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축하해! 보고 싶은데 내려가지도 못하고, 누나가 미안해.”
“누나도 엄마도 바쁜 거 알아, 괜찮아. 아침에 동자 누나가 미역국 끓여줘서 맛있게 먹었어.”
“며칠 지나고 내려갈게.”
“아참, 누나!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그게… 내일 내가 여자애를 만나기로 했는데…”
“뭐? 여자 친구?”
“친구가 아니라… 며칠 전에 잠깐 보고 내일 두 번째 보는 거야.”
“호호호. 그럼 데이트하는 거네.”
“데이트는 무슨… 누나, 문제는…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걔 앞에 있으면 아무 생각이 안 나.”
“아이고. 우리 열이가 사랑에 빠졌네.”
“사랑은 무슨... 놀리지 말고 날 좀 도와줘. 누나.”
“뭘 도와줄까?”
“나도 모르지! 걔를 처음 만나서 뭐라고 해야 하는지? 또 어디를 가야 하는지? 또 뭘 먹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음… 열아! 그 친구를 만나면 저절로 해결돼. 아무 걱정하지 마. 무조건 그 여자 친구가 좋아하는 걸 해.”
“뭘 좋아하는지 알아야 어떻게 해주지.”
“넌 알 수 있어. 나랑 있을 때를 생각해 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말을 안 해도 넌 잘 알잖아.”
“그야 그렇지…”
“똑같아.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마음이 통하게 되어 있어.”
“날 좋아하지 않으면?”
“우리 정열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 여자애는 바보이거나 멍청이니까 걱정하지 마. 누나만 믿어!”
“이름이 재희이고… 전교 1등이라는데…”
“그러면 답이 나왔네. 걱정 말고 내일 재미있게 놀아. 엄마에게 여자 친구 생겼다고 이야기 해줄게.”
“누낫!”
“알았어. 호호호.”
청하는 자기 일인 양 설레었다.
"우리 열이가 데이트를 한다니. 한 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하다. 뭔가 그 여자에게 빼앗기는 이 기분은 도대체 뭘까?”
광복동 부산뉴욕 빵집 앞에서 구세군이 종을 흔들며 자선 모금을 하고 사람들은 걸음을 총총거리며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고 있다. 즐거운 휴일이다. 부산뉴욕 빵집 아들인 용준이가 지나가는 나를 보고 부른다.
“어이, 어디 가? 나하고 놀자.”
“오늘은 안돼, 약속이 있어. 미안!”
발걸음을 미 대사관 쪽으로 돌려 좌측 골목으로 들어섰다. 황백카페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오! 우리 정열이가 왔네. 와, 오늘 멋지다.”
진희도 오늘 두 사람의 약속을 기다리며 행복했다. 풋풋한 사랑을 얼마 만에 느끼는지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이혼을 한 진희는 늘 마음이 허전했고 자극적인 일이 없으면 무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자극적인 것도 없는데 묘하게 기다려지고 잔잔하게 흥분되기도 한다. 마치 자기가 연애하는 것처럼.
“누나, 메리 크리스마스!”
“그래, 메리 크리스마스! 일찍 왔네.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막 심장도 빨라지고 그렇지?”
“아이참, 내가 얼란가?”
“내가 너를 모르냐? 얼굴에 다 쓰여 있어.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고. 호호호”
이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재희를 보고 진희와 정열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풀을 먹인 하얀 칼라에 검정 교복을 입고 나타난 재희는 빛이 났다.
“늦은 건 아니죠?”
“아냐, 아냐, 어서 와. 정말 예쁘다.”
수줍어하는 재희에게 말했다.
“오늘 같은 날 웬 교복이야?”
“어딜 갔다 오느라 갈아입고 올 시간이 없었어요. 보기가 그래요?”
“아니야, 교복이 정말 잘 어울려. 그렇지 열아?”
“아, 네! 좋은데요.”
재희는 얼굴이 상기된 수줍은 모습으로 정열을 쳐다보았다. 재희는 집에서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것도 마음에 드는 옷이 없었다. 빈궁한 형편에 겨울 코트 하나 변변히 없어서 그냥 교복을 입기로 했다. 아침부터 흰색 칼라에 풀을 먹이고 다림질까지 하느라 바빴다.
재희도 남자 친구와 데이트하는 것이 난생처음이었지만 정열이보다 훨씬 노숙해 보였다. 흐트러지지 않고 항상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깨끗한 복장에 단아한 미소를 머금은 천사 같은 여고생이었다.
따뜻한 우유를 내어 온 진희는 이 젊은 친구들과 어디든지 다니면서 같이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상큼했다. 행복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우유 잔을 두 손으로 쥐고 마시고 있는 재희를 힐끗 보며 정열은 무언지 묘한 연민 같은 감정이 들었다. 정열의 머릿속에는 온통 재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팩션소설'블러핑'58]에서 계속...
『미드저니 마스터 1000』 와디즈펀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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