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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어떤 술을 마셨을까. 삼국시대 술은 당대의 명주로 당나라나 일본까지 유명했는데 백제의 술(한산소곡주)은 지난 칼럼에서 이미 다뤘기에 이번엔 고구려 술(계명주)에 대해 다룬다.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의 설화에 술이 등장한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연못가에서 하백의 세 자매를 취하려 할 때, 이들이 수궁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미리 술을 마련해놓고 먹여서 취하게 한 다음에 세 처녀 중에서 큰 딸 유화와 인연을 맺어 주몽을 낳았다는 설이다.
다만 그 술이 무슨 술이었는지, 이름이나 종류, 만드는 법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고구려의 술 제조 기술은 상당히 발달했다고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 서진 사람 진수가 280~289년 사이에 편찬한 역사서로 위서 동이전 삼국지 30권 중 동이 부분을 지칭하며 줄여서 '위지(魏志) 동이전'으로 부름)에 나온다.
또, 위지 동이전에는 고구려 건국 초기 대무신왕때 (AD 28년)에 '지주(旨酒)를 빚어 한나라의 요동 태수를 물리쳤다'는 기록과, 중국인 사이에 '고구려는 자희선장양(自喜善醬釀) 하는 나라'로 주목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고구려인이 잘한다는 장양(醬釀)은 장담그기, 술빚기 등 발효성 가공식품을 말한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중국 송나라 때 이방이 편찬한 백과사서)에는 고구려 여인이 차좁쌀로 빚은 곡아주(穀芽酒)가 장쑤성 일대에서 명주 대접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무용총의 연회 장면을 보면 주인과 손님 앞에 각자의 음식상이 놓여있고 뒤쪽의 발 셋 달린 상에는 호리병 모양의 중국에서 수입한 칠기 술병이 있다. 이 병에 곡아주가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계명주에 대한 이야기는 1천500년 전 중국에서 편찬된 가장 오래된 농업기술 안내서 제민요술(齊民要術)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에 하계명주(夏鷄鳴酒)라는 술이 나온다.
'여름철 황혼 녘에 빚어 다음 날 새벽, 닭이 울 때까지는 술이 다 익어 마실 수 있다'고 기록돼 있다. 중국 문헌에 기록돼 있어 중국 술로 오해할 수 있지만 1천년 전 중국 송나라 때 국신사를 수행한 서긍(徐兢)이 고려에서 보고 들은 것을 쓴 기행문 '고려도경'에 고려인은 계명주를 잔치 술로 사용했다는 내용이 언급돼 있다는 게 결정적 증거가 됐다. 내용은 '고려의 잔치 술은 맛이 달고 빛깔이 짙으며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라고 쓰여있다.
지난 1996년 당시 농림수산부는 경기 남양주의 계명주 제조기능보유자인 최옥근 명인(지정 당시 53세)을 전통식품명인으로 지정했다. 최 명인에 따르면 계명주는 옥수수와 수수, 엿기름 등 7가지의 곡물로 만든다. 최 명인은 그전에는 1987년에 경기도가 지정한 전통주 기능보유자로 선정됐고 경기도 제1호 무형문화재다.
초창기에는 율무를 넣기도 했는데 요즘은 잘 쓰지 않는다고 최 명인은 전한다.
제조는 맷돌로 간 옥수수로 죽을 끓이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것을 삼베 자루로 걸러 식힌 뒤, 여기에 미리 조청에 담가뒀던 누룩과 솔잎을 첨가해 항아리에 담는다. 이때 완성된 술의 성패 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온도다.
온도가 낮으면 발효가 잘 안되고, 또 높으면 술이 상하게 된다. 섭씨 25∼28도가 가장 좋은 술맛을 내는 조건이다.
옛날에는 전날 밤에 담가 다음 날 새벽에 마시는 술이라고 돼 있지만, 요즘은 보통 5∼8일 정도 숙성시킨다. 잘 숙성된 계명주는 체로 거르고 나면, 맑은 노란색을 띤다. 맛은 부드럽고, 달콤하다.
재료로 엿기름과 조청을 쓰기 때문이다. 또 솔잎이 들어가서 솔 향기도 난다. 일반 탁주와 달리 많이 마셔도 숙취가 없다고 한다.
계명주는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축령산 자락에서 생산해왔다. 나중에는 경기도 이천으로 이전했다.
원래는 고구려 수도 평양성 인근에서 평안남도 지방에서 그 맥을 이어왔다.
평안남도 결성(結城) 장씨가(張氏家)의 10대 종손 며느리인 고 박재형 씨는 한국전쟁 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기일록'(忌日錄)을 품고 남한으로 왔다. 기일록에는 조상의 제삿날과 함께 제주를 담그는 방법이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고 한다. 스물세 살에 11대 종부로 시집온 최옥근 명인은 1965년 시집온 이듬해부터 시어머니인 박씨에게 술빚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최 명인의 남편인 장기항 씨(2005년 3월 작고)도 당시에는 기일록에 제조과정이 적힌 가양주(家釀酒)가 고구려 전통술이란 사실을 몰랐다. 1980년대 정부가 민속주 개발을 지원한다는 말을 듣고 이리저리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 술이 계명주란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고 한다.
그 옛날 집안에서는 이 술을 '엿 탁주'라고 불렀는데, 여러 문헌을 대조한 결과 계명주와 엿 탁주가 같은 술임을 밝혀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장기항 씨는 또 한명의 은인을 만나게 된다.
그가 만난 은인은 한양대 식품영양학과 이성우 교수다. 이 교수는 800여년 전 중국의 음식 서적인 '거가필용'과 조선시대 허준의 '동의보감'에 소개된 계명주와 엿 탁주의 제조 방법이 동일하다는 것을 밝혀내고 또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인 '제민요술'(齊民要術, 중국에서 현재까지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종합 농서로 북위의 고양 태수 가사협이 532∼549년경에 편찬)에 기록된 '하계명주'와도 같은 술이라는 것 고증했다.
계명주 제조법은 현재 최 씨의 장남 장성진 씨가 전수하여 대를 잇는 중이다. 남편 장씨의 오랜 투병으로 술 빚는 일과 사업마저도 2년을 쉬기도 했던 최 명인은 2009년 경기도 이천으로 이사해 새롭게 계명주를 빚으며 전통을 이어 나가고 있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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