지 증가했고,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조선 농업인구의 0.2%밖에 안 되는 일본인이 조선 논의 5분의 1가량을 소유했다고 밝혔다.
'위안부'에 대해서도 신친일파는 '좁은 의미의 강제'가 없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 김 전문기자의 판단이다. 업자들이 여성을 속이거나 유괴해 '위안부'로 만들었을 뿐, 일본군이 직접 강제로 여성들을 끌고 가지는 않았다는 식으로 주장하는데, 김 전문기자는 역사학자 야스마루 요시오의 입을 빌어 '위안부'문제는 '좁은 의미의 강제’가 핵심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야스마루는 "속아서든 강제로든 그 지옥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 '위안부' 여성들이 끝내 체념하고 상황에 적응해간 것도 강제나 폭력과 무관하지 않다"라며 "감언, 인신매매, 유괴와 현지에서의 일상적 관리 등은 ‘강제’가 아니냐"라고 되물었다.
이같이 일본의 극우 및 한국의 신친일파 주장이 근거가 빈약하고 논리적 비약이 있음에도 여전히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고 있는 이유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의 전쟁범죄를 명확하게 규명하지 않았던 배경에 기인한다.
2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인 1951년 9월 8일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단독 강화를 통해 일본의 주권을 회복시켰다. 또 미일 간 동맹을 공식화하기도 했는데, 공산주의와 경쟁에서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동진을 막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미국은 냉전체제에서 아시아의 파트너로 일본을 선택했고, 그에 따라 일본의 전쟁범죄의 명확한 규명과 처벌은 강대국들의 힘의 질서 변화로 인해 점점 멀어져 갔다.
김 전문기자는 "미국은 일본을 냉전의 파트너로 삼기 위해 전쟁범죄 처벌을 최소화했다. 총책임자인 히로히토 일왕은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세균 정보를 받는 대가로 731부대원들도 처벌하지 않았다. 육군대신,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도조 히데키 등 일부 고위급 인사들이 처벌받았지만, 일본이 저지른 범죄에 비하면 가벼운 처벌이었다"며 "오히려 포로수용소 감시원 등으로 원치 않게 전쟁에 동원된 조선인 전범자의 사형자 수(23명)가 일본인 전범의 사형자 수(7명)보다 많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히로히토 등 주요 전범들이 처벌받지 않은 결과 일본인들은 일본의 전쟁범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자신들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느끼지 못하게 됐다"며 "무엇보다 히로히토가 '천황' 자리에 그냥 머무는 것을 본 일본인들은 전쟁범죄에 대한 공범 의식을 덜 느끼게 됐다. '국왕이 전쟁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우리도 책임이 없다'는 분위기가 퍼져갔다"고 분석했다.
김 전문기자는 "1948년 12월 주요 범죄자들이 불기소로 풀려남으로써 '전범 처벌은 이제 모두 마무리됐다'고 여기게 됐다"며 "미국이 전쟁 주범 히로히토를 비롯해 일본의 전쟁범죄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여러 안건들이 '과거사'라는 이름의 미결 상태로 남게 됐다"고 진단했다.
이렇듯 초반부터 뒤틀린 일본 과거사 반성 문제는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김 전문기자는 "지난날 저지른 전쟁범죄를 두고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거나, 사과를 하더라도 '립서비스' 수준으로 사과의 진정성이 없거나, 사과 뒤 곧바로 망언을 하는 일들이 쳇바퀴처럼 되풀이되어 왔다"며 "총리가 사과를 하면 각료가 뒤집는 망언을 하고, 그런 사실을 선거에서 훈장처럼 내거는 일들이 '일본식 사과'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꼬집었다.
김 전문기자는 그럼에도 "용서하지 않을 권리도, 용서할 권리도, 범죄자와의 관계에서 오직 피해자가 갖는 권리"라며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범죄자 가족들도, 후손들도, 친구들도, 더군다나 정치가들이 용서를 구할 수는 없다"고 말해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배상 등의 조치가 있을 때 역사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일 두 나라의 화해, 좀 더 범위를 넓혀 동아시아의 화해를 위해선 '용서' 라는 길목을 지나야 한다"며 "용서는 진정성 있는 사과와 진상규명, 그에 합당한 배상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뤄질 것이다. 피해자(또는 그 유가족)가 아닌 제3자가 이래라저래라 용서와 화해를 말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2년 반 동안 일본의 진정한 사과보다는, 과거의 일은 적당히 덮고 한일 간 협력으로 나아가자는 입장을 꾸준히 밝혀왔다. 그래서 일본 내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 인용을 두고 한일 관계에 대한 우려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적당히 감추는 것으로 한일 관계가 개선됐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과거사 문제는 말그대로 과거에 이미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지울 수 없을뿐만 아니라 양국 정부 중 어느 쪽도 이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 한일 관계가 멈춰서면 안된다. 다만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진정한 사과를 하고 그에 따른 배상을 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한국 정부와 일본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보다 발전적인 한일 관계가 될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한국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진행 중이고 일본은 과거 총리들에 비해 과거사 문제에 유연한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집권 중이다. 또 2025년 한일 수교 60주년이기도 하다. 역사적인 기점에서 일본 측이 과거사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반성하는 진전된 입장을 통해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한일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 <일본의 전쟁범죄>는 한일 양국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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