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사태가 발생한 12월 3일 화요일 저녁. 나는 침대에 누워 다가오는 토요일 저녁에 만나기로 한 친구들과 약속 장소를 정하고 있었다. 날씨가 추우니까 그냥 게스트하우스를 빌릴까? ‘육퇴’하고 가면 6시가 넘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오가던 밤 10시 37분. 한 친구가 단톡방에 ‘미쳤다, 비상계엄 선포’라고 보냈을 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당연하지! 수십 년에 걸쳐 군부정권의 그림자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잘 작동하는 국가로 불리게 된 나라, 언젠가부터 가장 트렌디하고 가볼 만한 도시로 꼽히게 된 서울 한복판에서 2024년에 ‘계엄’이라는 단어가 울려 퍼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단 말인가? 그것도 투표로 뽑은 대통령 입에서? 국회를 지켜야 한다는데 당장 택시를 타고 국회의사당으로 가야 하나? 막상 갔는데 사람들은 없고 경찰 혹은 군인만 있으면 어떡하지?
물리적 폭력 행사를 허락받은 공권력은 무섭다. 운 좋게도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비폭력이 당연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회초년생 시절 경복궁역을 폐쇄할 정도의 큰 규모로 열렸던 한미FTA반대집회에서 어쩌다 보니 무리와 떨어진 적이 있었다. 당시 골목에서 전경들을 마주했을 때 즉각적으로 몸을 에워쌌던 공포를 기억한다. 평소에는 업무를 수행하는 또래 정도로 느꼈던 전경이 들고 있는 군용 방패가 얼마나 크고 묵직해 보이던지…. 사실 차 벽과 물 대포가 사라진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당장 2015년만 해도 정부가 정한 쌀 매입가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한 농민이 대학로 한복판에서 경찰이 쏜 물 대포에 맞아 사망했다. 알고 보니 대학 동기 아버지였던 백남기 농민이 사경을 헤매는 동안 시신 탈취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뉴스에 모여든 동기들의 얼굴을 서울대병원에서 마주했을 때의 참혹한 기분, 제대로 건넸는지 의심스러운 위로의 말. 그러니 그날 새벽, 계엄군의 총구를 잡고 “부끄럽지도 않냐”고 외쳤던 안귀령 대변인은 결코 ‘뭘 몰라서’ 그렇게 한 게 아니다. 모든 무기는 보는 순간 무섭다. 그건 분노와 용기가 공포를 앞질렀기에 가능한 행동이다.
“그럼 우리 토요일에 ‘집만추(집회에서 자연스럽게 만남을 추구)’하자”라고 단톡방의 약속이 정리된 이후에도 다른 친구와 선후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모두 쉽게 잠들지 못한 게 분명했다. 다행히 국회의원들이 본회의장 안에 무사히 진입했다는 소식, 계엄이 해제될 것이라는 뉴스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금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알람을 3시간 뒤로 맞춰두고 잠들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수면 패턴이 망가진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 날 곧바로 알았다. 평소 불안 증세라고는 전혀 없는 편인데 떨어지는 주가와 치솟는 환율을 보니 먹먹했다. ‘국격’이나 ‘위상’ 같은 표현은 좀 부끄럽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BTS, 손흥민, 렛츠고!’를 외치며 문화사회적으로 쌓아 올려온 것들이 거기에 기여한 바조차 없는 이들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게 황망했다. 인플레이션이 오면 어떡하지? 내년에는 진짜로 대출받아서 집 사려고 했는데…. 먹고사는 게 힘들어지면 인권 논의는 또 뒤로 쏙 들어가겠지…. 갑자기 눈떠보니 나라가 망했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길을 걷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빨래를 널다 울음을 터뜨렸다는 친구의 고백이 위로가 됐다.
