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금융⑩-끝] 구워삶은 대가는 ‘확실했다’

[삼성과 금융⑩-끝] 구워삶은 대가는 ‘확실했다’

뷰어스 2024-12-12 11:01:10 신고

3줄요약

한국 경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독특한 집단을 낳았다. 거친 풍파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재벌이지만 ‘부의 대물림’ 시기만큼은 이들도 예외다. 그들이 갈라서고 쪼개질 때 나라 경제가 휘청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가 금융 계열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 왔다.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타가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자본과 금융시장 역할이 갈수록 긴요해지는 요즘, 재벌가의 숨은 조력자 혹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던 금융 계열사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검사 출신인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이 2007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그는 "삼성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유사시에 매수하고 회유하기 위해 평소에 중요 인사에 대해 접촉할 수 있는 인맥관리명단을 작성해 두고 있었다"며 참여연대 변호사 관련 인맥지도, 로비지침 등을 공개했다.(자료=연합뉴스)


“호텔 할인권을 발행해서 돈 안 받는 사람(추미애 등)에게 주면 부담 없지 않을까? 금융·관계, 변호사, 검사, 판사, 국회의원 등 현금을 주기는 곤란하지만, 주면 효과가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면 좋을 것임. 와인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와인을 주면 효과적이니 따로 조사해 볼 것. 아무리 엄한 검사, 판사라도 와인 몇 병 주었다고 나중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임.”

삼성그룹의 비자금 운용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가 2007년 공개한 ‘이건희 회장 지시사항’의 일부다. 2003년 11~12월 내려진 방대한 지시(A4용지 7.5장 분량) 가운데 유독 이 138글자가 눈길을 끈 이유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삼성의 정·관계 로비 정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어서다. 이를 통해 세상 사람들은 ‘삼성이 돈을 주면 받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안 받는 (소수의) 사람이 있다’, ‘삼성이 돈을 주는 주요 대상은 관계, 법조계, 정치인 등이다’, ‘삼성은 현금을 대체할 로비 수단을 적극적으로 강구하고 있다’ 등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 총수의 충격적 사고 “돈 안 받는 사람은 할인권 어때?”

‘관리의 삼성’이란 명성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혈연·학연·지연 등 오랫동안 치밀하고 촘촘하게 인맥을 관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예를 들어 재벌 비판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를 돕는 변호사의 경우 고향, 출신학교 등 당사자 정보뿐만 아니라 핵심 지인, 연수원 동기, 친한 친구 등 닿을 수 있는 연결고리란 연결고리는 모조리 파악해 수집했다. 그룹은 인맥 관리를 위해 주요 계열사 과장급 이상 임직원들로부터 ‘인맥 정보’를 꾸준히 제출받았다. 확보된 명단은 A~D등급으로 분류, 당장 이해관계가 없더라도 골프 접대부터 회식 지원, 명절 선물, 경조사 후원 등 다양한 명목으로 금전적 지원을 제공했다.

그룹 차원에서 반드시 붙잡고 싶은 핵심 인물은 보다 강력한 연결고리로 묶었다. 합법적으로 보수 등 유·무형의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사외이사가 대표적이다. 일례로 삼성생명의 경우 사외이사의 절반 이상을 관료 출신으로 채우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10년 간 선임된 전직 관료를 살펴보면 임채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법무법인 광장 고문),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법무법인 클라스 고문), 이창재 전 법무부 차관(법무법인 아미쿠스 대표변호사), 허경욱 전 기획재정부 차관(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강윤구 전 보건복지부 차관, 윤용로 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박봉흠 전 기획예산처 장관, 김정관 전 지식경제부 차관, 이종남 전 증권감독원 부원장 등 쟁쟁한 인물들로 채워졌다. 사외이사 제도는 대주주의 독단경영과 전횡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8년 도입됐지만 도입 취지대로 운영되고 있다고 믿는 이는 사실상 거의 없다.

그룹 전체로 확대해 보면 삼성과 관료의 ‘애착관계’ 형성은 더 뚜렷하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지난 10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자산 상위 30대 그룹의 계열사 등기·미등기 임원 1만1208명 가운데 관료 출신은 337명으로, 이 가운데 49명(14.5%)이 삼성그룹 소속이었다. LG그룹(4명)에 비하면 10배 이상 많다. LG의 임원 수가 삼성의 절반 규모임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다. 관료 출신 임원들의 전직 부처를 살펴보면 검찰(75명), 판사(53명), 국세청(38명), 금융위·금감원(26명), 산업통상자원부(23명), 기획재정부(21명), 대통령실(16명), 공정거래위원회(12명) 순으로 나타났다. 이들 대부분은 재벌 거수기로 비판받는 사외이사로 활동 중이다.

■ 삼성의 깊은 ‘관료 사랑’...사외이사제 적극 활용

재벌기업 사외이사에 유독 법조계 인사가 많은 이유는 과거 역사를 조금만 들춰봐도 이해할 수 있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경실련 재벌개혁위원회 위원장)의 저서 ‘재벌 공화국’에 따르면 삼성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은 1966년 발생한 ‘사카린 밀수 사건’과 관련해 기소도 되지 않았다. 제2대 고 이건희 회장은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과 2009년 삼성그룹 비자금 수사 및 불법 세습에 관한 특별검사 수사 결과로 불구속 기소는 됐으나 집행유예만 선고받았다. 특검은 징역 7년과 벌금 3500억원을 구형했지만 1·2심 재판부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현 이재용 회장의 경우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실형 선고를 받긴 했으나 1심 유죄가 2심 무죄로 번복되고 ‘치유적 사법’이라는 생소한 용어가 등장하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 잇따랐다. 현재 진행 중인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의혹 재판도 1심 무죄 결론에 대해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희한한 결론’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재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사법부의 흑역사를 감안하면 내년 2월 항소심 선고도 상식적인 판결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분위기다.

