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는 방송국 EBS에서의 사회생활 시작
이승환: 소개 좀 부탁드리옵니다.
한송희: EBS 한송희 PD입니다. EBS에는 95년 입사했습니다.
이승환: 어쩌다 EBS에 입사하게 됐지요?
한송희: 제가 졸업할 때 언론사 인기가 꽤 높았어요. 저 때도 <PD수첩>은 있었고, 단편적인 기사보다는 오랜 시간 이야기할 수 있는 PD가 되고 싶었죠. 그러다 덜컥 EBS 시험에 붙어 입사하게 됐는데, 막상 붙고 나니 교육방송의 가치가 저와 잘 맞더라고요. 근데 원래 교육부 산하에 있던 EBS가 2000년에 공사가 됐고, 노무현 정부 들어오며 언론의 자유와 함께 방송 다양성이 많이 높아졌어요.
이승환: 언론의 자유라면 어떤?
한송희: 사실 EBS <지식채널e>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 프로그램도 많이 나갔어요. 그때가 한미 FTA가 핫할 때였거든요. 물론 정부 입장에서는 FTA를 해야죠. 하지만 사회적 합의에서는 부족한 면이 있었죠. 그런 부분에 관해 비판들을 많이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한테는 규제가 거의 없었어요. 아예.
이승환: 정말 아예 없었어요?
한송희: 아니, 생각해 보니 하나 있을 수도 있는데 규제라고 보기엔 좀 애매하기도 해요.
이승환: ……
한송희: 그 하나 말고 99%는 개입한 적이 없었어요.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의 자유에 신념이 있지 않았나 합니다. 아무튼 EBS가 ‘교육방송’ 이잖아요? EBS의 활동 근거가 되는 ‘한국교육방송공사법’이 있는데요. 여기에 따르면 EBS는 1) 학교 교육 보완, 2) 평생교육, 3) 민주적 교육 발전, 이렇게 3가지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EBS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었죠. 참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방송국이라 생각합니다.
국민을 위한, 공영성을 지키는 방송국의 중요성
이승환: EBS에 입사해 처음 만든 프로그램은 무엇이었나요?
한송희: 처음 입사할 때는 대학교 소개 프로그램, 중학교 사회 등을 만들었죠. 그때는 EBS가 채널이 하나뿐이라 프로그램 다양성이 높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위성 방송 개국으로 채널 수가 늘어났죠. 위성 채널에 입시 관련 교육을 몰아넣는 효율적 편성으로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교양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게 됐죠.
이승환: EBS 재정이 별로 안 좋은가 보군요.
한송희: 그렇죠. 국민이 내는 수신료 중 EBS로 오는 건 약 3%가 안 됩니다. 그 예산이 EBS 전체의 7% 정도밖에 안 돼요. 그밖에 여러 정부 지원을 받지만, 그래도 EBS의 공적 재원은 30%가 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능 사업 등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죠. 근데 이것도 e러닝은 무료고 교재 판매 정도인데 매출도 학령 인구 감소 추세로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승환: EBS 좋은 입시 강의들 많은데 e러닝 유료화하면 되지 않나여?
한송희: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선 정부가 해야 할 교육 평등 업무를 대신하는 거라, 그렇게 수익성을 추구해서도 안 되고요. 애초에 EBS라는 조직 자체가 그 자체로 공공의 이익에 우선하기 위해 있는 조직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명의>라는 프로그램을 맡은 적이 있어요. 대한민국에 각 분야마다 이름 있는 훌륭한 의사 선생님들을 모셔, 어떻게 건강을 챙겨야 할지 굉장히 깊이 파헤친 프로그램이에요.
이승환: 아, 네. 저 유튜브에 엄청 뜨더라고요.
