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트럼프의 세상에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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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콰이어 2024-12-16 00:00:04 신고

3줄요약
지난 3월 9일, 조지아주의 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다. 인구 3만 8000명의 롬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조지아 북서부의 중심 도시다.

지난 3월 9일, 조지아주의 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다. 인구 3만 8000명의 롬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조지아 북서부의 중심 도시다.


IDEOLOGY


writer. KIM SUBIN

트럼프에게도 ‘사상’이 있다?

트럼프의 ‘사상’이라니 ‘설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어떻게든 그 실체를 규명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2기는 1기보다 훨씬 ‘트럼프답게’ 운영될 것이기 때문이다. 공화당의 아웃사이더로 시작해 이변을 일으키며 2017년 미합중국 45대 대통령에 당선됐을 당시의 트럼프에게는 행정부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만한 인력 풀이 없었다. 덕분에 ‘매드독’과 ‘워리어 몽크’라는 상반된 성격의 별명을 갖고 있던 해병대 4성 장군 제임스 매티스나 엑손모빌 CEO를 지내면서 중동과 러시아에 강력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던 렉스 틸러슨, 걸프전 기갑전의 영웅 H.R. 맥마스터 같은 실력과 인맥이 있는 기존의 인물들이 트럼프 1기 행정부에 어느 정도의 질서와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바이든 행정부 4년 동안 트럼프는 공화당을 완전히 접수하는 데 성공했고, 그의 지지 세력들 역시 각종 싱크탱크들을 통해 인력과 아이디어를 결집시켰다. 이제 트럼프는 자신만의 굿을 벌일 준비가 되었다.
문제는 트럼프 본인의 발언을 통해서는 그의 사상을 규명하려는 어떤 시도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의 입장을 뒤집을 수 있는 (그리고 그래 왔던) 인물이고 (놀랍게도) 그럼에도 여전히 지지자들에게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다. 2016년에는 대기업들을 공격하며 노동자의 편에 서겠다는 주장으로 가끔 버니 샌더스와 헛갈리게 만드는 발언마저 일삼았던 트럼프가 2024년에는 실리콘밸리 대기업 권력의 핵심인 일론 머스크를 초대해 지지 선언을 시켰다. 트럼프가 지금껏 단 한 번도 입장을 바꾼 적이 없던 것은 ‘무역’이 거의 유일하다. 하지만 이것도 그저 상대 국가와의 무역수지만 놓고 봤을 때 미국이 ‘적자’가 나면 무조건 나쁜 무역이라는 식이다. 매우 단편적인 수준의 이해에 근거한 이 아이디어에 ‘사상’이라는 거창한 딱지를 붙이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에겐 사상의 ‘구름’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따라다닌다. 처음에는 그동안 미국에서 소외받은 러스트벨트의 ‘정념’ 같은 것으로만 여겨졌다. 트럼프의 러닝메이트 JD 밴스가 쓴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가 그리는 애팔래치아 지역의 풍경이 그렇다. 잃어버린 일자리,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가족 구조와 공동체, 축적된 분노와 좌절.
이 모든 것이 트럼프라는 인물을 기점으로 미국 정치의 전면에 폭발하듯 드러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에 비해 아직 덜 알려진 것은, 여기에는 단지 그런 정념 외에도 꽤나 포괄적인 체계를 가진 사상들이 숨어 있다는 것. 그동안 미국 정치사회의 언저리에서 웅숭그리고 있던 어두운 사상들이 트럼프를 아바타로 삼아 응집했고 이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미국을 변화시킬 준비를 마쳤다.

