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건축가 김원의 세상 이야기(18) 꿈의 바이칼-①

[K-VIBE] 건축가 김원의 세상 이야기(18) 꿈의 바이칼-①

연합뉴스 2024-12-05 16:43:26 신고

3줄요약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김원 건축가 김원 건축가

건축환경연구소 광장제공, 사진가 김중만 작품

20년도 더 전에 바이칼호에 다녀온 적이 있다. 바이칼 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아서 글을 쓸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그 아름다운 기억이 다 식어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 조금씩이라도 기억나는 대로 적어 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다.

바이칼호 바이칼호

연합뉴스 자료사진

◇일의 시작

모 선배가 점심을 먹다가 지나가듯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바이칼에 갑니다."

다른 이야기들 사이에 섞여 내 귀를 스친 그 한마디에 나는 소스라쳐 놀랐다.

바이칼, 바이칼! 나는 내 귀를 잠시 의심했다. 아니, 이 선배는 정말로 그 바이칼을 지금 말하는 것일까? 그 환상의 호수를? 부랴트 코리족 신화의 고향을? 그 바다처럼 끝도 없이 넓은 호수의 맑은 물 밑을 들여다보는 일을 지금 말하는 것이라고?

"아니 정말이에요? 지금 바이칼이라고 하셨어요?"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선배의 눈은 이미 아주 먼 곳으로 향해 있으면서 나더러 그 눈길을 따라오라는 듯이 말을 아낀다.

"아, 그냥 뭐 시원하다니까, 이 삼복더위에 아침저녁 13도에서 18도라니, 시원하지 않겠어요?"

나는 속이 타서 자꾸 캐묻는다. 내가 잘 알듯이 내가 이렇게 속 타는 일은 드물다. 그러고서야 미주알고주알 실마리가 풀린다. 선배는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투다.

아주 짧은 여름 동안 그래도 조금 편하고 쉽게 바이칼을 볼 수가 있어서 사람을 모았다는 것.

물론 그 기간이 지나면 일찍 몰려오는 혹한과 불규칙한 날씨 때문에 그 지방 여행은 어렵다. 그것도 우리 국적 대한항공의 전세기로 왕복이라니. 나는 갑자기 자세를 낮추었다.

"지금이라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나는 목이 좀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아, 김 선생이라면 대환영이지요. 다른 분들도 다들 좋아할 것이고."

그분은 선배 같지 않게 이렇게 항상 깍듯하다. 그러면서 역시 내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투다. 이제 조금 마음이 놓이고 가라앉으면서 생각이 정리된다.

나는 바이칼에 가기 전 거의 20년 이상 그곳에 가보려고 했다. 이제 설명하겠지만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은 '부랴트 코리족의 신화'에 대해 알고 나서서였다.

백조와 사냥꾼 이야기를 몽골리안 여러 부족의 것들과 비교분석을 한 어떤 책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오래전 뉴욕의 인류학 박물관에서 본 고(古)인류의 이동 경로를 그린 세계지도 한 장, 거기에는 바이칼에서부터 두 개의 화살표가 출발해서 하나는 베링해를 지나 알래스카 에스키모, 북미 인디언, 중남미 인디오까지를 관통해 놓았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남으로 내려와 만주와 한반도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해에 나는 멕시코에 갈 일이 있었는데 현지에서 산 무덤의 부장품이라는 토기편들을 담아 온 밀짚으로 만든 작은 광주리를 보고 집사람이 한 말이 나를 놀라게 했다.

"이건 언제 가져갔지요?"

마치 서울의 남대문 시장이나 담양의 죽세공 시장에서 금방 본 듯한 그 광주리는 멕시코 인디오들이 만든 것인데 재료와 색상과 그 배합과 짜임새가 완벽히 우리 것이었다.

나는 멕시코의 시장에서 만난 아저씨가 몽고점을 가졌을 거라 믿으며 언젠가 바이칼에 가면 그런 우리 사촌들을 보리라 믿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곳에 가는 일은 아주 어려웠다. 한동안은 물론 전혀 불가능한 꿈이었고, 근래에 교통은 뚫렸으되 불편함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가 바이칼을 갔던 당시에 그곳에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이래야, 서울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비행기로 가서 비행기나 열차로 이르쿠츠크에 가는 방법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에서 몽골의 울란바토르로 가서 역시 기차나 비행기로 이르쿠츠크로, 그도 아니면 서울에서 노보시비리스크까지 가서 비행기를 갈아타거나 중국의 선양에서 아에로플로트(구 소련 국영항공사 비행기)를 타고 가는, 아주 불편한 방법뿐이었다.

