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철도 관사촌 흔적 간직
(대전=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 발 영시 오십 분 / 세상은 잠이들고 고요한 이 밤 / …… / 목포행 완행열차'.
'국민가요'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는 '대전부루스'의 노랫말.
플랫폼에서 후루룩 단숨에 먹던 가락국수.
대전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이처럼 철도, 역과 관련된 것이 많다.
◇ 대전 부루스와 가락국수
이는 철도와 함께 탄생한 근대 대전의 역사와 정체성을 시사한다.
대한민국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대전이라는 대도시는 100여 년 전 철도 부설과 함께 등장했다.
그전까지 대전은 한적한 시골이었다.
경부선(1905년), 호남선(1911년)의 개통과 함께 시작된 대전의 성장과 변천은 교통의 발달과 함께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철도, 교통은 대전을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는 키워드이다.
1950∼1960년대 서울역을 저녁 8시 40분에 출발한 목포행 완행열차는 다음 날 새벽 0시 40분에 대전역에 도착했다.
열차는 정비 작업 후 0시 50분에 목포를 향해 다시 출발한다.
그 사이 연인들은 플랫폼에서 작별의 아쉬움을 나누어야 했다.
급행열차가 지나가기를 완행열차가 역 선로에서 기다리는 동안 승객들이 객차에서 내려 플랫폼 간이 식당에서 단 몇 분 만에 가락국수를 먹던 것도 1970∼1980년대 진풍경이었다.
교통은 생활, 문화, 사회를 바꾸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대전을 여행하는 것은 그것을 몸으로 느끼게 한다.
◇ 솔랑시울길과 기적을 울리는 사람들
철도가 부설된 초기, 즉 일제강점기 대전 역 주변에는 대규모 철도 관사촌이 있었다.
철도 관련 일본인 공무원, 기술자, 노동자들이 주로 살았다. 100여 호의 관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지금은 40여 호의 옛 관사 건물이 남아있다.
잔존한 관사들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본래의 외관을 잃었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나마 옛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 흔적을 간직한 관사들이 꽤 된다. 오래되고 낡은 목조 주택들이다.
과거 대전역 주변에는 동, 남, 북 관사촌이 있었다.
그중 남관사촌과 북관사촌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동관사촌만 현재 남아있다.
기적을 울리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철도 관사촌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는 이곳이 전국에서 유일하다.
대전광역시 동구 소제동 일대에 있는 동관사촌의 옛 관사 건물들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소제동은 대전 역사 동쪽 출입구로 나가면 바로 나오는 동네이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 대전에서 가장 번화한 부자 동네로 꼽혔으나 지금은 낙후 지역에 속한다.
옛 관사가 남아 있는 것도 개발에서 소외된 현상의 이면이라 할 수 있다.
소제동 옛집 중에는 주민이 살지 않는 빈집이 많았다. 일부 지역은 아파트 건축 예정지로 확정돼 있었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관사촌은 지금보다 훨씬 축소될 것이다.
옛 철도 관사촌이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둘러보고 싶다면 아파트 건설 공사가 시작되기 전인 지금이 적기일 듯하다.
소제동 관사촌을 구불구불 가로지르는 골목길이 솔랑시울길이다.
길 이름이 어여쁘다. '솔랑'은 이 동네 있었던 작은 동산인 솔랑산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시울'은 약간 굽거나 휜 부분의 가장자리를 뜻한다. '눈시울'이 대표적 용례이다.
소제동에는 옛적에 작은 호수가 있었는데 솔랑산 흙으로 호수를 매립했다고 전한다.
시울길은 호숫가 길이라는 의미가 된다.
솔랑시울길 골목 여행은 현대 한국 건설 역사의 한 페이지를 걷는 듯한 감성에 젖게 한다.
쓰러질 듯 낡은 집들, 다다미방의 통풍구가 있는 일본식 가옥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감이 주렁주렁 탐스러운 감나무들, 검은 콜타르를 바른 나무 전봇대,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의 서정 ….
그립고 아득하고 서러운 추억과 역사를 소환하는 풍경들이다.
관사촌의 복고 감성은 영화, 드라마 제작의 배경이 되곤 한다.
'변호인' '5월의 청춘' '택시운전사' '서울의 봄' 등이 이곳에서 촬영된 작품들이다.
낡은 관사를 개조하거나 활용한 도시재생 공간, 소제창작촌, 마을 소통 공간인 우물과 '시울 마실', 카페 등을 솔랑시울길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낡은 공간에 현대적 감성을 더해 만들어진 카페, 음식점 등은 옛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뉴트로(newtro) 감성을 일깨우는 듯하다.
