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올해 반도체 업계의 최대 화두는 단연 고대역폭메모리(HBM)다.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특히 HBM은 고성능 AI 및 데이터센터용 GPU를 뒷받침하는 핵심 부품으로 자리잡고 있다.
HBM이 글로벌 AI 시대를 맞아 기업 명운을 판가름할 중요한 척도로 떠오른 것이다. 현재 전 세계 HBM은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 미국의 마이크론이 공급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왼쪽)과 경기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전경. ⓒ 연합뉴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SK하이닉스의 전 세계 HBM 시장 점유율은 53%를 기록했다. 2위 삼성전자도 38%의 점유율을 확보하면서 SK하이닉스의 뒤를 바짝 추격 중이다. 사실상 K-반도체가 전 세계 HBM 공급망을 쥐고 있다 해도 무방한 수준이다.
◆K-반도체 '훨훨'에도 삼성전자 반도체 부진
올해 삼성전자는 주력 사업인 반도체 부문이 난항을 겪으면서 위기설이 불거졌다. 반도체 기술 경쟁력 우려와 더불어 지난 3분기 실적 부진으로 주가가 휘청이자 이례적으로 경영진 명의의 사과문도 냈다. 앞서 지난 5월에는 '반도체 쇄신'을 목표로 수장을 전격 교체하는 강수를 뒀다.
삼성은 올해 업황이 개선되며 실적 회복세를 보였으나 시장의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냈다. 올해 1분기 삼성전자 디바이스 솔루션(DS) 부문의 영업이익은 1조9100억원을 기록했다. 전분기 2조1800억원 적자에 비하면 약 4조원가량 실적을 개선했지만, 예년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이어 2분기에는 전년 동기(6조9300억원)와 비슷한 수준의 영업이익(6조4500억원)을 기록하며 완전히 회복세로 돌아선 듯 보였다. 하지만 3분기에 시장 기대치에 못 미치는 3조8600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다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최근 반도체 시장은 HBM과 같은 고부가 제품의 매출 비중이 커지고 있는데, 삼성전자의 경우 HBM에 대한 투자 적기를 놓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AI 붐에 수요가 견조한 HBM 시장에서 경쟁사 대비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 앞서 SK하이닉스는 5세대인 HBM3E 12단을 양산한다고 발표했지만, 삼성전자는 아직 엔비디아의 품질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삼성전자는 지난 3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전화회의)에서 "HBM3E의 주요 고객사(엔비디아) 품질 테스트 과정상 중요한 단계를 완료하는 유의미한 진전을 확보, 4분기 중 판매 확대가 가능할 전망"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엔비디아가 세계 AI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큰 손' 고객인 만큼 엔비디아에 납품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삼성전자가 AI 반도체 랠리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엔비디아에 HBM을 납품해야 하며, 엔비디아로서도 가격 협상력과 수급 등을 고려할 때 삼성전자의 HBM 공급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SK하이닉스, '만년 2등'서 '메모리 왕좌' 타이틀 유력
반면 SK하이닉스는 HBM 물량 대부분을 엔비디아에 공급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 선두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특히 올해 HBM 수요에 힘입어 역대 최대 이익을 달성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상황이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이 지난달 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SK AI 서밋 2024'에서 16단 HBM3E 제품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 SK하이닉스
실제로 SK하이닉스는 올 3분기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SK하이닉스의 3분기 영업이익은 7조300억원으로 3조8600억원에 그친 삼성전자를 가뿐히 제쳤다. 올 1~3분기 누적으로도 SK하이닉스(15조3845억원)는 삼성전자(12조2200억원)를 3조원 이상 앞질렀다.
HBM 시장은 최근 2년간 급성장했지만, 처음부터 주목받은 반도체는 아니다. SK하이닉스는 2013년 세계 최초로 HBM(1세대)을 개발했고, 2년 뒤 삼성전자가 2세대 HBM(HBM2)을 내놨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9년 SK하이닉스가 3세대 HBM(HBM2E) 개발에 성공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필요 이상으로 속도가 빠르고 용량이 크다 보니, 기술 개발 속도에 비해 시장이 따라오지 않았다. 201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비관론이 쏟아졌으나, 2022년 전작 대비 처리 속도가 78% 빨라진 4세대 HBM(HBM3) 양산이 시작되며 시장 판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SK하이닉스는 올 3월 HBM3E 8단을 엔비디아에 업계 최초로 납품하기 시작한 데 이어 11월 HBM3E 12단 제품을 세계 최초로 양산을 시작해 이번 분기 출하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후 내년 상반기 중 HBM3E 16단 제품을 공급하고, 6세대인 HBM4 12단 제품도 내년 하반기 중 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내년 'HBM4' 관건…삼성 차세대 D램 탑재 '승부수'
삼성과 SK하이닉스는 내년 하반기 상용화 예정인 차세대 HBM으로 꼽히는 HBM4 시장 선점을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HBM4의 경우 아직 개발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엔비디아를 필두로 한 주요 빅테크 기업들은 물론 전기차 기업인 테슬라까지 해당 제품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HBM4는 전작인 HBM3E에 비해 데이터센터와 슈퍼컴퓨터 등 방대한 데이터 처리가 가능하다. 6세대부터는 기존 제품들과 다른 공정 방식이 적용되는 만큼 삼성전자가 개발 및 공급을 선점할 경우 SK하이닉스와 함께 2강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삼성전자 화성캠퍼스 전경. ⓒ 삼성전자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반도체 위기 극복'이 최우선 과제가 된 만큼 HBM4에 사활을 건 분위기다. 최근 삼성전자는 평택 기지에 신규 라인 구축을 위한 장비 발주에 나섰는데, HBM4에 활용할 1c D램 제조설비로 파악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1c D램을 HBM 코어다이로 활용하고 베이스다이를 파운드리 로직 공정을 통해 양산한다는 구상이다. 경쟁사인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HBM4에서 이전 세대를 이용하는 만큼 d1c의 성공적 양산으로 HBM4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단 계획이다.