소련 에어로플로트 전세기 소련 에어로플로트 전세기

(서울=연합뉴스) 박강남 기자 = 88 서울 올림픽에 참석할 선수단을 태운 소련 국영 항공사 에어로플로트 전세기가 처음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1988.9.5 (끝)

오래전에 어떤 젊은 여인은 속초에서 20시간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거기서 시베리아철도로 이르쿠츠크까지 갔다고 했다. 그것도 다 혼자서 계획하고 실행까지 했다니 여행사의 도움을 받았을 리가 없다.

인천공항에서 국적기인 대한항공의 전세기를 타고 이르쿠츠크까지 직항로를 왕복할 수 있다니, 그렇게 편하고 빠르고 싸게 가는 방법은 없다. 나는 갑자기 그 선배가 그 전보다 존경스러워졌다.

아, 이분들이 오래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선인을 위한 망향의 탑을 세웠었다. 그 어려웠던 일제 강점기 그 혹한의 땅까지 끌려가서 노역에 시달리다 좋은 인생 다 망치고 그러고 나서야 일본 패망의 소식을 듣고 기뻐 날뛰었을 것이다.

그들이 항구에 나가 귀국 선편을 기다리다가 왜놈들의 배가 조선인들은 모두 제쳐 놓고 일본인들만을 싣고 항구를 떠날 때 그 언덕에 주저앉아 가슴 치며 분통 터지던 그 영혼들을 달래어야 한다며 스스로 돈을 걷어 그 분통 터지는 언덕에다 위령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그 탑의 조각을 스스럼없이 맡았던 서울대 미대 최인수 학장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말을 아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자랑스럽게 수다를 떨지 않더라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망울은 멀리 북쪽을 향해 가물거리는 듯했다.

우리는 북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마음이 약해진다. 고구려 이야기가 그렇고, 몽골의 초원이 그렇고, 그중에도 바이칼이 특히 그렇다. 나는 부랴트의 신화에 관해 쓴 책을 오래전에 읽으면서 더욱 그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 전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의 오리지널이라는 '백조와 사냥꾼'의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날 바이칼의 맑은 물에 백조 세 마리가 하늘에서 날아와 날개를 벗어놓고 목욕했다. 그런데 이를 숨어보던 사냥꾼 하리도이(부랴트족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가 가장 아름다운 백조의 날개를 감춘다.

목욕을 마친 백조들이 다시 하늘로 날아갈 때 날개를 잃은 백조는 혼자 남겨진다. 백조는 사냥꾼과 결혼해 열한 명의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그 아들들은 장성하여 부랴트 열한 부족의 지도자들이 된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어느 날 백조는 남편에게 자기 날개를 한 번만 보여 달라고 조른다. 남편은 방심한 채 감추었던 날개를 내어준다. 그러자 백조는 그 날개를 입고 하늘로 돌아간다.

신화에 관한 비교 연구를 냉철하게 쓴 이 학술 논문을 읽으면서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 아름다운 백조의 오랜 세월에 걸친 고통과 인내에 가슴이 쓰려왔다. 그때의 그런 마음가짐으로 러시아연방 부랴트 자치공화국의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대한항공기에 올랐다.

서북쪽으로 네 시간을 갔다. 우리와 한 시간 시차가 있다지만 그쪽의 서머 타임으로 시간은 같다. 우리와 국교도 없었던 1986년에 처음 일본인 관광객을 가장하여 모스크바를 잠시 몰래 본 후, 1990년 이후 내가 러시아연방의 주한국대사관을 설계하게 되면서 이 나라를 열 번 가까이나 다녔다.

시베리아 쪽은 처음인 데다가, 여긴 중심부와는 아주 멀리 떨어진 거대한 대륙 국가의 다른 한쪽 끝이라, 아직도 사회주의 소비에트연방의 분위기가 남아 있기라도 한 듯 공항의 입국 수속은 20년 전과 똑같이 두 시간을 넘겼다.

◇ 이르쿠츠크의 옛날이야기

바이칼 호수 지나는 유라시아 친선특급 열차 바이칼 호수 지나는 유라시아 친선특급 열차

(이르쿠츠크<러시아>=연합뉴스) 김도훈 기자 = 19일(현지시간) 오전 유라시아 친선특급 열차가 러시아 이르쿠츠크의 바이칼 호수를 지나고 있다. 바이칼 호수의 길이는 636km, 평균 너비는 48km로 그 면적은 한국의 1/3에 달한다. 2015.7.19 superdoo82@yna.co.kr (끝)

누구든지 춘원 이광수의 소설 '유정'에 나오는 여주인공 남정임을 기억한다. 정임은 아버지와 같은 최석을 찾아 봉천, 하얼빈, 만추리, 그리고 흥안령을 넘어 이르쿠츠크까지 지고지순의 사랑 여행을 떠났다. 말이 끄는 썰매 마차를 타고 숲속의 통나무집을 찾지만, 병이 위중했던 최석은 숨을 거두고 정임도 병든 몸으로 그곳에 남는다.

