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수영은 재미있었다. 비록 25m 레인을 가면서 두세 번씩 멈출 만큼 저질 체력에 자세가 엉망이어도 물속은 일상이 이뤄지는 지상과 다른 공간이라는 점이 좋았다. 복부를 은근하게 누르는 수압, 김 서린 수경 렌즈 틈으로 보이는 뿌연 풍경, 웅성거리는 소음을 뚫고 삐익 울리는 강사님의 휘파람 소리와 함께 50분을 헐떡이다 물 밖으로 나오면 새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첫 번째 위기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왔다. 월수금 초급반 A의 ‘줄 세우는 할머니’로부터였다. ‘줄 세우는 할머니’란 진도가 들쑥날쑥한 초급반 회원 중 누가 먼저 출발하고 누가 마지막에 출발할지 결정하는 역할로, 공식 직함은 아니지만 지난 몇 달 간 내가 경험한 초급반에는 꼭 한 명씩 존재했다. 누군가 결석이라도 하면 “어젠 왜 안 왔어?”라며 사유를 확인하는 것도 이들이 자발적으로 담당하는 역할이다. 그런데 추석 연휴 닷새 전, 수업 전에 모인 회원들을 향해 ‘할머니’가 말했다. “추석이라 선생님 떡값을 드릴 거니까잉, 낼 사람은 여기 옆반 금목걸이 언니한테 주면 돼야.”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수영장 소음 때문에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했지만, 두려웠다. 만약 한 명씩 붙잡고 떡값을 내라면 어쩌지? 그깟 만 원 정도 그냥 내고 말까? 하지만 잘못된 관행인데? 그렇다고 연세 드신 분에게 정색하긴 좀 그렇지 않나? 야, 이런 것 하나 거절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부조리한 시스템을 바꾸겠다고! 연휴 사흘 전, 탈의실에 갔더니 중급반 언니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는 안 낸대?” “낼 거면 진작 냈겠지.” “말할 때 다 듣고 있었잖아.” “내가 이따 놀이터에서 만날 거니까 다시 물어볼게!”
그날 이후 나는 탈의실에서 할머니들의 대화에 종종 귀를 기울인다. 물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쩌렁쩌렁하다. 할머니들은 누가 손주를 돌보느라 바쁜지, 어디서 안검하수 수술을 하면 좋은지 같은 정보를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이들이 모두 열성적인 수영인은 아니다. 화목 초급반 A의 한 할머니는 매번 수업이 끝나기 5분 전에 샤워실로 간다. 쾌적한 환경에서 씻는 게 수영을 5분 더 하는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양쪽 무릎에 커다란 수술 자국이 있는 할머니는 자유수영 레인에서 느리게 걸어 다닐 뿐 수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신 “여길 나와야 씻기라도 한다”며 목욕탕처럼 수영장을 이용한다. 전에는 사우나 한 달권을 끊어 다녔는데 수영장이 더 “싸고 운동도 ‘쬐금’ 돼서” 옮겼다는 할머니 덕분에 ‘미래의 내’가 씻게 만들 방법을 찾았다. 어제는 물줄기 너머로 선문답 같은 할머니들의 대화를 들었다.
할머니 1: 그려, 어디 아픈 것만 아니면 상관없지. 아픈 것만 아니면 돼. / 할머니 2: 아이구, 아프면 또 어뗘. 아퍼야 죽지. /할머니 1: 어엉?/ 할머니 2: 아퍼야 죽지, 안 아프면 죽지도 못혀.
할머니들: 맞네, 깔깔깔깔깔.
이제는 겁날 게 없어 뭐든 농담으로 돌리는 할머니들의 기세에 덩달아 즐거워져 샴푸 거품을 씻어내는 척하며 몰래 웃었다. 요즘 내 꿈은 수영하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
주로 여성과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쓴다.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을 펴냈고, 뉴스레터 ‘없는 생활’을 발행한다. 늘 행복하지 않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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