한송희: 네. 그 프로그램도 협찬을 전혀 받지 않아요. 많은 다른 방송사들이 의사나 병원을 간접적으로 홍보하잖아요? 아마 적지 않은 돈이 될 겁니다. 하지만 EBS는 공영 방송이고, 절대 상업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유혹이 많았지만, EBS까지 그런다면 그 프로그램 접어야죠. 아마 KBS의 <생로병사의 비밀>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이승환: 뭔가 되게 딜레마네요. 좋은 소재는 돈을 벌 수 없는.
한송희: 그래도 누군가는 EBS 입시처럼 돈 없어도 공부할 수 있게 해주고, 명의처럼 정보의 객관성을 잡아줘야지요. 그래서 정치권에서의 시각이 중요합니다. 정치권이 공영 콘텐츠의 가치를 인정하면, 방송국은 공영 콘텐츠 제작에 몰두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런데 자꾸 공영 콘텐츠를 서로 이념성으로 재단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비단 저희 방송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 같아요.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지식채널e>
이승환: 그러면 EBS가 댜앙성을 갖춘 이후는 어떤 프로그램을 제작하셨나요?
한송희: 처음에는 어린이용, 청소년용 드라마도 만들고 많은 걸 했죠. 그러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지식채널e>예요. 당시 편성 책임자였던 김봉열 선배가 <세계 테마기행> 등 EBS 다양성에 많이 기여했는데 그 선배가 지식채널e도 기획했어요. <지식채널e>는 저와 김진혁 PD가 제작을 맡았습니다.
이승환: <지식채널e>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한송희: 처음 시작은 방송사의 좋은 이미지를 위해 방송 중간에 나가는 홍보용 토막광고(SB) 있잖아요? MBC 같으면 “만나면 좋은 친구~” 하는 거. 그때 캐나다에 온타리오 방송국에서 특정 프로그램의 예고편, 프리뷰 형태로 자사를 홍보하더라고요. 그러면 우리가 이를 더 발전시켜서 아예 5분짜리 정규 프로그램으로 해보자, 한 거죠.
이승환: EBS를 위한 광고 홍보용 프로그램? 이었다니, 시작이 독특하네요.
한송희: 홍보용이라 하기는 뭐하고, 약간 EBS의 정체성을 대표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는 생각했죠. 실제로도 그런 역할을 좀 했고 <다큐프라임>의 탄생에도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식채널e> 5분이 <다큐프라임> 50분이 된 거죠.
이승환: 당시에는 여러모로 파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송희: 시대를 좀 앞서간 거죠. 지금이야 릴스에 쇼츠에 짧아야 한다고 경쟁이지만, 당시 5분이라는 짧은 시간의 프로그램은 굉장히 파격적이었어요. 실제 당시, 본방의 반응도 좋았지만 다음 날 어디 블로그 보면 캡처본이 조회수 10만 가까이 찍고 바이럴이 많이 됐죠. 사실 자막과 음악, 이미지를 활용한 형식 자체는 이전에도 있었어요. 처음은 아니죠. 그만큼 대본, 편집, 음악, 하나하나 참여한 분들이 엄청 디테일에 신경 써서 나온 결과물이죠.
이승환: 특히 신경 쓴 게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한송희: 디테일은 함께 하는 수많은 스태프들의 역할이었고, PD 입장에서는 ‘다양성’이 첫번째였어요. 일반적인 다큐와 달리 시사, 과학, 사회, 인물 등을 경계 없이 오갔죠. 이 역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시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 중시한 키워드는 ‘반전’이었습니다. 짧은 5분간 어떻게 강렬한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한번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반전의 메시지를 던져보자. 그런 면도 시청자들에게 어필한 것 같습니다.
공영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이 중요
이승환: <지식채널e>가 이슈가 되고 대박 나면서 승진을 하고 했나요?