다시 12월 7일의 여의도로 돌아가면, 그날의 분위기는 이전의 대규모 집회와는 분명히 달랐다. 우선 평소 집회 장소에서 친숙하게 보이던 단체들의 깃발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어려울 정도로 온갖 종류의 개인 깃발과 소규모 단체 깃발이 넘쳐났다. “집회의 배후가 누구냐”는 구시대적 추궁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아무 말 깃발’은 이제 확실히 문화가 됐다. 젊은 여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집회 대오를 습관적으로 찾아가는 우리 일행과는 달리 여의도공원 노지 곳곳에 돗자리를 깔고 무릎 담요를 덮은 채 응원봉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챙겨온 간식을 나누는 모습이 정말 콘서트장 밖의 모습을 그대로 ‘누끼를 따서’ 옮긴 것 같아 또 한 번 안도의 웃음이 났다. 단체 행동에 익숙한 기존 단체들의 노련함도 발휘됐다. 집회 시작 후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국회의사당 정문과 여의도공원 사이의 도로가 막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던 찰나 “여러분 저희가 길을 열겠습니다!” 하고 나선 것은 민주노총이었다. 겨울철 아스팔트의 한기가 얼마나 빠르게 퍼지는지 미처 모르고 신문지만 깔고 앉은 나는 휴대용 스티로폼 방석을 ‘나눔’받았다. 파업이 한창이었던 철도노조 관계자, 10대 청소년과 악화된 남북관계 때문에 극심한 소음 테러를 매일 같이 겪고 있는 강화군 주민 등 다양한 성별과 연령대의 사람들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이번 집회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불렀던 K팝 리스트와 응원봉 불빛, 선결제 문화와 깨끗하게 청소된 거리, 재미있는 피켓과 깃발 등 밝고 소위 ‘무해한’ 부분들이 주로 호명된다. 그러나 한파 속에 소중한 주말 하루를 포기하고 불안과 위기의식에 모여든 사람들이 내내 흥겨울 리 없다. 탄핵소추안 의결을 앞둔 상황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국회의사장을 떠날 때, 현장 분위기는 분노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며칠 사이 얼마나 많은 단체의 성명서가 있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심지어 당위성도 충분한데, 대의 민주주의를 하라고 뽑아놓은 국회의원이 최소한 ‘투표 참여’조차도 하지 않은 것에 어마어마한 모멸감을 느꼈다. “○○○ 돌아와!” 자리를 벗어난 의원 한 명 한 명 이름을 호명하며 국회의원 한 명이 가진 무게감, 108석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 의석인지도 체감했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정말로 많은 사람이 있었다. 앉아 있던 국회의사당 앞 도로를 빠져나와 여의도공원까지 가는 데만 40분 정도 걸렸는데, 여의도역 쪽을 보니 반대편에서 새로운 인파가 끝없이 몰려왔다. 여의도 버스환승센터가 있는 8차선 도로와 그 뒤로 펼쳐진 의사당대로가 사람으로 가득 찬 풍경은 처음이었다. ‘일단 탄핵까지는 반드시 된다’는 희망과 확신이 생겼다. 분노와 실망감은 있었지만, 패배감은 들지 않았다. 단 세 명의 의원을 제외하고 등을 보이고 비겁하게 자리를 떠난 것은 여당 의원이지 우리가 아니었으므로.
8~9년쯤 됐을까?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을 찾았다가 인상 깊은 방문 기록을 본 적 있다. 역사 왜곡과 극도의 지역 혐오 표현으로 문제가 됐던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이 남긴 포스트잇이었다. “얘들아, 그런데 5·18은 폭동이 아닌 것 같다”고 쓴 손 글씨를 보며 ‘현실’을 ‘직접 목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 그러니 누군가가 너무 정치적이라고, 선동당했다고 느낀다면 일단 현장에 가봤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서 보고 직접 판단하면 좋겠다. 유튜버 한 명의 ‘썰’과 편집된 영상, 온라인에 떠도는 사진이나 캡처본 외에 더 많은 진실이 현장과 사람들 얼굴에 실제로 존재한다. 그게 설령 내 의견과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반감이 든다면 슥 지나가면서 봐도 괜찮다.
100만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대의를 갖고 한자리에 모이는 집단적 경험을 주기적으로 하고 있으며, 수도권 뿐 아니라 지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꾸준히 목소리를 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 집단’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정치색을 지우는 게 권장되는 것은 우려스럽다. ‘일반 시민의 무해함’과 ‘탈정치성’을 내세우는 것은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현상은 아니다. 어떤 일상도 결국 정치와 떨어져 존재할 수 없으며, 시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할 때 그 발언 자격을 검증할 수 있는 권리를 누군가에게 쥐여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아직 모른다. 하지만 결국 대한민국은, 늘 그랬듯이 어떻게든 엎치락뒤치락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이 믿음을 품고 광화문으로 향할 예정이다. 그러니까 “BTS, 손흥민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 렛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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