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우크라이나 정치인이 지난 몇 달간 자국 국내실향민 무려 15만 명이 러시아가 점령 중인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하면서 우크라이나 정부가 피난민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고 있는지, 러시아 점령지로의 귀향길이 위험하지는 않은지 등의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여당 소속 의원인 막심 트카첸코는 국내실향민들이 아직 러시아 점령지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란다며, 그 이유는 바로 정부의 지원 부족이라고 주장했다.
당국은 이 같은 발언을 일축했다. 이후 트카첸코 의원도 귀향길에 오른 피난민 수를 정확히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인정하며 주장을 철회했다.
UN은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침공한 이후 고국을 떠나 유럽 각지에서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인이 약 620만 명일 것으로 추정한다. 우크라이나 내에서 다른 도시로 옮겨가 살고 있는 국내실향민은 460만 명 정도다.
UN 자료에 따르면 본격적인 침공 전 우크라이나 인구는 약 4000만 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귀향하고자 하는 우크라이나인 규모는?
우크라이나 동부 출신으로, 현재 국내실향민과 함께 일하고 있는 트카첸코 의원은 과거부터 종종 시민들이 점령지로 귀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리우폴 시청 관계자였던 페트로 안드리슈첸코 또한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남동부 도시 마리우폴은 지난 2022년 봄부터 러시아가 줄곧 점령하고 있는 지역이다.
안드리슈첸코는 우크라이나 당국이 실향민들에게 매달 주던 보조금 지급이 중단된 2023년부터 이러한 귀향 흐름이 포착됐다면서, 다만 실향민들에게는 피난간 곳에서의 저렴한 임시 거주지 마련이 가장 힘든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할 신뢰할 만한 데이터가 없다며 일축했다.
이리나 베레슈크 우크라이나 부총리는 "우리 국민 수천 명이 국가로부터 한 달에 2000~3000흐리우냐(약 6만~10만원)를 지원받지 못해 러시아 점령지로 돌아간다는 주장을 절대 믿을 수 없다"며 반박했다.
그러면서 비록 자원이 부족하긴 하나, 정부는 실향민들을 위해 약속했던 모든 것을 지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러시아 언론은 자국의 국경 통제 담당자의 말을 인용해 2023년 10월 이후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한 우크라이나인이 10만7000명, 입국이 허용된 인원이 8만3000명이라고 보도했다. 셰레메티예보 공항은 우크라이나 국민이 러시아에 입국할 수 있는 유일한 국경 통과 지점이다.
강제 이주를 연구하는 사회학자 리디아 쿠젬스카는 점령 지역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맞지만,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가 부족해 정확히 몇 명이 영구적으로 다시 정착하고자 돌아오는 것인지, 그저 왔다 갔다 하는 것인지 파악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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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하려는 이유
그렇다면 실향민들은 왜 귀향하길 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쿠젬스카는 러시아 당국의 국유화로 사유재산을 뺏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러시아 법에 따라 우크라이나 내 부동산 소유주는 러시아 여권을 발급받아 직접 재등록해야 한다.
"자신이 두고 온 것을 잃고 싶지 않다면 다시 점령지로 돌아가 여권을 발급받아 부동산을 팔고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BBC는 점령지로 돌아간 지인을 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수도 키이우에 거주하는 올레나(가명)의 친구는 은퇴한 부모님이 최근 도네츠크의 러시아 점령지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들은 2022년 전면전이 시작되고 피난길에 올랐다.
"제 친구는 부모님을 간신히 설득해 떠날 수 있었으나, 친구 부모님은 이곳 (키이우)에 계속 머무르지는 않겠다고 하셨다"는 올레나는 "나이 드신 분들은 그동안 일군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임시 숙소에서 살아가는 삶을 감당하지 못하셨다. 그리고 자식이 자신들의 월세를 내주는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셨다"고 설명했다.