관사촌에는 몇 년 전부터 옛 관사를 보수한 찻집, 식당 등이 들어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1920년대 지어진 관사 59호는 깔끔하게 단장돼 있었다.
철도공무원이었던 김길환 씨(2008년 작고)가 1945년부터 살았던 이 집은 그의 자녀 팔남매가 성장한 터전으로, '팔남매집'이라는 문패가 달려 있었다.
다섯째인 김승국 씨가 관리하고 있다는 '팔남매 연대기'가 현관 벽에 붙어 있었다.
굵고 싱싱한 대나무밭이 사계절 푸른 카페, 옛 관사 내부의 2층 구조를 그대로 살려 꾸민 카페, 널찍한 운동장을 갖춘 반려견 카페 등은 관사촌 카페 거리가 왜 대전의 명소로 떠올랐는지 짐작하게 할 만큼 멋스러웠다.
소제동에 있는 대전 무형 유산 전수시설인 대전전통나래관 건물에 올라가 보니 계족산, 식장산, 보문산, 구봉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인 대전 시가지와, 가을빛에 물든 관사촌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제동 관사촌에는 옛 철도 관사와 일반 주택이 섞여 있다.
옛 관사를 일반 주택과 구분하거나, 구불구불한 골목길에서 목적지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대전시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와 설명을 듣는 것이 관사촌 여행을 알차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대전시 홈페이지 등을 통해 신청하면 해설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 계속되는 이야기…대전 중앙시장과 역전시장
교통 발달이 낳은 도시인 대전을 부르는 별명은 많다.
중부 지방의 중심으로, 지리적으로 남한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뜻인 '중도'(中都), 정부 청사가 많은 '제2 행정도시', 최대 과학연구단지인 대덕연구단지를 품은 '과학도시' 등이 '교통의 메카'와 함께 입에 오르내리는 애칭들이다.
대전 역사를 기준으로 할 때 관사촌과 반대 방향인 역사 서쪽 출입구와 광장은 역전시장과 중앙시장으로 이어진다.
두 시장 모두 대전의 철도 교통 발달과 함께 성장했다.
역전시장은 규모가 크지 않다. 중앙시장은 전국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규모가 크고 유통되는 품목도 다양하다. 중앙시장은 생선과 채소를 파는 작은 시장이었으나 대전이 교통 물류의 중심이 되면서 충청남·북도를 상권으로 아우르는 대형 재래시장으로 커졌다.
부산 국제시장에 견주는 양키시장, 한복 시장, 먹자골목 등이 흥미롭다.
철도, 고속도로의 발전과 함께 성장했던 유통과 물류는 첨단 기술이 된 통신에 올라타 또 다른 진화를 경험하고 있다. 점차 커지고 있는 온라인 쇼핑은 중앙시장의 도매 기능을 크게 약화시킨 것. 대신 인터넷 주문과 택배 활성화로 소매 매출은 늘었다. 대전 중앙시장은 요즘 소매가 도매 비중을 능가하고 있다.
연간 매출이 1천억원 대로, 동네빵집으로는 전국 1위인 성심당은 대전의 새 명소이다.
성심당 대전역점은 억대 매장 임대료로 최근 화제가 됐었다.
성심당의 출발은 '밀가루 두 포대의 기적'이다.
창업자인 故임길순·故한순덕 부부가 1956년 고아의 아버지라 불렸던 대전 대흥동 성당 오기선 신부로부터 받은 미군 지원 밀가루 두 포대가 사업의 시작이었다. 전쟁 직후의 이 밀가루 배급도 대전이 운송과 배급의 중간 거점이었기에 가능했다.
성심당 대전역점에는 빵을 고르고 사려는 고객들이 만든 긴 줄이 컨베이어벨트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그만큼 고객이 많았다.
오로지 이 빵을 사기 위해 열차를 타고 대전역을 방문하는 여행자도 있다고 한다. 뜨끈한 가락국수 한 그릇의 자리를 달콤한 빵이 대신한 것일까.
걷는 사회학자로 이름 난 정수복 박사는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시민 사회학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도시의 역사와 미학을 성찰하는 시민 사회학자가 많을수록 도시의 얼굴은 더욱 인간적이 될 것이다. 대전역 서쪽 솔랑시울길과 동쪽 중앙·역전 시장 골목은 대전의 사회문화사를 '나'의 눈으로 보고 해석하기에 충분히 흥미로운 거리인 듯하다.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4년 1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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