트럼프 주변을 배회하는 다섯 가지 사상

이 사상에 대한 전반적으로 합의된 이름(대안우파(alt-right)라는 정말 아무런 알맹이가 없는 이름을 제외하고는)은 아직 없다. 합의된 이름이 없다는 것은 아직까지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 않다는 의미도 된다. 다만 그간 이들 사상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던 명칭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그 전반적인 형상을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중 하나는 ‘신반동주의’(neo-reactionary)다. ‘보수’와 ‘반동’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이 사상이 전통 보수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다. 보수와 반동 모두 전통적인 가치를 중시하지만 보수는 현재 체제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반면, 반동은 현재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과거로의 완전한 회귀를 추구하는 편이다.
전통적인 보수주의와 신반동주의의 차이도 비슷하다. 기존 공화당류의 보수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유시장과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으며 때문에 진보주의자들과도 협상과 합의가 가능했다. 그러나 신반동주의는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자유시장도 민주주의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길 희망할까? 40세의 나이로 미국 부통령 당선인이 되었으며 역대 최고령 대통령이 될 트럼프에게 유고가 발생할 경우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될 JD 밴스는 현재까지의 행보로 따져보면 외교정책에서는 비개입주의, 경제 및 무역에서는 보호무역주의, 사회 통합에서는 반이민 정책을 주장하는 ‘고보수주의’(paleoconservative)에 가깝다. 이들이 그리는 미국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미국이다.
그보다 더 먼 과거, 또는 아예 미국에는 없었던 시대로의 반동을 원하는 이가 이 정부의 주변에 떠도는 구름에 속해 있다는 점은 주의할 만하다. 예를 들면 군주정을 희망하는 실리콘밸리의 블로거 커티스 야빈이다. 그는 사상가로서의 자격 조건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지만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실리콘밸리를 위시한 테크업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과시해온 바 있다. 이 새로운 사상의 핵심 인물이 ‘블로그 사상가’라는 사실은 그간 제도권에서 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파티에서 자신을 ‘인스타그램 모델’로 소개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분을 상상해보자.) 그러나 야빈의 사상은 생각보다 위험하고 생각보다 훨씬 영향력이 크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 실험이 실패했다고 단언하며 소수의 엘리트가 스타트업 CEO 같은 군주 아래 독재식으로 운영하는 정치체제가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은 무려 부통령 당선인 신분인 JD 밴스와 실리콘밸리 보수주의의 상징이자 페이스북과 페이팔의 창업자 피터 틸, 스티브 배넌이 모두 야빈과 친분이 있으며 영향을 받았다. 일론 머스크 또한 직접적인 친분은 없으나 과거 그의 필명 등을 언급한 적이 있다.
야빈에서 유래한 이 사상적 조류의 또 다른 이름은 ‘어둠의 계몽주의’(Dark Enlightment)다. 이성, 자유, 평등 그리고 인간의 진보를 믿었던 계몽주의가 틀렸음을 깨달은 ‘새로운 계몽주의’를 암시한다. 인터넷에서 (특히 미국판 일간 베스트로 표현되는 ‘인셀’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매트릭스의 ‘레드필’(red pill) 비유를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이 바로 야빈이다.
다소간의 편차는 있어도 이러한 공통점을 보이는 사상들에 대한 최근의 명칭은 ‘포스트-리버럴’(post-liberal)로 굳어져 가는 것 같다. ‘리버럴’이란 단어는 우리말로 옮기기가 까다로운 측면이 있는데 사상으로서는 ‘자유주의’를 의미하지만 통상 미국 영어에서는 ‘진보’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톨릭과 기독교 그리고 영성

