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박정현 기자] 일본이 통신기업 소프트뱅크를 앞세워 대미 트럼프 투자의 '골든타임'을 잡았다. 디지털 전환에서 한참 뒤처진 일본이지만 인공지능(AI) 투자에 과감한 행보를 보이는 소프트뱅크를 물밑 지원해 '디지털 주권'을 확보한다면 향후 동아시아 AI 주도권을 갖게 될 수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16일(현지시간) 당선 이후 첫 기자회견 자리에서 손정의(일본명 손 마사요시) 일본 소프트뱅크 그룹 회장의 1000억달러(143조원) 규모 미국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 소프트뱅크의 투자는 챗GPT를 포함해 AI 관련 기반시설, 데이터센터, 반도체 등의 분야를 아우른다. 트럼프 당선인은 "손 회장과 매우 생산적인 회의를 했다. 소프트뱅크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투자·기술 기업"이라고 말하며 손 회장에게 국가적 지지를 약속했다. 손 회장은 "일본 국민은 미국과 일본 간 파트너십 강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라고 답했다.
지난달에는 AI 생태계를 장악 중인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일본에서 '엔비디아 AI 서밋 재팬'을 열고 손정의 회장과 함께 자리했다. 이 자리에서 젠슨 황 CEO는 "일본 AI 생태계를 가속화하고 글로벌 AI 경제에서 일본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 기업들과 협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프트뱅크는 세계 최초로 엔비디아의 DGX B200을 사용해 'DGX슈퍼POD'라는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AI 슈퍼컴퓨터를 만들 예정이다. 향후 이 슈퍼컴퓨터를 통해 일본형 거대언어모델(LMM)도 개발한다. 국내 KT가 마이크로소프트(MS)와 손잡고 한국형 LLM을 만드는 것과 같다.
손 회장이 지난해 상반기 "소프트뱅크는 세계에서 AI를 가장 많이 활용하는 기업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 이후 실제로 그룹은 젠슨 황이나 도날드 트럼프와 같은 미국 기술 산업의 주요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며 세력을 넓혀나가고 있다.
소프트뱅크의 세력 확장은 일본 AI 산업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주의깊게 봐야 한다.
1981년 설립된 소프트뱅크는 통신과 인터넷 서비스를 기점으로 성장했지만 현재는 로봇, AI, 클라우드 컴퓨팅 등 다양한 기술 분야로 사업을 확장해 일본 대표 IT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생성형 AI 부문에서는 일본 기업 중 최대 규모의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그룹은 세계 최고 규모의 기술 투자 펀드 자회사 '비전펀드'의 자산 상당 부분을 매각함으로써 AI 투자자금을 마련했다. 또 소프트뱅크가 대주주인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 ARM을 통해 AI 전용 반도체를 개발하고, 이를 기반으로 2026년까지 유럽·아시아·중동에 데이터센터를 세우려 하고 있다. 내년 4월 이후에는 엔비디아와 함께 일본어에 특화된 1조 파라미터 수준이 AI 모델 제조도 예정돼 있다.
일본 정부도 소프트뱅크를 지원하는데 가감이 없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컴퓨팅 자원을 강화하기 위해 10억달러(1조4000억원) 규모의 광범위한 이니셔티브를 구축하는 등 AI 주권을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고 있다. 이 중 421억엔(4000억원)의 보조금을 소프트뱅크의 AI 슈퍼컴퓨터 정비를 위해 쓰기로 결정했다. 4월에는 네이버의 일본 자회사 NHN재팬의 '라인'과 일본 소프트뱅크의 '야후재팬'이 2019년 합작해 탄생한 '라인야후'에서 네이버를 배제하라는 취지의 행정지도를 내리기도 했다.
일본이 소프트뱅크를 통해 자국의 대규모 LLM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본 내에서 공공 인프라로 자리잡은 라인의 데이터를 확보해야 한다. 정부 개입으로 네이버가 밀려난다면 전세계 2억명의 사용자를 둔 라인의 글로벌망과 라인플러스의 기술, 노하우는 소프트뱅크가 가져갈 수 있다.
일본 정부가 개인정보 유출을 빌미로 민간기업의 소유구조를 바꾸라고 압박하는 건 국제적으로 이례적인 일이지만, 업계는 소프트뱅크가 일본 정부와 물밑 교감 하에 AI 육성방안의 하나로 라인 사태를 지지, 또는 방관하고 있을 가능성을 봤다.
커지는 AI 시장을 겨냥한 IT 기업들의 행보가 트럼프 당선인이 이끌게 될 미국과 손잡는 것으로 귀결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소프트뱅크가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면, 일본 정부 차원에서는 아베 전 총리의 부인 아키에가 트럼프 당선인 내외와 회동하는 등 공략하고 있다. 일본이 트럼프 당선인 측과의 관계 구축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은 비상계엄·탄핵정국 여파로 대미 외교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는 중이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로는 미국 현 정부 및 차기 행정부와 심도 있는 전략적 소통을 하는 데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미국도 일본의 발빠른 행보에 화답하고 있다. 이날 트럼프 당선인은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취임 전 회동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일본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답했다. 한국에 대한 언급은 따로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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