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독특한 집단을 낳았다. 거친 풍파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재벌이지만 ‘부의 대물림’ 시기만큼은 이들도 예외다. 그들이 갈라서고 쪼개질 때 나라 경제가 휘청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가 금융 계열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 왔다.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타가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자본과 금융시장 역할이 갈수록 긴요해지는 요즘, 재벌가의 숨은 조력자 혹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던 금융 계열사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1985년 체결된 ‘플라자 협정’의 영향으로) 1986~1989년 사이 우리나라에 국제수지 흑자가 약 330억 달러 발생했다. 국제수지 흑자면 기업이 무역으로 돈을 번 것인데, 그렇게 번 돈을 다 어디에 썼을까? 그중 130억 달러를 국내 토지 매입에 썼다. 번 돈의 3분의 1 가량을 그런 비생산적인 분야에 집중 투입했다면, 그건 투자가 아니라 분명 투기라고 말해야 한다. 재벌이 땅 투기를 한 것이다.” -김종인 저서 ‘영원한 권력은 없다’ 중에서-
대한민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재벌의 비업무용 토지 매각 조치’가 1990년 단행된 배경이다. 김종인의 회고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 들어 부동산 문제는 심각했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땅값 상승률은 연평균 10% 내외였는데, 1988년부터는 매년 30% 가까이 올랐다. 재벌이 무역에서 번 돈을 부동산에 쏟아부은 영향이다. 땅값 상승은 집값 및 전셋값 상승으로 이어졌고, 전세보증금 인상으로 일가족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재벌의 탐욕이 결과적으로는 서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당시 30대 재벌이 보유한 부동산은 토지만 1억2320만평. 현재 여의도 면적(87만평)의 140배다. 그 중 10% 이상이 1987~1989년 매입한 것이었다. 감사원 자료에 따르면 재벌 토지의 약 43%가 비업무용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경제수석이었던 김종인은 온갖 압력에도 10대 재벌이 갖고 있던 비업무용 토지 1800만평을 단번에 매각하도록 조치했다. 이듬해 토지가격 상승률은 하락세로 돌아섰고 주택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다. 재벌의 부동산 투기를 막으니 물가가 잡히고 증시까지 안정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1987년 개헌 당시 반영된 ‘경제민주화 조항’(헌법 제119조 2항)이 위력을 발휘한 순간이다.
■ 무역으로 번 돈, 부동산에 쏟아붓다
하지만 재벌에 대한 부동산 투기 억제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군인 대통령 시절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문민 대통령 집권 30년 간 재벌은 어떠한 견제도 없이 자유롭게 부동산을 사들였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2019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상위 5대 재벌그룹 소유 토지자산은 장부가액 기준 1995년 12.3조원, 2007년 24.2조원, 2012년 51.9조원, 2018년 73.2조원 등 23년 동안 약 6배(60.9조원) 늘었다. 그룹별로는 현대차(24.7조원), 롯데(17.9조원), 삼성(14.0조원), SK(10.4조원), LG(6.2조원) 순이다. 장부가액이 이 정도이니 실제 가치는 100조원이 훌쩍 넘었다.
1989년 창립 때부터 재벌의 부동산 투기를 감시해 온 경실련은 총선을 앞두고 올해 2월에도 5대 재벌의 부동산 보유 실태를 발표했다. 5년 전과 달리 이번에는 투자부동산, 즉 비업무용 성격의 부동산 보유 현황을 별도로 공개했다. 2022년 기준 5대 그룹의 보유액은 롯데(7조872억원), 삼성(4조7313억원), SK(3조3725억원), LG(1조9231억원), 현대차(6121억원) 순으로 많았다. 회사별로는 삼성생명의 투자부동산 가액이 가장 많았고, 이어 롯데리츠, 에스케이리츠, 롯데쇼핑, 호텔롯데 등이 뒤를 잇는다. 문제는 이 데이터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스템 등으로 확인된 최소 금액이라는 것.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 재벌의 토지소유 현황은 비업무용까지 전체 공개됐지만 1999년 전자공시 도입으로 일부 공개로 바뀌었고, 2011년 국제회계기준(K-IFRS) 도입 이후에는 달랑 장부가액만 공개하고 있다. 토지 면적, 공시지가조차 빠져 있다.