“상식을 뛰어넘는 비정상적 판결에 앞장섰던 법관들은 승승장구했다. 파기환송 사건을 담당했던 김창석 부장판사는 2012년 이명박 정부에서 대법관이 됐다. 삼성 특검 사건 가운데 최악의 판결로 꼽히는 2심 담당 재판관이었던 서기석 판사는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됐다. 대법원 판결에서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 저가 발행에 대해서는 유죄를, 그러나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에 대해서는 무죄라는 의견을 내, 결국은 이건희의 유무죄를 판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지형 당시 대법관은 최근 국정농단 사건에서 이재용의 파기환송심 재판부의 요구로 만들어진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이보다 앞서 2010년 1월에는 삼성 특검을 지낸 조준웅 변호사의 아들 조 씨가 삼성전자 과장으로 입사한 일도 있었다.”

저서에서는 실증 연구 결과도 소개하고 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대규모 기업집단 소속 경영자나 지배주주(총수 일가)는 28명 전원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반면, 재벌 출신이 아닌 50명 중에선 19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박 교수는 “재벌 총수 일가에게 유독 관대한 판결로 사법 정의를 스스로 무너뜨린 사법부의 흑역사는 삼성 재벌 총수에 대한 사법 특혜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며 “각종 법률과 사법적 특혜, 언론의 비호 속에서 재벌 총수 일가는 사실상 한국의 ‘사회적 특수 계급’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 횡령·배임 실형 확률, 재벌 0% vs 비재벌 38%

법조계 인사들이 사법 리스크 방어 목적으로 관리됐다면 경제·금융 관료들은 세금 회피, 인·허가 등 이권, 재벌 규제 완화 등 다용도 목적을 위해 관리의 대상이 됐다. 삼성과 관료의 합작으로 누더기가 된 법안은 금산법, 보험업법, 공정거래법, 산업안전보건법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다만, 관료 출신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영입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로펌에서 고문으로 모셔갈 정도의 영향력은 있어야 재벌 그룹 사외이사 명함이 주어진다.

삼성전자는 올해 신제윤 전 금융위원회 위원장(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을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해 눈길을 끌었다. 5명의 사외이사 가운데 이례적으로 금융전문가가 2명이나 포진해서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리스크 관리 전문가로 자금 운용, 글로벌 전략 등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일각에서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계속 발의하고 있는 ‘삼성생명법’ 방어 차원이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전 회차에서 살펴본 대로 삼성생명법이 통과되면 삼성생명은 보유 중인 삼성전자 지분을 강제 매각해야 해 이재용 회장의 그룹 지배력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총수 일가의 지배력 유지를 위해 사외이사에 전직 금융위원장을 영입했다는 시각이다.

올해 삼성생명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된 임채민 전 장관 역시 의결권 자문사인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로(CGCG)부터 선임 반대 권고를 받았다. 임 전 장관이 2015년부터 법무법인 광장 고문으로 재직해 왔는데, 광장은 이재용 회장의 사건 변론을 맡은 바 있어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CGCG는 “최근 3년 내에 해당 회사 또는 모자회사, 지배주주 일가의 법률대리 또는 자문계약을 체결한 법률사무소에 소속된 사람이 사외이사로 선임될 경우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권고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삼성생명 임원후보추천위원회는 “삼성생명과의 최근 3년간 거래내역 및 최대주주와의 관계가 없다”며 선임을 강행했다.

“대한민국 권력을 사실상 ‘늘공(늘상 공무원)’이 쥐고 있어서 이렇습니다. 늘공이 가진 건 기록·정보·자료죠. 재벌이 우리나라 토지를 얼마나 가졌냐에 대해 지난 3년 내내 정부에 자료 요청을 했는데 안 줘요. (2017년 진보 정권이 출범했는데도) 공무원들은 재벌 토지 보유 현황 자료를 왜 안 줄까요? 공무원 그만 두고 재벌 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어 그렇습니다. 그 품으로 가면 죽을 때까지 재벌 기업들이 책임져 줘요. 이러니 늘공들이 대통령·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재벌을 위해 일하는 겁니다. 5년짜리 대통령, 4년짜리 서울시장 위해 일하는 공무원? 없어요. 제가 20년 동안 경험한 게 그거예요.”

경실련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김헌동 시민운동가가 2021년 서울주택도시공사 사장에 취임하기 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는 재임 기간 중 분양원가 공개 등 평소 지론을 실천에 옮겼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는 지난 10월 국내 자산 상위 30대 그룹의 계열사 중 상반기 보고서를 제출한 298개 기업에 소속된 임원(등기,미등기) 1만1208명의 출신 이력을 분석한 결과, 관료 출신은 337명(3.0%)이라고 밝혔다. 관료 출신 임원 수가 가장 많은 그룹은 49명이 포진해 있는 삼성이었다. 반면 관료 출신 임원의 비중이 가장 작은 그룹은 LG로 전체 임원 940명 중 4명인 0.4%에 불과했다.(자료=리더스인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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