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높은 시리아 알 아사드 정권의 '고문 감옥' 안에서

악명높은 시리아 알 아사드 정권의 '고문 감옥' 안에서

BBC News 코리아 2024-12-17 19:00:18 신고

3줄요약
사야드나야 교도소
BBC/Fred Scott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중심부에서 차로 30분 정도 이동하면 어느 으스스한 언덕에 자리한 사야드나야 교도소가 보인다.

지난 며칠간 이곳 교도소 입구는 녹색, 흰색, 검은색으로 다시 칠해졌다. 시리아 혁명기의 색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곳에 맴도는 어둡고 불길한 분위기는 그대로다.

교도소 정문을 통해 걸어 들어가며 바로 이 길을 걸었을 시리아인 수천 명이 느꼈을 절망에 대해 생각했다.

추정치에 따르면 2011년 시리아 전쟁이 시작된 이후 몇 년간 이곳 사야드나야 교도소에서 사망한 수감자는 3만 명 이상이다.

바샤드 알 아샤드 정권이 운영하던 수용소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들이 약 10만 명(대부분 남성이나 여성 수천 명 및 아동들도 포함돼 있다)임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

알 아사드 정권이 운영하던 교도소 중에는 덜 잔혹한 곳도 있었다. 집으로 전화도 걸 수 있었으며, 가족들의 면회가 허용되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사야드나야 교도소는 이 정권의 가장 어둡고 썩어버린 부분이었다. 이곳에 끌려가 아무도 모르게 죽임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알 아사드 정권이 유지한 억압적인 통치 시스템의 핵심이었다.

우선 당국은 이곳에 수감된 이들의 가족에게 수감 사실을 알릴 필요가 없었다. 가족들이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게 만드는 것도 압력을 가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정권은 무수히 많은 정보기관의 막강한 권한과 정보력, 야만성 및 일상적으로 자행하던 고문과 처형의 고문을 바탕으로 시리아 국민들의 목을 이토록 짓누를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리비아를 통치했던 카다피가 운영했던 트리폴리의 아부 살렘 교도소와 아프가니스탄 카불 외곽 소재 풀-레-차르키 교도소 등 다른 악명 높은 교도소도 방문한 경험이 있다.

이곳을 운영하던 세력이 몰락한 이후 방문한 두 교도소 모두 사야드나야 교도소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이 교도소만큼 더럽고 끔찍한 곳도 없다.

사야드나야 교도소 수감자들은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찬 감방에서 생활했으며, 화장실에도 제대로 가지 못해 비닐봉지에 소변을 봐야 했다.

자물쇠가 부서지면 수감자들은 더러운 헝겊과 담요 조각으로 몸을 가린 채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해야만 했다. 기록으로 남아 있다시피 고문과 처형도 이뤄졌다.

해당 교도소가 해방된 지금, 앞으로 몇 달 동안 이곳에 수감됐던 이들로부터 이곳에서 과연 어떠한 끔찍한 일이 자행됐는지 더 많은 정보가 공개될 것이다.

사야드나야 교도소의 복도를 걷다 보면 알 아사드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파괴한 국가를 복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 느낄 수 있다.

현재 시리아처럼 이제 이 교도소의 문은 부서진 채 열려 있다. 이곳은 알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고 휩쓸려간 이후 시리아가 직면한 여러 어려움을 모아둔 축소판이다.

기록

우선 아사드 정권이 정확히 희생자들에게 어떤 짓을 벌였는지 기록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사야드나야 교도소 관련 기록을 보존하고자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불과 일주일 만에 시리아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교도소 사무실 곳곳, 심지어 교도소 안뜰 콘크리트 바닥에도 여러 서류가 흩어져 있었다.

가족들은 흩어진 파일과 서류를 주어 혹시 이름, 날짜, 장소 등을 알아볼 수 있는지 살폈다.

이렇듯 어지러이 흩어진 기록은 마치 누군가 알 아사드의 통치 아래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숨기고자 애쓴 흔적처럼 보였다. 몰락의 과정에서 독재자와 그 일당들이 진실을 은폐하지 않도록 막는 일은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해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하다.

서류를 살피는 두 여성들
BBC/Fred Scott
사파나 바클(오른쪽)은 사야드나야 교도소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려는 자원봉사자 중 하나다

원래 음악가인 사파나 바클은 자원봉사자들에게 마스크와 파란색 고무장갑을 나눠주며 어떻게 문서를 촬영하고 수집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을 전달했다.

바클은 자신을 비롯해 이곳에 모인 자원봉사자들이 아마추어임을 인정하면서 국제 인권 단체도 없고, 증거와 문서가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섰다고 설명했다.