이러한 사상에 대한 논의들은 주로 진보와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 권위주의와 엘리트주의 위주로 이뤄졌는데 그 밖에도 상대적으로 논의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들 못지않게 중요한 지점이 하나 있다. 바로 ‘영성’의 문제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인물들에게는 가톨릭 신앙을 중시한다는 의외의 공통점이 있다. JD 밴스는 특별히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라진 않았지만 본래 프로테스탄트 환경에서 성장했다가 2019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여기에는 밴스의 실리콘밸리 멘토였던 피터 틸과 르네 지라르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라르의 영향은 특히 흥미롭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한국에 도매급으로 묶여 수입된 프랑스 철학자들 중에서 지라르는 다수였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지라르는 가톨릭 기독교로 인해 원시사회가 폭력의 굴레에서 탈피할 수 있다며 이를 긍정한다. 지라르의 대표적인 이론인 ‘모방이론’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욕망의 사회적 측면에 집중한다. 그래서 한정된 동일한 자원을 놓고 모두가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원시사회는 그렇게 축적되는 폭력을 다스리기 위해 주기적으로 외부자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공동체의 희생양이 되어 기독교인들에게 폭력의 굴레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준다.
피터 틸은 지라르의 그리스도를 스스로의 방식으로 이해했다. 미국 엘리트의 산실 중 하나인 스탠퍼드 로스쿨을 거치면서 그는 극도로 경쟁적인 엘리트 사회가 실은 특별한 목적 없이, 지라르의 이론처럼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며 경쟁하는 사회라는 걸 깨달았다. 이어 그는 너무나도 뛰어난 능력으로 대기업을 이뤄냈지만, 사회 속에서 공격받고 핍박당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지라르가 주창한 ‘공동체 내에서 희생된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투영해내기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의미 없는 경쟁의 각축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장을 찾아내야 한다는 틸의 주장(이것이 틸의 저서 〈제로 투 원〉의 핵심 주장이다)은 자못 그리스도적이다.
하지만 트럼프를 둘러싼 사상의 구름을 형성하는 인물들 중 가장 위험한 인물은 단연 트럼프 1기에서 백악관 수석전략가를 지냈던 스티브 배넌이다. 배넌은 세상이 어떠한 지점을 향해 진보한다는 계몽주의적 역사관을 거부하고 보다 전통주의적인 순환적 역사관을 갖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역사가 금, 은, 동, 철의 시대를 거치며 점차 퇴락한다고 본다. 지금의 시대는 철의 암흑시대이고 지금의 세계가 무너지면 다시 금의 시대가 돌아온다는 것인데, 배넌은 이런 역사관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지금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믿는다. 무슨 만화영화의 악당같이 들리겠지만 배넌은 정말 진지하다. 그래서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배넌이 추진했던 것 중 하나는 연방정부의 공직들을 최대한 공석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커티스 야빈도 정부 내 뿌리 깊은 좌파 조직을 일소하겠다거나 자유지상주의적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데 그치지만, 배넌은 그야말로 미합중국을 흔들고 역사의 바퀴를 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배넌은 세계 역사가 결국 종교와 영성으로 귀결되는 문명 간의 투쟁이라고 본다. 그 때문에 이슬람뿐만 아니라 중국 문명과의 일전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런 배넌에게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는 서구의 유대-기독교 문명을 기반으로 한 거대 블록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1년 만에 백악관에서 쫓겨난 이후 배넌은 한동안 유럽의 신우파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유럽 각지의 신우파 양성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백악관에서 쫓겨난 이후 배넌과 트럼프는 공식적인 인연을 더는 맺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배넌은 팟캐스트를 통해 계속 트럼프 지지 세력을 결집시켜 왔으며(2021년 1월 6일의 의사당 난동을 부추긴 것도 배넌이었다) 비공식적으로 트럼프 캠프와 계속 교류가 있다는 언론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그가 다시 공직을 맡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트럼프 행정부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제 우리가 보게 될 미국의 모습

이렇게 트럼프를 위시한 각종 사상들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있지만 공통점도 적지 않다. 특히 종교적 가치관을 생각했을 때, 몇몇 핵심 이슈에 대해서는 예측이 어렵지 않다. LGBTQ+ 문제나 이민 문제가 그렇다. 성별의 정의를 출생 당시의 성별로 축소시킬 것이며 미성년자의 성전환 치료 금지도 추진할 것이다. 미국의 경우 불법이민자의 경우에도 미국 영토에서 태어난 아기에게는 시민권을 부여하도록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데 이를 제지하려는 움직임도 다시 힘을 얻을 것이다. 낙태 문제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전통적인 미국 정치의 원칙은 정부의 각 부분들이 서로를 견제하여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빈 등의 사상가들은 군주제에 가까운 권한을 지도자에게 부여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미 대선 기간 중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이 공개한 ‘프로젝트 2025’는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을 주장하는 ‘단일 행정부 이론’을 제시한다. 이 프로젝트 2025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이른바 ‘스케줄 F’인데 이는 한국식으로 설명하자면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수천 명의 연방 공무원들을 모두 ‘정무직’으로 분류해 대통령이 직접 해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사상이라는 구름의 디테일로 들어가면 물론 트럼프가 아닌 트럼프를 둘러싼 사상들끼리는 충돌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이 충돌 지점들은 앞으로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대한 중요한 관찰 포인트가 될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전통’과 ‘자유’의 충돌이다. 밴스나 배넌 같은 인물들은 보다 전통적이었던 시절로 돌아가는 걸 추구한다. 제조업과 노동계급에 대한 이들의 향수는 여기서 연원한다. 트럼프 본인도 2016년 대선 캠페인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즐겨 했다.
문제는 이러한 ‘블루칼라를 위한 아메리카’라는 비전이 2024년 대선 캠페인에 적극 협력한 일론 머스크 같은 인사들과 결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빅테크는 밴스가 혐오하는 기업 중 하나다. 일례로 바이든 행정부에서 기용한 인사 중 밴스가 유일하게 칭찬한 인사가 하나 있는데 바로 강력한 반독점 이론가인 리나 칸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이다. ‘전통’으로 돌아가면서 기업의 ‘자유’를 지키는 건 불가능하다. 머지않아 우리는 백악관에서 머스크를 위시한 자유기업가들과 밴스와 배넌의 전통주의자들 간에 벌이는 내전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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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 the writer?
김수빈은 온라인 매거진 PADO 에디터와 국경없는기자회(RSF) 한국 통신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국제뉴스 브리핑 서비스 masthead.kr을 운영한다.



