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군사반란에 무너진 민주화의 꿈[오늘의역사]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군사반란에 무너진 민주화의 꿈[오늘의역사]

머니S 2024-12-12 07:03: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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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군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사진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생전 모습./사진=JTBC 캡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군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사진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생전 모습./사진=JTBC 캡처
1979년 12월12일 군 내 사조직 하나회 소속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

10월27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하나회 조직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강제 연행하며 군사반란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군사적 충돌을 12·12 군사반란이라고 부른다.

독재 정부의 끝… '서울의 봄'을 기대했지만 다시 찾아온 독재 정권

하나회 단체 사진./사진= 영화 '서울의 봄' 캡쳐 하나회 단체 사진./사진= 영화 '서울의 봄' 캡쳐
'서울의 봄'이라는 용어는 1968년 체코 슬로바키에 일시적으로 불었던 민주화의 바람을 가리키는 프라하의 봄에 빗댄 표현으로 서울의 봄도 프라하의 봄과 마찬가지로 7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잠깐의 순풍으로 그쳤다.

1961년 5월16일 쿠데타를 일으켜 약 18년간 독재한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이후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에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던 최규하는 1979년 11월10일 특별 담화를 통해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가능한 빠른 기간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정한 후 다시 선거를 실시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야당인 신민당은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에 합의했다. 그러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세력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군대 내 비밀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는 전두환의 동기생들이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들을 주력으로 상부상조하며 군부 내 요직을 하나둘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기존에 5.16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기존 군부세력을 위협할만한 수준으로 군 내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권력 집중에 대해 불만이 많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나회는 비밀 사조직이었기에 조직원들을 추측하기 어려워 견제에 어려움이 있었다.

독재 정권을 막기 위해 목숨 바쳐 저항한 사람들

왼쪽은 서울의 봄에서 정해인이 연기한 김오랑 소령, 오른쪽은 실제 김오랑 소령의 사진./사진= 서울의 봄, YTN 갈무리 왼쪽은 서울의 봄에서 정해인이 연기한 김오랑 소령, 오른쪽은 실제 김오랑 소령의 사진./사진= 서울의 봄, YTN 갈무리
12·12 군사반란에서는 군부를 장악하려는 하나회인 반란군과 이를 막기 위한 진압군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 진압군이라고 불리긴 하나 전력이 육본 참모진과 장태완 수경 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움직일 수 있는 수경사 33단 일부, 육본헌병대, 9공수여단이 전부였기에 반란군의 상대가 되긴 어려웠다.

9시간의 반란과정에서 총 3명의 군인이 숨졌다. 사망자는 특전사령관을 보호하다 반란군 총에 희생된 고 김오랑 소령(이후 중령 추서), 국방부 헌병중대 정선엽 병장, 수경사 33헌병대 소속 박윤관 일병 등 총 3명이다. 진압군 소속이었던 김오랑 중령과 정선엽 병장은 '전사자'로 분류돼 있지만 박윤관 일병은 '순직자'로 분류돼 있다.

숨진 군인이 반란군이었나 진압군 소속이었나가 한 때 논란이 되기도 했으나 당시 사망한 군인들이 본인 의사로 반란에 참여한 것이 아닌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동일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순직 처리가 인정되지 못한 박윤관 일병도 '육군참모총장 초소를 사수하라'는 명령에 따라 초소를 지키다가 역시 '반란군에 넘어간 육군참모 공관을 탈환하라'는 지시를 받고 진입한 해병대 병력에 의해 사망했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반란에 참여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군사반란 이후, 민주주의를 지키려 노력한 용사들의 처참한 최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진./사진=5 18 민주화운동부상자회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진./사진=5 18 민주화운동부상자회
12·12 군사반란 이후 진압군 측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고문을 당한 후 불명예 제대를 당했다. 그것도 모자라 최고 계급인 대장에서 최하 계급인 이등병까지 무려 18계급을 강등당했다. 이후 전두환이 백담사로 들어간 이후에 대장으로 복권됐다.

정승화 총장과 함께 서빙고 분실로 끌려간 인원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관,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이건영 제3야전군 사령관, 문홍구 작전 본부장 등 5명이다. 장태완 소장은 소장 신분으로 강제 예편당하고 6개월간 가택 연금을 당했다. 이후 아버지와 아들을 잃기도 했다. 정병주 소장의 경우 소장 신분으로 강제 예편당하고 이후 1988년 10월에 실종된 후 숨진 채 발견됐다. 극단적 선택으로 결론이 났으나 차고 있던 시계가 실종될 무렵에 멈춰있어 타살 의혹이 남아있다. 김진기 준장은 국군보안사령부에서 조사를 받고 준장 신분으로 자진 예편했다. 전두환, 노태우가 수차례 공직을 제안했으나 모두 거부했다.

군사반란 이후 12월24일 국방부는 정 총장을 김재규와 관련한 내란방조죄로 구속 입건했다. 이밖에 이건영 중장, 장태완 소장, 정병주 소장, 문홍구 소장 등 4명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에게 돈을 받았으며 12.12 때 병력을 출동시키는 등 조직적인 저항을 했다는 오명을 씌우기도 했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노력은 군부뿐만이 아니라 국민도 함께했다. 12·12 군사반란 당시에는 대학교 방학기간과 겹쳐 큰 움직임이 없었으나 시간이 흘러 문제가 공론화가 되자 대학생을 중심으로 민주화 물결이 일었다. 광주에서는 5.18 민주화 항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전두환은 이를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진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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