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시, 백사 이항복 유적지 기념관 개관... 이항복선생의 뜻을 기리는 뜻깊은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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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 백사 이항복 유적지 기념관 개관... 이항복선생의 뜻을 기리는 뜻깊은 공간

뉴스영 2024-12-09 15:58:2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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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7일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일대에 총 5,610㎡ 규모에 유물 기념관, 교육관, 관리동을 갖춘 ‘백사 이항복 유적지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사진=변영숙기자


(포천=뉴스영 변영숙 기자) 지난달 7일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일대에 총 5,610㎡ 규모에 유물 기념관, 교육관, 관리동을 갖춘 ‘백사 이항복 유적지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그동안은 도로변에 이항복 선생의 묘와 신도비만 덩그러니 있는 모양새가 쓸쓸해 보였는데 이번 기념관 건립으로 ‘유적지’의 구색을 갖추게 됐다.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유적지는 2019년 경주 이씨 백사공파 종가의 사업 부지 기부채납과 경기도 특별 조정 교부금 등 29억 원의 예산이 투입돼 지난해 12월 준공 올해 11월에 완공됐다.

□백사 이항복기념관 유적지 둘러보기


출입문인 외삼문을 통해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함께 기념관, 관리동, 교육관 등 세 개의 건물이 보인다. 기념관 입구 정면에는 이항복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져 있고 그 외 다양한 역사 유물과 사료 등이 전시돼 있다.

선생의 생애와 ‘오성과 한음의 우정’ 등 선생과 관련된 일화들이 텍스트 패널에 소개돼 있다.

이항복 선생은 1556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는 항복, 호는 백사, 시호는 문충공이다. 고려 후기 대제학 이제현의 후손이며 죽마고우인 이덕형과의 많은 일화로 ‘오성과 한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선조 13년 1580년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다. 좌의정, 우의정, 이조참판,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는 동안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이고 공정하게 정사를 돌본 문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도승지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고 그 공이 인정되어 병조판서에 발탁, 전쟁을 지휘하여 국난 극복에 힘썼다. 광해군 때에는 인목대비 김 씨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1618년 함경도 함흥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백사는 생전에 5번의 공신 추대를 받았으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로 ‘죽으면 베옷이 아닌 평상복을 입혀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난달 7일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일대에 총 5,610㎡ 규모에 유물 기념관, 교육관, 관리동을 갖춘 ‘백사 이항복 유적지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사진=변영숙기자


기념관에는 58세 때 그려진 백사의 초상화와 호성공신 1등 교서 등 그의 생애를 기릴 수 있는 유품들이 가득하다. 선생이 58세 때 그려진 이 초상화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안전하게 의주까지 피신시킨 공을 인정받아 1613년 호성공신 1등 교서를 받은 후 제작됐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호성공신 1등 교서이다. 교서에는 당시 함께 공신으로 추대된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가려진 이름이 있어 흥미롭다. 가려진 이름은 ‘정언군’이다. 후에 ‘인조’가 된 인물이다. 왕위에 오르면서 호성공신 명부에서 지운 것이다. 교서의 글씨를 쓴 분은 당대 명필 한석봉 선생이다.

기념관 말미에는 선생의 가계도가 전시되어 있는데 후손 중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이름들이 가득하다.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해 만주로 이주, ‘신흥무관학교’를 세은 이회영,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이시영을 비롯해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건영, 석영, 철영, 호영 등이 모두 백사의 10세손이다. 문화 해설사의 말처럼 이항복 대감의 유전자가 면면히 그 후손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듯하여 숙연해진다.

국가수호, 국민 안전에 대한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 부인의 범죄사실과 온갖 부정부패를 감추기 위해 불법적인 비상계엄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백사와 그 후손들의 생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념관의 규모는 작지만 평소 이항복 선생의 인품과 학식, 나라에 대한 충정을 되새길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 가득하다. 기념관 맞은편에는 교육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 세미나 공간 등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이항복 선생 진품 유적 17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항복 선생의 묘역과 영당 및 신도비/사진=변영숙기자


기념관에서 50m 이내에는 이항복 선생의 묘역과 영당 및 신도비 등이 있으니 함께 참배하면 좋겠다.

당파를 벗어나 나라와 백성을 위한 큰 정치가와 청렴결백의 삶을 살다 간 백사 이항복이 주는 울림이 크다.

마지막으로 광해군실록인 왕조실록 128권, 광해군 10년 5월 13 그의 죽음과 관련한 기록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전 영의정 오성부원군 이항복이 유배된 곳(함경도 북청)에서 세상을 떠났다. 항복은 호걸스럽고 시원한 성품에 넓은 아량과 풍도(風度)가 있었다. 임진왜란에 도승지로서 임금을 호종한 이유로 병조판서에 발탁되어 공로가 가장 컸었다. 평생 동안 세력가에게 머리 숙이는 글은 짓지 않았고, 집에 들어오는 선물이나 기증품은 받은 적이 없어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으나 집안이 가난하기가 가난한 선비 집안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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