DIPLOMACY


writer. PARK SANGHYUN

조직 위에 선 개인, 트럼프

리더는 개인의 자존심이나 이익보다 자기가 이끄는 조직, 혹은 국가의 이익과 생존을 앞세우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많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어떤 리더인가? 일단 그 얘기를 해보자. 이번 대선에서 벌어진 큰 사건 중 하나는 ‘〈워싱턴 포스트〉 게이트’였다. 〈워싱턴 포스트〉가 미국의 대선을 코앞에 두고 36년 만에 특정 대선 후보 지지를 선언하지 않겠다고 밝혔던 것이다. 1860년 〈시카고 트리뷴〉이 에이브러햄 링컨의 지지를 선언한 이후, 미국의 매체들이 선거를 앞두고 특정 후보의 지지를 사설 형태로 공연하게 발표하는 일은 하나의 관행이었다. 그런데 지난 대선 때는 조 바이든을, 그전에는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던 〈워싱턴 포스트〉가 지지를 선언하지 않겠다는 건 사실상 ‘우리 사장님이 해리스 지지는 하지 말래요’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워터게이트를 첫 보도한 ‘더 포스트’의 사장님이 누구냐면 제프 베이조스다. 큰 비판이 일었고, 분노한 독자 수십만 명이 〈워싱턴 포스트〉의 구독을 끊었다. 그런데 우리가 2013년에 그 신문사를 인수한 아마존의 사주 제프 베이조스를 탓할 수 있을까? 그는 신문사 사주로서는 아주 잘못된 결정을 내렸지만,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과 우주 탐사기업 블루오리진의 경영인으로서는 상식적인 판단을 했다.
생각해보라. 베이조스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내내 고생했다. 사주가 신문사의 논조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트럼프는 〈워싱턴 포스트〉가 자기를 공격하는 것을 베이조스의 공격으로 이해했고, 베이조스의 사업은 트럼프 정부의 방해에 직면해야 했다.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한 베이조스는 트럼프에게 굴복해 〈워싱턴 포스트〉의 명성과 사업을 망가뜨려서라도 기업 전체를 살리겠다고 결정했다. 2억 명의 프라임 멤버를 거느린 아마존과 미국 정부의 이해관계는 웬만한 나라보다 크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런 베이조스의 행동을 보면 트럼프 2기를 맞이하는 전 세계 리더들이 어떤 자세를 취할지 짐작할 수 있다.
트럼프의 가치관은 〈워싱턴 포스트〉와 사주 베이조스의 관계를 보는 시각에 요약되어 있다. 그는 개인의 이해를 넘어선 기관(institution, 제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그런 게 존재한다고 믿지도 않는다. 트럼프를 오래 취재해온 기자들은 트럼프의 회사(The Trump Organization)는 외형적으로는 아주 커 보여도 사실은 소수의 사람들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가족 기업이라고 설명한다. 개인을 넘어선 시스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결정은 자기가 직접 내려야 하고, 그 결정의 기준은? 조직이 아닌 트럼프 개인의 이익이다.

