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배우 주지훈이 찾는 섬광 같은 찰나.
<지배종>부터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에 이어 <조명가게>까지, 주지훈 배우가 참여한 작품이 올해만 네 편이 공개된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듯한데 어떤가?
언제부턴가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르겠다. 작품이 나오면 홍보 활동하고, 그와 동시에 차기작 준비하며 운동한다.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뭐, 쉬는 날이 없다.(웃음)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주어 고맙다. 12월 4일에 조명 가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다루는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조명가게>가 공개된다. 이 작품에 함께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강풀 작가님 웹툰이 원작인데, 작가님의 만화를 보며 자란 세대라 큰 고민이 없었다. 게다가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에서 만난 희원이 형(배우 김희원)이 감독을 맡았다. 대본을 주셔서 읽어봤는데, 조명 가게를 매개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어진다는 소재 자체가 흥미로웠다. 대본만 봐도 좋다고 느껴지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거나 감독과 이해한 부분을 맞춰가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명가게>는 전자에 해당한다. 한 입만 먹어도 누구나 맛있어 하는,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라면 같달까.
김희원 감독과의 호흡은 어땠나?
배우로서 대화할 때도 희원이 형이 감독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신이나 대사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전반적 흐름을 조망한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그런 부류인지라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레 친해졌고, 기본적으로 그를 믿었다. 실제로 촬영해보니 그는 아주 성실한 감독이었다.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정시에 출퇴근했고, 촬영이 한 회차도 밀리지 않았다. 감독으로서 첫발을 내디딘 셈인데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흥행 여부와 관계없이 이 부분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김희원 감독이 “<조명가게>를 통해 지금껏 본 적 없는 주지훈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주지훈의 새로운 모습’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어느 날 희원이 형이 “너 여기서 연기 변신을 할 거야. 그동안 자신을 분출하는 센 캐릭터만 해왔잖아”라고 말하더라. (<조명가게>에서) 내가 연기한 ‘원영’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무뚝뚝한 캐릭터거든.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순간 긁힐 뻔했다.(일동 웃음) 왜냐하면 난 정적인 인물들도 연기해왔거든. 하지만 희원이 형이 모른다는 건 그걸 못 본 대중 역시 많다는 뜻이지 않나. 흥행하지 못한 게 잘못이나 실패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동료를 통해 다시 한번 배우는구나 싶었다.
배우는 결국 대중에게 자신을 보여줘야 하는 직업이지 않나. 나의 성취감과 외부의 평가에 차이가 있을 때, 그것을 분리해 생각하는 일이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쉬워지기도 하나?
전혀. 여전히 어렵다.(웃음) 심지어 흥행했더라도 대중이 좋아한 이유가 우리가 예상한 것과 다를 때도 많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이유는 결국 더 많은 사람과 그것을 나누기 위해서이지 않나.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결과를 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궁> <아수라> <암수살인> <킹덤> <신과 함께> <하이에나> <비공식작전> <조명가게>…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와 드라마를 종횡무진하며 많은 작품에 참여했다. 주지훈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장르나 소재를 가리지 않고 도전하는 데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어릴 때부터 배우로서 어떤 이미지를 가지거나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배우니까 어떤 역할이든 충실히 잘하면 되지 싶었다. 그리고 이건 타고난 행운인데, 주변에 독특한 사람이 많았다. 다양한 가치관과 열린 생각을 가진 이들과 함께 살아오다 보니 작품을 선택할 때도 선입견이 없다. 남들이 ‘왜 해?’라고 생각하면 나는 반대로 ‘왜… 안 해?’ 이렇게 되는 거다.(일동 웃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그걸 따라갔을 뿐이다.
좋으니까 그냥 하는 것. 그게 주지훈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나 보다.
맞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전’이 내게는 ‘도전’이 아니었던 거지. 이게 특별히 훌륭하거나 멋진 일도 아니라 생각하고, 동료나 후배에게 나처럼 하라고 말할 수도 없다. 저마다 자기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내 방식이 모두에게 정답일 리는 없으니까. 그냥 각자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 가면 된다.
어느덧 데뷔 18주년이다. 처음 연기를 시작한 시절을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눈 앞이 캄캄했지.(웃음) 난 데뷔작 <궁>도 무서워서 3주간 못한다고 말했다. 감독님이 전화해서 “나 믿고 해” 하시길래 내내 욕먹으며 했다. 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스스로 너무 답답했다. 어딜 봐야 하는지 모른 채 카메라를 등지고 연기할 정도였으니까.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고, 또 무엇이 여전하다고 느끼나?