바클은 "(우리의 노력 덕에) 누군가 사랑하는 이가 이곳에 없거나, 죽었다는 대답을 얻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이곳은 정말 혼란스럽습니다 … 이 모든 혼란을 기록해야 하는 국제 단체는 대체 어디 있습니까?"

이러한 기록 보존 활동은 단순히 수감자의 가족들에게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답을 주기 위한 목적뿐만이 아니다. 언젠가 혹시 가해자들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날, 문서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눈물을 흘리는 여성
BBC/Fred Scott
악명 높은 사야드나야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에 관한 증거를 찾은 후 눈물을 흘리는 자원봉사자 위다드 할라비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진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곳 교도소의 악명이야 워낙 유명했으나,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자원봉사자로 나선 위다드 할라비는 1시간가량 감방에서 증거를 찾다 마스크를 벗고 그만 눈물을 흘렸다.

"나는 이곳에서 인간답지 않은 삶이 무엇인지 목격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무엇을 걸치고 있었을지 상상했습니다. 어떻게 이들은 이곳에서 숨을 쉬었을까요? 어떻게 먹었을까요? 기분이 어땠을까요?"

"끔찍합니다 … 끔찍해요. 바닥에 소변 봉지가 쌓여 있습니다. 이들은 화장실에 갈 수 없어서 봉지에 소변을 봐야 했습니다. 악취도 심합니다. 이곳에는 햇빛은 물론 빛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숨 쉬고 있을 때 이곳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정의 혹은 보복?

시리아 국민들과 새 정권이 이전 정권의 책임 있는 자들을 추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로 도망쳤다. 알 아사드 일가 모두가 그렇듯 폭력과 부정부패로 악명 높은 남동생 마헤르 하페즈 알아사드의 경우 이라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알 아사드의 친지 2명은 레바논으로 탈출하려다 반군과 마주쳤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그중 1명은 이후 벌어진 총격전 중 숨졌다고 한다.

일주일 전 시리아에 들어갔을 때 레바논으로 향하는 국경에는 차량 수백 대가 줄지어 있었다. 알 아사드 정권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이들로, 새 정권이 들어서면 자신들은 위험에 빠질 것이라며 낙담한 채 떠나고 있었다.

동시에 이들과 반대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필사적으로 레바논에서 시리아로 향하는 이들도 수백 명이었다.

향후 알 아사드 대통령 및 그 가족들, 정권 수호를 위해 무기를 들었던 이들을 법적으로 기소하는 절차가 진행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증거가 수집될 것이다. 그러나 정권이 몰락하기 직전 마지막 몇 시간 동안 벌어진 대탈출 행렬과 이후 이어진 혼란스러운 나날들로 인해 책임자들을 찾아내기란 어려울 것이다.

한편 사야드나야 교도소에서는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정보를 얻고자 건물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었다. 실종자의 가족들로, 이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보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12월의 추운 날씨에 이곳 교도소의 감방과 교도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알 아사드 정권의 범죄와 관련된 사람들이 처벌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졌다.

한편 남성 몇몇이 교도소 안뜰에 모여 조용히 담배를 피우며 바닥에서 주워 온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모든 시리아인들이 미래는 과거에 대한 정의 실현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말했다.

실종된 아들, 형제, 사촌을 찾고 있다는 이 남성들은 사야드나야 교도소는 집단 무덤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이들은 바샤르 알 아사드의 목을 원한다고 했다.

누군가 그의 참수를 원한다고 외치자, 이들은 웅얼거리며 동의한다고 했다.

형을 찾고 있다는 아흐메드라는 청년도 마찬가지다. 아흐메드는 꿈에서 형이 나왔기에 아직도 형이 살아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아흐메드 본인도 이곳 교도소에서 3년간 투옥됐었다고 한다.

"고문, 음식, 모든 것이 너무 끔찍했습니다.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교도소에서 만난 남성들
BBC/Fred Scott

나이가 좀 더 있어 보이는 모하메드 칼라프라는 남성은 2014년 사라진 아들 자브르를 찾고 있다고 했다. 아들은 가족들과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정보 당국에 의해 끌려갔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카미슬리, 하사카, 데이르 알-주르, 알 라카 등에서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의 행방을 알고자 찾아왔습니다. 자녀들의 행방을 찾아 길을 떠도는 사람이 수천 명입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한 감방 안에서는 알레포에서 왔다는 청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금속 통에 불을 피워 추위를 피하고 있던 이들은 이리저리 흩어진 낡은 죄수복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들은 구금됐다가 실종된 형제들을 찾고 있다고 했다.

사야드나야 교도소에서 정보나 시신을 찾고 있는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따로 호텔에 묵을 돈이 없어 형제들이 지냈을, 그리고 아마도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은 이곳 감방에서 불을 피우며 지내고 있었다.

