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폭력서클 무스탕
경남고등학교는 1973년 청룡기에서 김용희와 천창호의 활약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1974년에는 차동열을 앞세워 황금사자기 우승에 성공하면서 완벽하게 고교야구의 최강자로 돌아왔다. 그 후로 경남고는 꾸준히 국가대표급 선수를 배출하였다.
공부가 시들해진 정열은 야구부 옥상에 살다시피 했다. 청하는 영숙의 눈치를 살핀다. 청하답지 않게 불안한 표정이 역력하다.
“왜 그래?”
눈치를 챈 영숙은 청하를 힐끗 보며 다그친다.
“그게… 열이가 폭력 서클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무스탕이라는.”
“사고 쳤데?”
“그게 아니고…”
“그럼 됐지. 뭘 고민해? 정열이를 몰라? 그 아이는 내가 잘 알아. 내 새끼니까! 걱정하지 마. 지 앞가림은 할 놈이니까.”
영숙은 훌쩍 커버린 아들이 차라리 대견스러웠다. 갑자기 미치도록 보고 싶다.
“다음 달에 내려가자.”
“네, 마마. 하지만 괜찮겠어요?”
걱정하는 청하에게 영숙은 핀잔을 주었다.
“걱정도 팔자다. 아무 걱정 말래도. 네가 엄마 같다.”
이 시간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패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아고등학교 청바지와 중앙고등학교 밴드부 사이에 정열이가 서 있다.
“너희들 싸우려면 제대로 싸워라. 떼거리로 하지 말고 일대일로 제대로 붙는 건 어때? 심판은 내가 봐줄게.”
중앙고등학교는 올해 대연동에 개교한 신설 고등학교인데 동아고 애들과 사소한 시비가 붙었고 그 옆을 지나던 정열을 알아본 청바지의 동수가 인사를 하는 바람에 간섭을 하게 되었다. 두 팀은 모두 고등학교 1학년으로 광복동에 놀러 나온 중앙고 애들이 시끄럽게 한다고 동아고 청바지가 핀잔을 주는 바람에 싸움이 되었다고 동수는 설명했다.
“뭐 이런 걸 가지고 떼거리로 싸움박질을 하려고 해?”
양측 애들은 교련복에 모자를 쓴 2학년 정열을 보고 위압감을 느꼈다. 역삼각형의 다부진 체격에 청바지의 동수가 깍듯하게 대하는 것을 본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선배 취급을 하였다.
“아무리 우리가 고삐리지만 이런 사소한 일로 싸우면 쪽 팔리잖아. 그래도 싸우겠다면 할 수 없고.”
머쓱해진 아이들을 보고 정열은 중앙고등학교 밴드부 맨 앞에서 다부지게 서 있던 주장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내가 한잔 쏠게. 같이 가자. 서로 화해하고 툴툴 털어! 자, 너도 이리 와서 악수해.”
정열은 동수의 어깨를 감싸안은 채 까까머리 10명을 데리고 광복동 황백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아직 1주일이나 남았는데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났다.
황백은 아이스케키로 유명한 석빙고 큰딸이 차린 카페인데 고등학생이 단골인 묘한 카페였다. 여기서는 아무리 담배를 피고 술을 먹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열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몸에 착 붙는 실크 원피스 차림의 진희가 반갑게 맞는다.
“아이고, 누나가 눈 빠지는 줄 알았어. 왜 이리 뜸했어? 어서 이리들 앉아. 모두 일행이야?”
“네, 누나. 오늘은 술 한잔하려고요.”
진희는 웃으며 말했다.
“학생이 술은 안 되지! 칵테일 한잔씩 돌릴게.”
“그래요, 누나.”
얼떨결에 같이 온 일행들은 화려한 카페 인테리어와 여주인의 간드러진 애교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때 문을 열며 혜화여고 학생들이 요란하게 들어온다.
“언니! 나 왔어.”
혜화여고 퀸카인 성심이다. 훗날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미스코리아가 된 빼어난 미모의 여고생이다. 예쁜 얼굴은 고등학생 시절에도 숨길 수가 없었다. 옆자리에 자리를 잡은 4명의 여학생을 힐끗 보며 까까머리 고1 남학생들은 요동치는 가슴을 주체하질 못했다.