N(작중 최석의 친구로 소설의 1인칭 화자)은 정임이 죽었다는 기별이 오면 이르쿠츠크에 가서 둘을 가지런히 묻고 '두 별 무덤'이라는 비석을 세워 주리라며 소설이 끝난다.

내 기억에 소설의 무대인 이르쿠츠크에 대한 춘원의 묘사는 아주 사실적이다. 여기 와보지 않고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 그런 글을 쓰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었다.

1933년에 이 소설이 나왔지만, 그 이전에도 항일독립운동을 하던 조선인의 행적이 이곳에 있다. 1921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멤버들인 이곳 귀족 회의장 건물에서 고려공산당 창립총회를 열었다. 지금 그 건물은 극장과 레스토랑으로 쓰인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도 시베리아 샤먼에 관하여 '살만교 차기'(薩滿敎 箚記)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등 몇 논문을 쓴 적이 있다는 사실은 이야기로만 들었다. 육당은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중 단군신화가 바이칼 부근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영웅 게제르의 웅대무비한 서사신화에 관련해 그 얼개가 똑같음을 지적했다.

그는 '단군'이 天과 巫를 동시에 의미하는 몽골어 '탱걸', '탱그리'라 하고 우리말로 무당을 의미하는 '당굴'이라고 풀이했다.

훗날 김재원 박사도 '단군신화의 신연구'(1947)에서 단군신화는 북방계 샤먼교의 사상이며 이로써 조선 민족의 근간은 북방계 유목민으로 인류학상으로는 퉁구스라고 썼다. 하여튼 일찍부터 이곳은 우리와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작지만 아름다운 도시, 이르쿠츠크에 관한 아름답고 마음 아픈 이야기는 182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반정부혁명을 일으켰던 '데카브리스트'들에 관한 이야기다. '데카브르'가 러시아 말로 '십이월'이니까 '데카브리스트'란 '십이월 혁명당원'이라는 뜻이다.

1812년 9월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침공했을 때 모스크바 입성에 성공은 했으나 모스크바시의 대화재로 폐허가 된 겨울의 도시에서 오랜 장정의 피로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한다.

러시아군은 그들을 파리까지 뒤쫓아가 파리를 점령하고 그 전과로 폴란드를 얻게 된다. 그때 이 전쟁에 참여했던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은 파리의 문화와 자유로운 공기에 흠뻑 젖어 돌아왔고,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직시하게 된다. 차르가 휘두르는 원시적인 절대권력, 농노제도가 존재하는 대부분 국민의 피폐한 인권상황이 모두 겹쳤다.

전제정치와 농노제의 폐지를 주장하며 1825년에 거사한 그들은 당시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에게 저항했다. 혁명군 3천명이 모두 잡혔고 장교 600명 전원이 황제의 직접 심문을 받은 후 다섯 명이 교수형에 처하고 120명이 시베리아로 유형된다.

약간은 낭만적이었던 귀족 가문의 청년 장교들은 바이칼 근처에서 손과 발에 22㎏의 쇠고랑을 차고 대체로 7년에서 8년에 달하는 강제노동의 징역을 치러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주일 미사에 갈 때와 그 준비로 목욕할 때만 쇠사슬이 풀렸고 일할 때나 잠을 잘 때에도 묶여서 지내야 했다.

비행기 속에서 읽은 이 데카브리스트들의 부인들 이야기는 한동안 나를 울렸다. 황제는 부인들에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선의를 베푼다. 반역자인 남편을 버리고 재가하면 귀족의 신분을 유지해 주겠다. 아니면 남편을 따라 유형지에 함께 가도 좋다. 그 경우 귀족의 신분과 특권은 박탈된다.

젊은 장교 중 결혼했던 기혼자들의 젊은 귀족 부인 열 한 명이 후자의 참혹한 길을 선택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는 밤낮을 쉬지 않고 40일 동안 썰매를 달려야 하는 거리다.

그리고 첫 번째로, 당당히 남편을 따라가겠노라고 황제에게 선언하고 머나먼 형극의 길을 떠나 이곳에 도착한 장교의 아내가 예카테리나 트루베츠카야였다. 황제도 무시하기 어려운 귀족 집안의 딸이며 며느리였다.