트럼프 시대의 세계

이를 확장하면 트럼프가 미국과 세계를 보는 시각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경제협정 등의 가치를 무시하는 이유는 국제 협력은 기본적으로 시스템적 작동 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판단을 자기가 내려야 하는 그에게 시스템은 자기에게서 결정권을 뺏는 경쟁자이고, 제약이다. 이런 트럼프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국가와 외교관들은 트럼프와 잘 지낼 수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는 앞으로 4년 내내 사사건건 부딪히게 된다.
그럼 각 국가와 리더들은 어떤 방법으로 트럼프의 세상에서 국익을 챙길 수 있을까? 트럼프 정권 때 호주의 총리를 지낸 맬컴 턴불은 한 인터뷰에서 트럼프에 대한 착각이 두 가지가 있다며, "대통령이 되면 선거운동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와 그의 비위만 잘 맞추면 된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트럼프 1기를 거치며 사람들이 그에 대해 알게 된 한 가지가 있다면, 그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거래(transaction)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에게 확실한 이익이 보장될 때 비로소 움직인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그게 미국을 당연한 시혜자로 보는 세계의 버릇을 고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환영하지만, 그가 말하는 ‘미국의 이익’의 껍질을 벗기면 자기와 가족의 이익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를 잘 파악한 나라 중 하나가 사우디아라비아다. 미국의 진보 세력이 자기 정권에 비판적임을 잘 아는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2022년 트럼프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가 운영하는 사모펀드에 우리 돈으로 2조5000억원을 투자했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도 트럼프의 이런 작동 방식을 잘 알고 있다. 트럼프는 2019년, 젤렌스키에게 조 바이든의 아들 헌터 바이든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헌터가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기업에서 이사로 이름을 올려놓고 정치적 압력을 행사했다고 믿었던 트럼프는 이를 통해 자신의 재선에 방해가 될 조 바이든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트럼프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가 대가를 호되게 치른 젤렌스키는 당선이 분명해지자 트럼프에게 재빨리 축하 전화를 했다. 그 전에, 이미 지난 9월 트럼프를 예방한 자리에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방위산업체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트럼프에게 가장 먼저 축하 인사를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다. 트럼프는 이스라엘이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을 인정해주며 가깝게 지냈음에도 네타냐후 총리가 2020년 선거 직후 바이든에게 축하인사를 해서 승리를 인정했다는 사실(트럼프는 지금도 그 선거에서 자기가 이겼다고 주장한다)에 분노했다. 이란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분쟁 중이고 국내에서 입지가 불안한 네타냐후로서는 트럼프와의 관계 회복이 절실하다. 트럼프의 지지 여부에 따라 현재 이스라엘이 벌이는 전쟁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유럽과 나토의 미래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유럽은 트럼프의 재등장을 어떻게 생각할까? 우선 정치·경제 공동체인 EU가 두려워하는 것은 트럼프의 보호무역 정책이다. 선거운동 중에 대중국 관세 폭탄을 예고한 트럼프가 EU에 비슷한 압력을 넣을 것임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현재 EU에서는 트럼프의 요구 사항이 무엇이고, 어디까지 양보해야 할지를 고민 중이다.
미국과 유럽의 군사동맹인 나토의 걱정은 훨씬 더 크고 구체적이다. 트럼프는 1기 행정부 때 나토의 회원국들이 약속한 분담금, 각국의 국내총생산 대비 2%를 달성하지 않으면 미국은 나토에서 나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과적으로 현재 나토 국가들은 그 목표를 달성했지만, 그 공은 트럼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에게 있다. 트럼프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분담금 수준을 GDP의 3% 수준으로 올릴 것을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 측에서는 미국의 군사비 지출이 GDP의 3.5%이기 때문에 3%는 많은 게 아니라는 입장이다. 나토가 협상을 통해 3%는 피할 수 있다고 해도 2.5%까지 증액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다만, 현재 세계 정세에서 미국이 나토에서 정말로 탈퇴할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은 없다. 우크라이나의 상황도 심각하지만, 앞으로 중국의 대만 침공이 현실화될 경우 세계에서 미국을 도와 해외로 원정군을 보낼 수 있는 곳은 사실상 나토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정을 아는 나토와 트럼프의 협상이 관전 포인트가 된다.