한송희: EBS는 그런 거 없어요. 특별한 승진 같은 건 없고, 회사에서도 그냥 좋게 봤죠. 저희는 위로 올라가려는 경쟁보다는 전문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다들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려 하죠. 그런 구성원이 함께 있는 공동체가 참 좋은 것 같아요. 이후 저는 자연스럽게 <다큐프라임>에 발을 얹게 됐습니다. <지식채널e>는 2차 자료를 사용해야 해서 갈증이 좀 있었는데, <다큐프라임>은 1차 자료를 직접 촬영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승환: 말씀 들어보니 <지식채널e>가 약간 교양 유튜브 원조 같기도…
한송희: 요즘 유튜버들 영상 너무 잘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유튜버만 해도 성실하게 자료 조사해 더빙하는 영상도 훌륭하지만, 직접 경험을 찍고 편집한 그 매력은 완전 별개잖아요? 그래서 저도 이후 여러 <다큐프라임>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햄버거 커넥션>이라는 환경 다큐멘터리였어요. 햄버거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소가 필요하잖아요? 그 소를 키울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 열대우림을 벌목해 엄청난 규모의 농장을 만들거든요. 브라질과 멕시코까지 가서 그 현장을 촬영해왔죠.
이승환: 제작비가 엄청나게 들어갔겠군요.
한송희: 당시 EBS에서 정책적으로 <다큐프라임> 제작비로 5천만 원을 책정했어요. 당시 MBC 같은 지상파에서 다큐에 3천 정도를 책정할 때였거든요. 그런데 <다큐프라임>은 1회에 끝나지 않고 2회 이상도 많았어요. 3회 촬영이면 1억 5천 제작비를 들인 거죠. 그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파격적인 제작비였죠.
이승환: EBS가 다큐를 잘 만드는 데에는 그만큼 예산 투입도 있군요.
한송희: 그렇죠. 당시 편성기획부장이 지금 김유열 사장인데, 재활용 방식으로 예산을 잘 활용했어요. 돈을 확 몰아붙여서 한 편의 다큐를 만들면 여러 번 방송하는 거죠. 그리고 ‘제작의 자율성’도 큰 역할을 했어요.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자율성이 있으면 세련된 콘텐츠가 나옵니다. 자율성이 곧 콘텐츠의 힘이죠. 그래서 정부나 국회보다도 EBS 콘텐츠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승환: 사회적 시각이요?
한송희: 네. 공공성을 갖춘 콘텐츠가 중요하다, EBS는 이런 콘텐츠를 만드는 곳이다, 이런 거죠. 사실 영국 BBC는 광고도 없고 수신료 비중이 60%가 넘어서 국회 눈치 안 보고 작품을 만들 수 있어요. 저는 그래서 <그레이트 마인즈> 같은 프로그램이 중요하다고 봐요. 당장 시청률을 떠나 사람들의 동의를 이끌어내잖아요. 이런 공영성을 가진 방송, 그리고 이런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송국이 필요하다는.
대가의 메시지뿐 아니라 삶도 배울 수 있는 <위대한 수업>
이승환: <위대한 수업>은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는지요?
한송희: 23년 2월 합류했습니다. 코로나가 끝난 뒤라, 그나마 좀 촬영이 수월했어요. 코로나 때는 해외에 촬영하러 가며 정말 고생 많이 했거든요. 저 이전에 했던 후배 PD님들이 세팅도 잘해뒀고요. 석학분들도, 그분들이 다루시는 내용도 너무 좋아서 아주 행복하게 촬영했습니다. 촬영하면서 많이 배우기도 했고요.
이승환: 무엇을 배울 수 있었나요?
한송희: 내용도 너무 좋은데 삶의 자세랄까요. 모든 선생님들이 자기만의 어떤 독특하고 훌륭한 자신만의 세계가 엿보였어요. 예로 동화작가 앤서니 브라운은 뜨기 전까지 되게 고생 많이 하셨어요. 그러다 뒤늦게서야 시민들한테 사랑을 받게 되기 시작했는데, 그 긴 시간 포기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거죠. 그분 나이가 80이 다 되어가는데도 왕성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게 너무 부럽더라고요.
이승환: 찾아보니 46년생이네요. 정말 대단합니다.