2022년 당시 국내실향민이 넘쳐났던 우크라이나 남부 어느 지역에 사는 스비틀라나는 마리우폴에서 이곳으로 피난 온 어느 부부와 친구로 지냈으며, 이들이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다며 말을 꺼냈다. 그러나 최근 친구 부부는 다시 마리우폴로 돌아가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스비틀라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다. 친구 부부는 마리우폴 내 자신들이 살던 아파트가 이미 파괴됐음에도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다"면서 "친구 부부는 마리우폴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이들의 딸은 SNS에 친러시아 게시물을 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23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점령지 거주민이라면 2024년 12월 31일까지 반드시 러시아 여권을 신청해야 한다는 법령에 서명했다. 이를 따르지 않는 우크라이나 국민은 외국인으로 간주돼 따로 거주 허가증을 발급받거나 추방될 수 있다.
러시아 내무부는 지난 2년 동안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여권 약 340만 개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발급됐다고 밝혔다.
점령지에서는 재산 소유권 증명뿐만 아니라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연금을 수령하거나, 기타 기본 서비스를 누리기 위해서도 러시아 여권이 필요하다.
아울러 러시아 시민권 취득은 우크라이나 남성이 러시아 군에 징집돼 우크라이나에 맞서 싸우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공항 내 '여과' 과정
점령지로 돌아가고자 하는 우크라이나 국민은 우선 제3국을 거쳐 러시아로 이동한 뒤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여과'라고도 불리는 보안 검색을 받아야 한다
우크라이나 동부 세베로도네츠크 출신인 할리나(가명)는 "러시아에 갈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결정하기 위한 과정이다. 어떤 사람들은 며칠,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여과 과정에 발이 묶인다"고 설명했다.
할리나는 셰레메티예보 공항을 거쳐 다시 세베로도네츠크로 돌아온 지인 몇 명을 알고 있다. 이곳은 과거 전투로 무척 파괴됐으며, 현재 러시아가 점령한 지역이다.
"(여과)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특별 군사 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가리키는 러시아의 용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점령지를 소유한 국가는 어디인지 묻는다"는 할리나는 "사람들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수화물을 감시한다. 많은 이들이 이 과정에서 거절당해 러시아로의 입국을 허가받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할리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메신저 애플리케이션 '바이버'를 보여줬다. 약 1만 명이 참여하는 한 대화방에서는 점령지로 돌아가는 방법과 관련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귀향에 따르는 위험
정치가이자 법률학자로 재산을 되찾고자 귀향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거치는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파블로 리시안스키는 많은 이들이 러시아 영토로의 입국을 거부당하고 있으며, 일부는 아예 입국 금지를 당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당국은 현재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지역 주민들의 재산을 적극적으로 몰수하고 있다"는 리시안스키는 "이들은 역사적 기억을 지닌 이들이 그 땅에 돌아오길 원치 않는다. 대신 다양한 민족 출신의 러시아 국민들이 점령지에 들어와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러시아 당국은 우크라이나 내 자신들이 점령 중인 도시와 마을에서 일할 의사, 교사, 경찰, 건설 노동자, 보안 요원을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모집하고 있다. 그리고 보통 러시아에서 받을 수 있는 월급보다 몇 배나 더 높은 수준을 제시하곤 한다.
한편 인권 운동가들과 국제 기구는 점령지 내 우크라이나 주민들에 대한 박해 및 이들의 민족 정체성 말살 위험도 우려하고 있다.
올해 초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불법 체포와 고문 등 우크라이나 민간인 인권 유린 사례를 나열하는 보고서를 발표하며 이는 러시아가 계획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UN과 OSCE 대표들은 이러한 행위가 전쟁 범죄뿐만 아니라 반인도적 범죄에도 해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당국은 민간인을 표적으로 삼은 바 없으며, 국제기구들이 제기한 이 모든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해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언론인 안드리 데크티아렌코는 우크라이나 당국이 국내실향민들이 처한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데크티아렌코는 "실향민에 대한 지원이 효과적이지 않으며, 월별로 이들에게 나눠주던 보조금도 취소됐다. 이들이 살 곳도 마땅치 않다"면서 "현재 우크라이나 국내실향민들이 처한 생존의 현실"이라고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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