“오늘 생일이지? 잘 왔어. 언니가 오늘 생일 파티 해줄게.”
“아이, 이러면…호호호.”
일행은 까르르 웃으며 좋아한다. 진희는 정열을 카운터 쪽으로 잠깐 불렀다.
“야! 너 성심이 옆에 앉은 애에게 관심 있지?
“뭐라고 하는 거야! 누나는 참.”
“내 눈은 못 속이지! 나에게 맡겨. 누나가 알아서 할 테니 앉아 있어.”
진희는 성심이 옆에 앉아 눈같이 흰 얼굴을 한 여학생을 보며 말했다.
“처음 보는 친구네.”
“언니, 애는 내 짝꿍인 재희야. 김재희. 애,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재희예요.”
가까이에서 보니 단아한 얼굴에 기품이 나는 정말 예쁜 여자아이다. 진희는 몽환적인 재희의 얼굴에 빠져 한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오! 그래. 정말 예쁘게 생겼네.”
성심이가 옆에서 거든다.
“애는 공부도 전교 1등이에요”
“대단하네. 아무래도 오늘 내가 한턱 쏘아야겠네. 성심이 생일에다가 재희도 만나고.”
까르르 웃는 여자아이들은 마냥 즐겁다.
성심이 친구들이 준비한 생일 케이크에 진희가 내어 온 함박스테이크와 톡 쏘는 칵테일, 바나나, 파인애플이 담긴 과일 바구니가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다들 깔깔대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재희가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이려 하자 진희는 성심에게 넌지시 물었다.
“오늘은 날도 날인데. 내가 좋아하는 동생도 마침 여기에 왔는데 같이 동석하면 안 될까? 내가 보증하는데 정말 착한 아이야.”
성심은 재희를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재희는 이런 분위기가 처음이라 어색했지만, 성심이 생일을 축하해주려고 온 자리인 만큼 성심이 기분을 맞춰 주고 싶었다.
“너 좋은 대로 해.”
“언니! 그러면 오라고 해. 이 앞자리에 앉으면 되겠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지수는 깔깔대며 좋아한다. 정열을 데리러 간 진희는 정열의 팔을 붙잡고 난리가 났다.
“애! 저 앞에 보이지. 눈처럼 예쁜 여자애. 나도 여자지만 저렇게 예쁘게 생긴 애는 처음이야. 공부도 전교 1등이래. 잘해봐. 누나가 밀어줄게.”
진희는 진심으로 두 사람이 잘되길 바랐다.
“이 친구는 이정열이고, 경남고등학교 2학년.”
“이정열입니다. 반갑습니다. 괜히 즐겁게 노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애는…참, 어른처럼 말하고 있네. 여긴 다 동갑들이야. 편하게 친구 해.”
재희가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이는데 정열은 가슴이 막 뛴다. 재희의 가느다란 흰 손을 보자 천사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성심은 재희를 콕콕 찌르며 신호를 보냈다. 재희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진희 언니가 오늘 두 사람을 소개해 주자는 제안에 성심은 재미있어 죽는 줄 알았다. 공부만 하던 단짝 재희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궁금했다. 재희는 접시에 케이크를 담아 정열이 앞에 놓아주었다.
“드셔 보세요.”
“잘 먹겠습니다.”
둘의 표정을 살피던 진희와 성심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보고 눈을 찡긋거렸다. 이때 근처 테이블에 있던 일행들이 인사를 하러 왔다.
“이제 저희는 가겠습니다. 형님, 오늘 고마웠습니다.”
“그래, 조만간 다시 보자.”
일행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혀 정열에게 인사를 하자 정열은 재희 앞이라 쑥스럽고 난처했다.
“왜들 이래, 어서 가. 조심들 하고.”
정열은 혹시 재희가 자기를 어떻게 볼까 전전긍긍이었다. 그런데 재희가 갑자기 물었다.
“혹시, 깡패예요?
“네?”
“아니? 무슨, 제가…”
[팩션소설'블러핑'56]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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