오세형 경실련 경제정책팀 부장은 “역설적으로 재벌의 부동산 투기 데이터는 노태우 정부 시절 가장 공개가 잘 됐고, 이후 제도 변경 등으로 공시 의무가 사라지면서 재벌의 정확한 부동산 규모를 알 수 없게 됐다”며 “정보공개를 계속 청구해 왔지만 담당 부처는 묵묵부답”이라고 하소연한다. 자산 5조원 이상 공시대상기업집단의 경우 보유 부동산의 건별 주소, 면적, 장부가액, 공시지가, 공시가격 등을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한다는 게 경실련의 입장이지만 실현 여부는 미지수다.
■ 재벌의 은밀한 부동산 거래...보험사 활용법
예나 지금이나 삼성은 부동산 투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재벌이다. 이건희 회장은 생전 본인 명의로만 고가의 주택·건축물 10여 채 외에 토지 200만평(644개 필지)을 소유했다. 과연 언론에 노출된 이 정도가 총수 일가 부동산의 전부일까.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과거 정부에서 재벌 부동산 정보를 공개할 때 법인뿐만 아니라 왜 임원까지 포함시켰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라”고 귀띔한다. 재벌 회장들이 예금, 주식뿐만 아니라 부동산까지도 차명으로 거래하거나 보유한 사례가 많음을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2007년 ‘삼성 비자금 특검’ 당시 김용철 변호사는 “이건희 회장 일가는 자산 중 상당 부분을 타인 명의로 보유하고 있다”며 차명 부동산의 존재를 폭로한 바 있다. 하지만 조준웅 특검은 수사 결과에서 삼성생명 차명 주식의 존재만 발표했다. 차명 부동산의 존재 여부, 실체 등은 제대로 공론화된 적이 없다.
삼성그룹 단독 기사를 다수 썼던 백인호 전 매일경제 기자는 지난 10월 발간된 ‘삼성 이건희 오디세이아’에서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부지매입 과정에서의 위법 사례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중앙개발(삼성에버랜드의 전신)이 부지매입을 위해 임시 채용한 직원들이 용인 일대를 돌아다니며 땅을 팔지 않으려는 지주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내용이다. 관련 기사가 1면 톱으로 작성됐지만 세상의 빛을 보지는 못했다. 삼성이 언론사에 압력을 넣어 기사가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다.
용인자연농원 조성 규모는 무려 450만평. 땅 소유자만 2000여명에 달했다. 재벌이 땅을 사들인다고 소문이 나면 지주들이 땅값을 높게 부르며 팔지 않는 일이 생겨 부지 매입은 은밀하게 진행됐다. 그룹은 뒤에 숨고 위탁 회사 직원 명의로 계약했다가 회사가 나중에 되사는 방식이었다. 부동산 매입 사실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 타인 명의로 계속 보유 중인 부동산도 상당했다고 한다. 이런 물건들은 당연히 재벌 보유 부동산 통계에서 누락될 수밖에 없다.
과거 자료 등을 살펴보면 삼성그룹의 경우 금융 계열사인 삼성생명을 부동산 차명 거래에 적극 활용했다. 삼성생명은 1988년 전액 출자 형태로 동방빌딩관리(삼성생명서비스)라는 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삼성그룹의 사옥 등 부동산 자산을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구체적으로는 삼성생명서비스에서 떨어져 나온 샘스(SAMS)라는 회사가 그 역할을 맡았다. 삼성(SAMSUNG) 영문자의 앞 네 글자를 따 사명이다. 공식적으로는 삼성과 무관한 기업이었지만 구성원들은 삼성생명 출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사무실도 삼성생명 빌딩에 자리했다. 그룹 차원, 또는 총수 일가의 부동산 매입 수요가 있을 때 샘스 직원들은 개인 명의로 먼저 매입한 뒤 나중에 이를 회사나 개인에 되파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샘스는 이후 명맥을 달리 하지만 그룹의 굵직한 부동산 거래의 배후에는 늘 삼성생명이 있었다.
■ 재벌 부동산 실태 공개, 안하나 못하나
1990년 단행된 ‘재벌의 비업무용 토지 매각 조치’는 헌법의 경제민주항 조항 덕에 실행이 가능했다. 하지만 1987년 개헌 당시 재계 로비를 받은 전두환은 경제민주화 조항을 콕 집어 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에 김종인은 다음의 말로 전두환을 설득했다고 회고했다.
“지금이야 정치세력이 경제세력에 비해 권한이 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경제세력이 정치세력을 앞지를 것이고 자기들 마음대로 나라를 움직이려는 욕심을 갖게 될 것이다. 경제세력은 언제든 위헌 소송을 걸어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려 들 것이다. 그때에 그들을 제어할 헌법적 장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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