가장 심각한 건 중국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중국 그리고 미국 내에서 중국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니다. 그냥 미중 관계에서 영향을 받는 우리 모두라고 해도 좋겠다. 유명한 신발 제조업체인 스티브 매든(Steve Madden)은 트럼프가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규모 관세를 우려해 생산 공장을 중국에서 캄보디아, 베트남, 멕시코 등으로 옮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트럼프는 1기 행정부 때 중국 수입품 일부에 25%의 관세를 부과하며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였는데, 이번에 백악관으로 돌아오면 중국에서 수입되는 모든 물건에 60% 이상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선거운동 때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는 착각”이라는 텀불 전 총리의 경고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는 선거운동 때 뱉은 터무니 없는 주장들을 밀어붙인다. 트럼프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이 그 증거다.
가뜩이나 경제가 침체된 중국으로서는 미국 수출이 줄어들 경우 심각한 위협이다. 따라서 이를 피하기 위해 미국과 협상을 하겠지만, 과거처럼 결국 무역전쟁으로 번질 경우도 대비 중이다. 관세를 크게 올릴 경우 미국 내 소비자들에게 피해가 될 것이고, 이는 미국 정부에도 부담이라는 것을 잘 아는 중국은 트럼프를 미국 내 정치적으로 가장 아프게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두고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대만 문제에 대한 계산은 더 복잡하다. 트럼프는 미국이 외국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에 반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다. 트럼프는 본인이 예측 불가능(‘fucking crazy’)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아는 시진핑이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이 ‘아주 미친 사람’이라는 사실이 중국을 누르기 충분한지는 알 수 없다. 바이든은 “(시진핑이)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트럼프의 모호한 메시지와는 달랐다. 그런 모호성 속에서 중국이 잘못 판단해 대만을 침공하는 사태가 일어날 여지를 추호도 주지 않기 위해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미국이 개입한다”며 여러 차례 공적인 채널을 통해 확실한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한 바 있다. 결정적으로 중국은 트럼프와 가깝게 지내는 일부 국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국가의 체면과 자존심을 중시하는 중국이 일부 정상들처럼 트럼프에 아부할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비록 현재 중국이 독재체제라고 해도 중국 정부는 엄격한 관료체제에 기반해 작동한다. 트럼프가 좋아하는 즉흥적 결정이나 거래에 가까운 정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시스템의 정치’다. 이게 시진핑이 푸틴과 달리 트럼프와 가까워지기 힘든 이유다.
트럼프는 세상의 모든 권력자가 결국은 자기처럼 개인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거래하는 사람들이지만, 그저 겉으로 (민주주의) 제도의 가치를 믿는 척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트럼프가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우디의 투자를 받은 트럼프의 사위와 액수는 다르지만, 헌터 바이든 역시 아버지가 부통령이던 시절 우크라이나 에너지 기업의 명목상 이사로 좋은 연봉을 받았다. 그래도 우리는 다음 정치인은 지금보다 깨끗하고, 오는 세상이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이 되기 위해 선거를 통해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78세의 트럼프가 자기가 살아온 방식대로 세상을 재구성하려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 〈워싱턴 포스트〉의 방향에 관여하지 않던 베이조스가 트럼프의 집권이 두려워 사주로서의 힘을 발휘해 논설실을 굴복시키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걸 본 트럼프가 ‘세상은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라며 흐뭇해하는 모습도. 그게 바로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의 모습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앞으로 4년 동안 그렇게 작동하는 세계관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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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 the writer?
박상현은 〈오터레터〉의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에 테크와 미디어, 문화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THE PENINSULA


