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노벨상이 역으로 한림원 위상 높여…유럽 지식인도 한국문화 인정"
"이주민은 우리 사회 풍부하게 해주는 사람들…배척 슬프다"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어떤 민주주의 사회가 두 시간 안에 그런 사고를 수정할 수 있는 자생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비상계엄이 슬픈 사태이기는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가 강인하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이야기했어요."
독일 베를린자유대 한국학연구소장인 이은정(61) 교수는 12·3 비상계엄 사태가 벌어진 후 '한국은 고장 난 민주주의 사회냐'는 독일 미디어의 질문에 이같이 답변했다고 밝혔다.
최근 서울대 역사학부의 초청으로 방한한 이 교수는 독일 언론인이나 학자들로부터 비상계엄 사태에 관해 수많은 질문을 받거나 화상회의 시스템으로 토론·회의를 거듭하고 있다.
12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만난 이 교수는 비상계엄 후 이어지는 시위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이 "다른 나라가 한 번도 안 가본 길을 가는 것"이라며 이는 정치학이나 민주주의 교과서를 새로 쓰는 것과 같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른 곳에서는 없었던 일이거든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세계에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는 한국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일은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가 득세하면 향후 유럽이나 남미와 같은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면서 한국의 대응을 국제 사회가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잘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독일 미디어는 '한국과 같은 사건이 독일에서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는데 우리 시민 사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이 교수는 전했다.
그는 올해 노벨문학상이 발표된 때가 "내가 독일에서 교수를 하면서 가장 많은 축하 인사를 받았던 날"이었다고 회고했다.
2008년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의 첫 번째 정교수로 부임해 '한국 알리기'에 애써온 이 교수로서는 한강의 노벨문학상이 매우 특별한 선물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오스카상 받았을 때도 축하 인사를 받기는 했는데 이번에는 격이 달라요. 한국 문화가 이제 유럽의 지식인들이 인정하는 문화가 된 거예요."
K팝의 인기에 대해 유럽 지식인들이 '젊은 아이들 문화'라고 여기는 경향도 있었는데, 영화가 한국 콘텐츠를 더 새롭게 인식하는 창구가 됐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면서 한국 문화의 위상 자체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한강은 젊고, 비서구 출신이며, 여성이라는 점에서 노벨문학상에서는 소수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교수 역시 독일에서 어리고, 여성이며, 외국인이라는 불리한 조건과 싸웠다. 그는 2016년 비서구 출신 최초로 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베를린-브란덴부르크 학술원(옛 프러시아왕립학술원)의 정회원이 되는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
이 교수는 한강을 수상자로 결정한 것이 역으로 한림원을 빛내는 측면도 있다고 풀이했다.
"제가 젊은 외국인 여성이라는 게 악조건이었는데 학술원이 저를 정회원으로 뽑고 나서 '우리가 이렇게 국제적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죠. 한강을 수상자로 결정함으로써 한림원의 위상이 더 높아진 셈이죠."
이 교수는 최근 출간한 '베를린의 한국학 선생님'(사계절)에서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간 제자들로부터 '한국 학생들이 단지 좋은 성적을 받는 데 방해될 수 있다는 이유로 유학생을 스터디 그룹에 넣어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다른 문화권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은 소중한 경험인데 학생들이 좋은 점수를 위해 그런 기회를 포기하는 것을 보고서 "젊은 학생들이 조금의 불확실성도 수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안타까움을 표명했다.
"젊은 사람들이 도전 정신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요. 어렸을 때부터 사교육 체제에서, 짜인 틀에서 안정적으로만 키운 결과가 대학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아 굉장히 씁쓸했어요."
이 교수는 "삶 전체를 생각한다면 어느 순간에는 도전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편한 방법만 선택한다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고 쉬운 길만 택하지 말라고 젊은이들을 향해 충고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엿보이는 이주민에 대한 혐오나 배타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 교수는 1960∼1970년대에 한국이 외화 획득을 위해 독일에 간호사와 광부를 파견한 역사를 거론하며 이제 한국도 이주민들에게 열린 자세를 지닐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밝혔다.
"우리나라 간호사와 광부들이 독일에서 잘 정착했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 수 있었죠. 지금 한국에 오는 이주민도 그런 성취를 누리고 싶어서 옵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밖으로 나가서 도움을 받았고 이제는 우리가 도움을 줘야 하는 상황인데 혐오하고 배척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슬픕니다."
그는 일각에서 '다문화 가정'이라는 표현에 '불쌍하고 도와줘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시각을 투영하는 것에 대해 "독일에서는 '멀티컬처'(multiculture·다문화)가 굉장히 힙한 개념이다. 이주민은 우리 사회를 오히려 풍부하게 해주는 사람들"이라고 발상의 전환을 당부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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