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소설'블러핑'64] 박정희 저격범 문세광은 4개월 만에 사형집행

[팩션소설'블러핑'64] 박정희 저격범 문세광은 4개월 만에 사형집행

저스트 이코노믹스 2024-12-19 05:50:00 신고

3줄요약
패러디 삽화=최로엡
패러디 삽화=최로엡

1974년

영부인 살해사건

 1974년 8월 15일, 박종희 대통령의 저격 미수 사건이자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살해당한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반한 운동을 벌인 전력으로 중앙정보부의 요시찰 인물이었던 문세광이었고,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 2세로 사건 당시 만 22세였다.

 박종희 저격 미수 사건이 일어난 8월 15일 오전 7시 문세광은 조선호텔 자신의 방에서 프런트로 전화를 걸었다.

“국립극장으로 가야 하는데 오전 8시 30분까지 승용차를 부탁해요.”

문세광은 권총에 실탄을 장전한 후에 허리춤에 숨기고 오전 8시 40분에 호텔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 그는 차 안에서 운전기사에게 1만 원을 주며 말했다.

“국립극장에 도착하면 내려서 문을 열어주세요. 제가 다리가 좀 불편해서 그러니 부탁합니다.”

“어이구, 걱정 마세요.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국립극장으로 가던 도중 문세광은 허리춤에 숨겨둔 권총의 공이치기를 풀어 놓아 언제라도 쏠 수 있게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정각 9시 문세광을 태운 승용차는 국립극장 정문에서 검문도 받지 않고 극장 계단 아래까지 도착했다. 나이가 지긋한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공손히 예의를 갖추고 뒷문을 정중하게 열어 주었다. 검은색 외투와 중절모를 쓴 문세광은 누가 보아도 귀공자 같은 외모였다.

 문세광은 차에서 내리자 거침없이 식장 출입구로 향했다. 출입구에는 대통령 경호원 3명과 경찰관 8명이 근무 중이었지만 문세광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지켜본 경호팀들은 고위 인사라 생각하고 별다른 검사 없이 통과시켰다. 극장 안으로 들어온 문세광은 1층과 2층을 오가면서 저격하기에 마땅한 장소를 찾았다. 그때 3명의 경호원이 문세광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문세광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자신이 먼저 경호원에게 다가가서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제가 우리 일본 대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혹시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근무 중이라.”

경호원은 친절하게도 다른 경호원에게 부탁을 했다.

“저 분이 일본 대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도와주세요.”

인계받은 경호원은 문세광에게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몇 분 후 박종희가 입장하는 것을 지켜본 문세광은 5분 정도 머물다가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1층 C석 맨 끝 열인 재일교포용 지정 좌석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박종희 대통령은 경축사를 낭독하고 있었다.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는 순간 총성이 났다. 언제든 쏠 수 있게 권총의 공이치기를 풀어 놨는데 총을 꺼내다가 오발로 자기의 왼쪽 허벅지를 쏴 버렸다. 문세광은 오발하자마자 1층 B석과 C석 사이의 통로를 나와 연단을 향하여 뛰어갔다. 이때 문세광을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객석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며 2번째 총소리가 났다. 총탄은 박종희가 연설 중이던 연대에 박혔다. 그제야 사람들은 문세광이 단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장내가 아수라장이 된 사이 문세광은 이미 단상 밑까지 갔다. 박종희 대통령과 거리는 불과 10여 미터였다.

그는 권총 사격 자세를 취한 후 3발을 연속해서 발사했다. 오른쪽에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의 머리를 관통했다. 곧장 경호원들이 문세광을 덮쳤다.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체포된 문세광은 북한의 대일 공작선인 만경봉호에서 박종희를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였는데 요시이 유키오라는 이름의 위조 여권으로 입국하였다.

가짜 여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오사카 총영사관은 문세광에게 비자를 내주었고 이는 모두 중앙정보부로 보고가 올라갔다.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식장에 출입할 때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경호관이 가슴에 비표를 달아주는데 문세광은 비표도 없이 권총을 소지한 채 금속 탐지기를 통과해서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문세광은 체포되어 중앙정보부 조사실로 압송되었고, 체포된 지 불과 5시간 만에 자신이 암살범이며 본명은 문세광이라고 자백했다.

사건 발생 4개월 뒤에 서울구치소의 사형집행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경호 책임자인 박종규 경호실장과 국립극장 행사 관리 책임자인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이 경질되었고 후임으로는 차지철, 구자춘이 임명되었다.

경호실장 자리를 차지한 차지철은 경호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중앙정보부, 대통령비서실을 비롯한 권력기관들에 월권을 행사해 김재규와 앙숙이 되었고 후일 10∙26사태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문세광이 재일 한국인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당시 한일 관계도 악화하였다. 사건 다음 날인 16일 노신영 당시 외무차관은 주한 일본대사를 소환해 문세광에게 일본인 명의의 여권을 발급한 데 대한 공식 해명을 요구하는 동시에 조총련 등 일본 내 공범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으나 일본의 수사는 적극적이지 않았고 도리어 일본에서는 반한 여론이 고조되었다. 당연히 대한민국에서는 반일 여론이 거세어져 주한 일본대사관 주변에서 매일 같이 항의 집회가 벌어졌다.

김중필 국무총리는 데모대의 일본대사관 접근 금지 조치를 내린 후, 박 대통령 저격 사건의 배후 수사에 대해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하였다.

“일본에 있는 조선대학은 공산당 간부를 교육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파괴하고 전복하기 위한 간첩 양성소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조총련을 왜 그렇게 감싸는 겁니까? 지금 우리 국민이 국모를 잃고 얼마나 비통해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저로서도 참으로 난감합니다. 어찌 이런 황망한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지금 대통령께서는 일본과 단교까지 생각할 정도입니다.”

“허 참,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전까지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일본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던 상황에서 박종희는 정치적으로 역전을 하였고, 미국 역시 인권 문제에 대한 공격 수위를 낮추었으며 학생 운동도 잠잠해졌다. 육영수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국민의 분노는 엄청났고, 문세광이 북한과 관련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의혹 속에 반공주의도 더욱 강해졌다.

대통령을 10년이나 모셨던 박종규 경호실장은 사임하고 차지철이 경호실장으로 임명되었다. 김중필 국무총리는 대통령에게 후임 경호실장으로 5∙16 당시 한강 인도교에서 헌병과 교전까지 치르며 서울로 제일 먼저 진입하여 쿠데타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오정근 국회의원을 추천하였으나 박 대통령은 차지철 의원을 경호실장으로 임명하였다. 박종희 대통령이 김중필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대통령의 장녀 박지혜가 귀국해서 영부인 역할을 대신했다.

 [팩션소설'블러핑'65]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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