그중 하나인 에제딘 칼릴은 2015년 9월 1일에 정권에 의해 납치된 형제를 찾고 있다고 했다. 이들 모두 가족이 납치된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고 있었다.

"형제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시신을 받고 싶습니다. 죽었다면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그와 함께 있던 모하메드 라드완은 2012년에 구금된 형과 사촌을 찾고 있다고 했다. 정권이 무너지기 전날 밤, 냉동 트럭 22대가 시신을 수습하고자 이곳 교도소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해당 소문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칼릴과 라드완 모두 이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라드완은 이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듯 알 아사드를 향한 비난을 쏟아냈다.

"이 돼지야, 냉동 트럭 22대는 어디로 빼돌린 거야? 이 범죄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 사야드나야 교도소 관련자들 모두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전부 다요! 이곳의 청소부일지라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모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다면, 적어도 가족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살해, 학살, 교수형 또는 고문을 당했다고 말해줬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이슬람식 기도로 마무리했다.

"알라는 내게 충분하시며, 진정으로 일을 가장 잘 처리하시는 분입니다."

알 아사드와 그 일당들이 처벌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시리아 국민들의 이 같은 열망은 향후 몇 달간 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시리아 국민들은 자신들을 괴롭혔던 이들이 처벌받는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란다.

부정부패

한편 알 아사드 가문은 시리아를 마치 자신들의 개인 계좌처럼 이용했다. 이들은 수익성이 좋은 통신 및 모바일 시장을 장악했으며, 수익이 나는 기업의 지분을 차지했다. 알 아사드 일가가 현금을 긁어모으는 동안 국민들은 전쟁으로 파괴되고 탐욕스럽고 부패한 정권에 의해 거덜 난 경제 상황 속에서 생계를 꾸려 나가고자 발버둥쳤다.

앞으로 시리아에는 새로운 통치자들이 들어서겠지만, 이들이 물려받을 것이라고는 엄청난 국가 빚과 땅에 떨어진 시리아 통화 가치이다. 시리아 돈을 쓰레기봉투 가득 채워야 수백달러 정도다.

한편 부정부패는 교도소 시스템에도 침투했다. 지옥 같은 감옥에서 몇 년간 살지 않고자 피해자와 가족들은 거액을 지불하면서까지 나오고자 했다.

하산 아부 슈와브(31)는 과거 테러(알 아사드 정권이 반정부 활동을 표현한 단어)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11년간 복역했다.

조용한 말투의 슈와브는 자신은 무장 단체에 가담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캐나다 유학 제안을 받아 여권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던 중 구금됐다고 설명했다.

슈와브의 형은 그를 빼내고자 가족들이 5차례에 걸쳐 총 5만달러(약 7000만원)의 뇌물을 건넸다고 말했다. 그러나 번번이 관료들은 돈만 받고 슈와브를 풀어주지 않은 채 입을 닫았다.

정권이 무너지기 몇 주 전에는 어느 판사로부터 5만달러를 주면 슈와브를 풀어주겠다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체포된 슈와브는 군 정보기관 심문실에 80일 동안 구금돼 고문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다리 하나가 부러지기도 했다.

슈와브에 따르면 함께 감방에서 지낸 49세 남성은 3일간의 고문 끝에 사망했다고 한다. 교도소 측은 그의 사망 원인을 뇌졸중으로 기록했다.

하산 아부 슈와브
BBC/Fred Scot
과거 군 정보기관 심문실에 구금된 하산 아부 슈와브는 고문을 당했다

슈와브는 집에 돌아와 너무 기쁘다고 했다.

"11년 만에 어머니가 안아주셨을 때의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집과 살던 마을로 돌아가는 것보다 좋은 일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시리아인이 그렇듯, 미래에 대한 슈와브의 낙관적인 시각은 몰락한 정권의 지도자와 그 일당들이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돌이 아니라 영혼을 지닌 인간입니다.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이들은 공개적으로 처형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상황을 극복해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시리아인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맡았던 일과 책임으로 돌아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잊어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의)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모든 슬픔을 뒤로해야 합니다."

반군 조직 '하야트타흐리르알샴(HTS)'의 지도자 또한 전쟁 당시 사용했던 가명인 '아부 모하메드 알-졸라니' 대신 자신의 본명인 '아흐메드 알-샤라'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앞을 내다보자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정의를 원하는 시민들이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나서며 혼란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알-샤라는 축출된 이전 정권의 책임자들을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고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미래는 힘들고 과거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이곳 다마스쿠스에서는 마치 한 국가의 어깨에 집단적인 짐이 내리누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리아 국민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가 얼마나 깊은지 잘 알고 있다. 알 아사드의 몰락으로 생겨난 낙관적인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 이들은 이제 진전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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