한송희: 36년생이신 켄 로치 감독님은 더 대단했어요. 감독님은 리얼리즘을 강조하고 인위적인 세팅을 싫어했어요. 보통 저희 강의는 관객 없이 좀 있어 보이는 무대 세팅하고 한번 촬영하고 끝이거든요? 근데 그런 거 싫다고 화려한 무대보다는 실제와 같은 강의장 하나 빌려서 한국인 방청객 30명 부르라는 거예요. 한국 방송이니 한국인을 위해 자기 영화 강의를 하겠다고 한 거죠.
이승환: 모이던가요;;;
한송희: 감독님 팬이 많아서 그런지 엄청 금방 모이더라고요. 당시 시험기간이라 학교 건물을 못 빌려서 실제 강의장인 아프리카 문화원을 빌렸어요. 다른 무대와 달리 좀 작아서 ‘있어’ 보이지 않는 곳이었죠. 감독님은 메이크업도 안 하셨어요. 자기는 영화 찍을 때도, 상황에 맞게 자연스럽게 촬영하는 걸 선호한다면서요. 근데 강의장에서 전혀 권위적이지 않고 열정적이셨어요. 젊은이들과 친구처럼 농담도 잘하시고요. 마치 10대 20대 젊은이 느낌이었죠. 방청객들도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이승환: 그런 분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인생의 영광이겠네요.
한송희: 맞습니다. 앤서니 브라운도 그렇고 켄 로치도 그렇고, 우리 대부분은 그분들의 작품만 접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이 외국에 있어서 그렇지, 사실은 그렇게 나이를 드시고도 세상과 활발히 소통하고 있는 거죠. <위대한 수업>이 단순히 그분들의 생각뿐만 아니라, 삶까지도 전달할 수 있는 창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위대한 수업>이 한국 사회의 도전에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
이승환: <위대한 수업>을 촬영할 때 신경 쓰는 점이 있다면?
한송희: 있는 그대로 담으려 해요. 콘텐츠가 약간 재미없더라도, 석학들의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처음엔 대중성을 위해 다른 방법도 고민했지만, 사람들이 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분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요.
이승환: 그래도 소위 편집빨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한송희: 그건 PD가 주도할 때에 가능한 일이고요. 그분들은 저희가 터치하기 쉽지 않아요. 그리고 대부분 강의를 거의 완벽하게 준비해 옵니다. 물론 케바케로 좀 이슈가 있을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추가 인터뷰로 전환하거나 하면 돼요. 물론 후반 작업 때 다양한 방식으로 편집합니다.
이승환: 근데 저도 좀 봤는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게 좀 있더라고요.
한송희: 음… 저는 원래 공부는 재미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석학들의 강의라는 게 쉽고 재밌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희도 대중성 측면에서 여러 방식을 고민해 봤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지만, 기존의 1인 강의 방식이 오히려 <위대한수업>만의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쉽게 설명하는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세계적인 석학이 강의하는 걸 볼 기회는 별로 없으니까요. 매주 하나씩 나오는 강의를 10년 간 축적하면 엄청난 브랜드가 될 거라 생각해요.
이승환: 마지막으로, 앞으로 위대한 수업이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한송희: <지식채널e>이나 <다큐 프라임>이 EBS 이미지에 큰 기여를 했어요. 교육방송의 정신과 잘 맞아서 좋은 콘텐츠가 되었죠. <위대한 수업>도 그런 의미에서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이승환: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한송희: 그리고 나아가서 <위대한 수업>이 한국 사회에 좀 더 문제의식을 던질 수 있는 방송이 됐으면 좋겠어요. 한국이 굉장히 열심히 하고 캐치업은 잘하는데, 우리만의 뭔가를 독자적으로 세우는 건 좀 약한 것 같아요. <위대한 수업>에 나오는 분들이 한 분야에 새로운 획을 그은 분들인 만큼, 한국 사회가 더 도전적인 새로운 뭔가를 제시하는데 <위대한 수업>이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위대한 수업〉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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