writer. CHOI JUNYOUNG

한미 관계라는 난제

자, 한국과 북한, 태평양 너머에 있는 이 작은 반도는 미국에게 어떤 의미일까? 미국 대통령에게 한반도 문제는 가장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난제, 풀리지 않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아닐까? 그간의 상황을 살펴보자. 미국은 1950년대 이후의 현대사를 거치면서 한반도를 냉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장으로 인식해왔다. 미국은 한국과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국을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으며, 대규모 미군의 주둔과 정기적인 합동훈련 등을 통해 방위공약을 이행해왔다. 1990년대 초반 냉전이 붕괴하면서 한반도에도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곧이어 북한이 핵 개발을 시작하면서 미국과 북한의 관계는 경색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대화를 통한 비핵화 시도가 이어졌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북한은 핵무기 개발은 물론 미국 본토까지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성공시키면서 동북아는 물론 미국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로 부상했다.
북한과의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걸으면서 그 안에서 수많은 의견들이 부딪히고 있다. 일례로 2만8000명에 이르는 주한미군이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기 위한 단일 목적으로 주둔 중이다. 미국 내에서는 여기에 미국이 쏟아붓는 돈에 대한 여러 문제 제기가 이어졌으며, 이후 유연한 병력 배치와 이동을 원하는 미국과 한국 간의 갈등이 촉발되기도 했다. 한국의 경제성장에 따른 일방적인 보호관계 탈피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과 방위비 분담이 진행되면서 양국의 관계는 과거에 비해 보다 대등한 관계로 전환되었다. 주한미군의 방위비 전체 총액은 공개된 바가 없지만, 대략 현재는 한국이 40% 정도를 분담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중국과 미국의 손 중 하나를 좀 더 적극적으로 들어줄 것을 요구해오며, 중국과의 관계 경색을 두려워하는 한국의 미지근한 태도에 늘 아쉬움을 털어놨다. 한편,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핵심 영역으로 여기는 첨단제조업 분야에서 미국을 지원할 수 있는 역량을 한국은 가지고 있다. 미국이 한국 기업들의 자국 투자를 원하는 이유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은 미국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미국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고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불만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런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동맹이자 혈맹 관계이지만, 상호 역할에 대해 늘 아쉬움과 의구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관계다. “우린 대체 어떤 관계야?”라는 질문을 던지기에 매우 적절한 관계라는 뜻이다.

트럼프라는 변수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복귀는 양국 안보 관계에 긍정이든 부정이든 큰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그가 누군가. 그는 북한의 지도자를 협상 테이블에 앉아 대면한 최초이자 유일한 미국의 대통령이다. 2018년 싱가포르 회담, 2019년 베트남 하노이 회담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이 순간들이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는 2017년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핵무기를 둘러싼 양측 간의 거친 발언이 오가던 일촉즉발의 위기 국면이었다. 그러나 직후에 이어진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으로 긴장은 한순간에 완화되었으며, 한반도 평화 정착에 대한 기대가 하늘로 치솟았었다.
하지만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통해 핵 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겠다는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의 핵 보유를 절대 기정사실화할 수 없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 대립하면서 회담은 ‘노 딜(No Deal)’로 막을 내렸다. 2019년 6월 비무장지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의 짧은 3자 대면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하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모두 최고 지도자 간의 담판을 통해 한반도 상황의 근본적인 변화를 도모하고자 했지만 핵을 둘러싼 양측의 근본적인 입장 차이는 대화로 좁히기에는 너무 컸던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에 이어 46대 대통령에 취임한 바이든 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에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세심하게 조율된 실용적 접근’이라는 대북 기조를 이어갔지만 성과는 없었다. 중국과의 대결에 초점을 맞춘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전쟁 등이 이어지면서 북한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북한으로서도 바이든 대통령과의 협상은 내켜 하지 않았다. 동맹국의 입장을 중시하고,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강조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외교 노선은 북한의 입장에선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변수