그러나 이 열녀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해서도 이곳 총독이 그 신병 처리를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따로 가뒀다가 그때야 모스크바에 그 처리 문제를 질의했고 니콜라이 1세는 이에 직접 명령문을 보낸다.

여섯 달이 지나서였다. 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트루베츠카야는 귀족이지만 아무 재산도 가져갈 수 없으며 다른 데카브리스트 부인들과 똑같이, 다른 죄인, 불량배들과 똑같이 취급하라. 특별히 법의 보호를 베풀 필요가 없으며, 그 신상에 위험이 오더라도 개의하지 말라.

2. 데카브리스트들이 유배 중 아이들을 낳으면 부모와 같은 신분을 주되 그 지방 농부들과 같이 취급한다.

3. 만약 이들이 이르쿠츠크를 떠나 더 멀리 동쪽으로 가려 하면 허락해 주되, 노예와 하녀들은 두고 가야 한다.

4. 일단 이르쿠츠크를 떠나고 나면 러시아로 돌아올 수 없다. 황제가 특별히 허가한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트루베츠카야는 이 조건들을 수락한다는 서명을 하고서야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유명한 시로 우리와도 친숙한 시인 푸시킨이 그들과 연락을 취하며 기록을 남겼다. 1827년 2월 8일, 남편을 만난 아내 트루베츠카야는 남편의 발에 엎드려 울었다. 그는 남편의 발목에 채워진 쇠사슬에 입을 맞추고 난 후 남편을 껴안고 키스했다. 가족사진을 남편에게 건네주며 그는 "이제 나는 희망의 나라에 왔어요"라고 말했다.

자식들조차 페테르부르크에 버리고 나중에, 이곳에 온 귀족 부인들은 험악한 상황에서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중죄를 지은 남편들과 같이 살 수 없었다. 이틀에 한 번씩 돌아오는 잠시의 면회 시간이 그들 부부에게 주어지는 시간의 전부였다. 게다가 그들은 아직 해보지 않았던 살림살이를 직접 해야 했고, 수공예품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영위하면서 남편들의 옥바라지도 해야 했다.

그중에 어떤 이는 이런 최악의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죽기도 했고 그 남편조차 그리움에 지쳐 아내의 제삿날인 일 년 후에 아내를 따라 죽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인간 최악의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7∼8년의 형기를 마친 죄수들은 이르쿠츠크 주변에서 가족과 여생을 보내면서 이 도시를 낭만의 도시로 꾸며간다.

그들이 젊은 시절 꿈처럼 바라보았던 프랑스의 파리를 기억하면서. 그래서 오늘날, 이 도시를 시베리아의 작은 파리라고 부른다. 슬픈 이야기다.

푸시킨은 1827년 1월에 다음과 같이 동조, 고무, 찬양하는 시를 써서 이들에게 몰래 보냈다.

시베리아 깊은 탄광 속에서

너는 자랑스럽게 명예를 지켜라

이 고통은 헛되지 않을 것이고

반항자의 가슴은 꽉 차 있다

불행의 신실한 누이

희망은 암흑의 지하로부터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리니

그 날은 오고야 말리라

사랑과 우정이 그대들에게 임하리

깜깜하게 닫힌 곳의 빗장을 풀고

지금 그대들의 감방인 그 탄광 속으로

내 자유의 소리가 다다르듯이

쇠사슬은 끊어지리라

감옥도 신념 앞에 열리고

자유가 네 앞에 비칠 것이니

형제들은 너에게 칼을 주리라

훗날 톨스토이는 이 데카브리스트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전쟁과 평화'를 쓴다. 소설 속의 주인공 안드레이 발콘스키 백작은 실제로 톨스토이의 숙부인 데카브리스트 세르게이 발콘스키를 묘사하고 있다. 실재 인물이었던 발콘스키의 집은 당시의 이르쿠츠크 인텔리들이 토론과 시 낭송, 음악회를 위해 모이던 장소였고 지금도 그대로 남아 연극과 문학의 밤이 열린다.

영화 '전쟁과 평화' 국내 개봉 포스터 영화 '전쟁과 평화' 국내 개봉 포스터

바이칼호의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르쿠츠크는 부근에서 가장 크고, 잘사는 도시이고, 그래서 바이칼에 가려면 비행기는 꼭 이곳 공항을 거쳐야만 한다. (계속)

바이칼호 바이칼호

연합뉴스 자료사진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국립국악당·통일연수원·남양주종합촬영소 등 설계. ▲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 한국인권재단 후원회장 역임. ▲ 서울생태문화포럼 공동대표

* 자세한 내용은 김원 건축가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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