이를 위해 기흥과 화성에 흩어져 있던 기술 연구직 인력도 평택으로 속속 집결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술직들이 생산기지 옆에 위치해야 공정관리를 할 수 있다"는 전영현 부회장의 특명에 따른 이동이다.
반면 SK하이닉스는 내년 하반기께 12단 HBM4 양산을 목표로 하고, 코어 다이로 1b D램을 적용할 예정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8월 1c 공정 기반의 16Gb DDR5 D램을 개발했지만, 당장 HBM4에는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본격적인 1c D램 적용은 7세대 HBM4E부터다. 무리하게 성능 고도화에 나서기 보다 안정적인 공급을 택하는 게 낫다는 판단으로 분석된다.
이처럼 HBM4 성공에 양사의 초점이 맞춰진 건 이전 세대 HBM과 범용 D램의 단가 하락이 가팔라지는 상황에서 메모리 수익성을 끌어올릴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중국 메모리 업체들의 저가 공세가 범용 D램의 공급 과잉을 부추기면서 D램 가격이 넉달 만에 35.7%나 떨어지는 등 가격 하락세가 심화하고 있다.
◆트럼프 2기 출범 앞두고 '비상계엄' 폭탄…글로벌 불확실성 고조
다만 최근 계엄 사태로 인해 국내 반도체 산업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은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최근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TSMC의 창업자 모리스 창은 한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삼성전자의 경영 환경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현재 이어지는 탄핵 정국이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경쟁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는 정치적 혼란으로 지원 법안 추진이 멈춰 있는 상태다.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은 지난 10일 본회의에서 일몰 기한을 올해 말에서 3년 연장하는 내용만 통과됐다. 당초 여야는 반도체 투자세액공제율을 5%포인트 높이고 연구개발(R&D)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1%에서 20~30%로 높이기로 합의했지만 탄핵 정국 속 야당이 태도를 바꿔 무산됐다.
또 반도체 R&D 종사자의 주 52시간 근로 규제 완화 방안이 포함된 반도체 특별법 논의는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이 가운데 '트럼프 리스크' 역시 부담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반도체 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한층 고조될 전망 속 반도체지원법(CSA) 보조금 지급마저 지연될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문제는 보조금 지급 지연 시 바이든 행정부와의 합의가 무효화 될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측이 내년 집권 이후 보조금 재검토 입장을 시사하고 있는 만큼 보조금 수령 조건의 지표 자체를 다시 협상해야 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조 바이든 정부는 한국과 대만 등에 뺏긴 반도체 공급망을 되찾기 위해 미국 내 반도체 시설 투자와 R&D에 보조금, 세제혜택 등을 제공하는 반도체법을 2022년 8월부터 시행했다. 이 법을 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64억달러, 4억5000만달러의 보조금 지원과 각종 세제 혜택 대상이 됐다.
그러나 삼성전자보다 열흘 늦게 예비거래각서를 체결한 마이크론이 지난 11일 보조급 지급을 확정지으면서 우리 기업의 불안감은 더욱 고조되는 분위기다. 미국이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한국 의존도를 낮추고 자국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는 것도 이같은 관측에 힘을 싣는다.
그간 트럼프 당선인은 반도체법 보조금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트럼프 당선인은 대선 후보 시절 반도체 보조금에 대해 "매우 나쁜 거래"라며 "보조금을 줄 것이 아니라 수입 반도체에 관세를 부과해 해외 기업들이 미국에 제조공장을 짓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정부에서 신설될 '정부효율부'를 이끌 비벡 라마스와미 역시 보조금 재검토를 시사한 바 있다.
◆AI 성장에 반도체 '대체로 맑음' 전망 솔솔
한편 국내 산업계에서는 트럼프 2기 출범에 따른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AI 산업의 성장 지속으로 반도체는 비교적 업황 전망이 밝은 것으로 관측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 11일 미국의 대중수출 규제 압박 및 관세 인상 등 불확실성이 존재하지만 급격한 시황 악화는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내년도 반도체 산업은 데이터센터, 서버 등 AI산업 인프라 지속투자, AI기기 시장 출시로 인해 고부가가치 반도체의 견고한 상승 흐름이 예상된다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내년 글로벌 반도체 설비투자는 주요국들의 반도체 지원책에 힘입어 올해 대비 7.9% 증가한 1872억달러(약 267조원)로 전망된다"며 "한국도 용인반도체클러스터를 중심으로 설비투자가 확대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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