트럼프가 컴백하자 한국과 주변국의 모든 관심이 미국과 북한의 대화 재개에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큰 변화는 없을 가능성이 높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양측의 입장이 지난 6년 동안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일단 연임제의 두번째 임기인 트럼프 대통령에겐 4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해결해야 할 과제가 너무 많다. 독점 규제를 둘러싼 이해관계, 로켓처럼 치솟는 미국 대도시의 범죄율, 마약 중독자와 홈리스 이슈, 공교육의 처참한 실패, 그의 입장에선 손봐야 할 게 너무 많은 이민정책 등 산적한 미국내 안건들을 생각해보면, 대외정책보다는 내부 과제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 대외적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있다고 해도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전쟁 종식에 우선권이 주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북한으로서도 러시아와 협력 강화를 통해 대규모 에너지 및 식량 지원은 물론 각종 군사기술 협력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핵무기를 포함한 무엇인가를 미국에 양보하고 제재 해제 등을 얻어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북한과 미국의 대화를 중재할 수 있는 국가가 없는 것도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와는 달리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북한과의 대결 구도를 명확히 하고 있으며, 어떠한 협상도 진행하지 않고 있다. 북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던 중국 역시 자국의 경제난 때문에 북한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특히 북·러 관계가 개선되면서 중국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입장 변화가 북·미 회담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북한은 최근 헌법개정 등을 통한 핵 보유국 법제화,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 화성-19형 대륙간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을 이어가면서 핵 능력 고도화와 더불어 핵 보유국 지위의 기정사실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런 북한을 상대로 비핵화 논의를 진행한다는 것이 의미 없음을 미국도 잘 알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현실적으로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고 현 상태에서의 핵 동결, 대륙간 탄도미사일 폐기 등의 군축(disarmament)이 협상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최선이지만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으로서는 이러한 결과에 만족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북한과의 협상과 회담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한국의 방향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불확실한 북한과의 회담 대신 한국을 압박하여 대규모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의 가시적 성과를 얻어내는 것이 훨씬 쉽고 빠르다는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대통령 선거 직전인 지난 11월 4일 한·미 양국은 2030년까지 유효한 방위비분담금협정에 서명을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인정할지는 미지수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잘사는 한국을 왜 미국이 지켜줘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미국의 도움을 받고 싶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라는 입장이다. 이와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은 한국에 대해서만 강경한 것이 아니라 모든 동맹국에 대해 일관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과거 재임 시에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에 대해 국방비 지출을 최소 GDP 2%선까지 늘리도록 압박을 가한 바 있다. 당시 트럼프의 주장을 무시하던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뒤늦게 국방비 증액에 나섰고, 결국 2% 이상의 비율을 맞췄다. 트럼프는 이를 보면서 자신의 예상과 판단이 맞았다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트럼프 행정부와 방위비 분담금 금액을 둘러싼 협의 대신 좀 더 큰 틀에서 미국과의 동맹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다. 중국을 주적으로 설정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중국을 압박하고자 하는 미국의 가장 큰 고민은 점점 약화되고 있는 미 해군이다. 압도적인 조선 능력을 갖춘 중국이 대규모 해군 현대화와 전력 증강에 나서고 있지만 미군은 냉전시기 건조한 군함들을 유지하기에도 벅찬 것이 현실이다. 미국은 한국 조선업체들이 미국 조선산업에 투자해줄 것을 원하고 있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실제 생산은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우리가 미 해군이 필요로 하는 군수보급함 등 각종 지원함을 제공하는 것으로 방위비 분담금을 대체하겠다고 제안한다면, 미국은 의외로 긍정적 태도로 협의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 말대로 부자 나라가 된 한국이 그에 부합하는 지원 태도를 보이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관심은 더 이상 한반도에 머무르지 않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으로서는 동남아와 인도양의 많은 국가를 일일이 다독이면서 중국과의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자체적으로 동남아 국가들과 적절한 군사협력과 무기 지원 등을 수행한다면 미국으로서는 부담을 덜고 중국과의 대결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주한미군에 대해서도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해주고 대신 그 대가로 핵무기 보유 등에 대한 인정 내지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당장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더라도 미국이 이를 인정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전략적 카드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과의 협력을 강화해 미국에 대해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하다. 미·중 대결 구도의 강화 속에 우리의 독자적인 판단과 행동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협력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관심은 더 이상 한반도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넓은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우리 역시 한반도에 국한된 좁은 시야에서 탈피하여 더 넓은 시야로 미국을 이해하고, 더 적극적인 역할 수행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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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 the writer?
최준영은 서울대학교에서 환경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국회입법조사처와 문화체육관광부를 거치면서 입법 및 행정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왔다. 현재는 법무법인 율촌의 전문위원으로 다양한 분야의 법률 및 정책분석과 입법지원활동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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