거울이나 모니터를 보면 내 모습은 분명히 늙어 있고, 사람들은 내게 어른답게 행동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안의 나는 열여덟 살 때와 다를 게 없다. 물론 격식에 맞게 차려입고 근사한 데 가서 좋은 것 먹는 재미도 알게 됐지만, 난 여전히 분식집 가서 맛있는 것 먹는 게 좋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며 아는 게 많아졌을 뿐이다. 욕먹고 싶지 않아서 공부를 많이 했거든.(웃음) 이제는 주변 환경을 읽을 줄 알게 되었으니 그 안에서 내가 도움이 되길 바라며 움직이는 게 전부다.
오랜 시간 연기 안에 머무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글쎄. 내가 마흔셋이 되어 여기 앉아 인터뷰하고 있을지 누가 알았겠나.(웃음) 돌이켜보면 매 순간 주어진 일들을 해나가기에 바빴다. 음… 그저 눈앞에 있는 일, 현재에 충실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연기란 액션과 리액션이 아니라, 리액션과 리액션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연기가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하는 일이기에 더욱 좋은 점도 있나?
지금까지 대략 40편의 작품에 출연했지만, 그럼에도 연기를 하다 보면 여전히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맞닥뜨리곤 한다. 촬영장의 분위기나 상대 배우와의 기류 안에서 온전히 집중할 때, 우연히 발현되는 어떤 순간. 스파크 터지듯 서로의 호흡이 탁, 탁, 탁 하고 맞아떨어지는 찰나. 그런 걸 마주하면 다 같이 ‘아아악…’ 하고 좋아서 쓰러지게 된다.(웃음) 그건 절대 재현할 수 없거든. 내가 상대 배우를 0.3초 동안 봤고, 125분의 1초 만에 리액션이 나갔다고 분석이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똑같은 감독, 배우, 스태프에게 다시 해보라 해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더욱 귀하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나는 이걸 현장에서 받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좋은 동료와 함께하면 이런 순간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유튜브 영상과 지난 인터뷰를 보니 작품 바깥의 주지훈은 동료의 좋은 점을 잘 발견하고, 그것을 주저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이더라. 이런 부분은 타고난 성정이라 느끼나?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많이 먹어서 주위를 잘 살펴야 했다. 직업이 배우인지라 오랜 시간 캐릭터를 분석하다 보니 의도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만나면 어떤 사람인지 자연스레 보인다. 걸음걸이가 어떤지,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은 어떻고, 표정을 어떻게 쓰는지… 가만히 보면 대강 감이 온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봐라. 남의 장점을 잘 본다는 건….
단점도 잘 보이겠지?
맞다.(일동 웃음) 그런데 그건 굳이 말 안 해도 괜찮으니까.
앞서 ‘배우로서 특정한 이미지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거의 없다’고 말할 때도 느꼈는데, 주지훈의 시선은 대체로 ‘나’의 바깥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하지만 자신을 중심에 두며 살아가는 게 가장 편하지 않나. 내가 아닌 타인에게 시선이 향하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물론 나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게 가장 쉽겠지.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내 것에만 집중할 거야’ 하는 태도로 연기하는 사람이 있어도 말릴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선배와 어른이 내 곁에 많다. 우리는 늘 서로에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지 않나. 내가 아닌 누군가를 살피고 도와주려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니 그걸 따라가려고 노력하게 되더라.
그렇게 나아가는 주지훈 배우를 보고 다른 이들도 좋은 영향을 받을 거라 생각한다. 마무리하며 <조명가게>의 상징을 빌려 질문을 건네고 싶다. 주지훈이 연기 속에서 찾고있는 ‘빛’이 있다면 그건 무엇인가?
언제부턴가 일과 삶을 전혀 분리할 수 없다고 느낀다. 무언가를 좋아하면 그게 일이든 아니든, 푹 빠지기 마련이니까. 나는 작품에 참여하면 기획 회의에 자주 들어가는 편이다. 다른 사람에겐 회의겠지만, 내겐 그냥 놀러 가는 거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좋아하는 일이니까. 작품 얘기 하면서 30분 농담하다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10분 일 얘기 하고. 그러다 누가 재미있는 이야기하면 같이 웃고. 열심히 일한 뒤에 맛있는 거 먹으면서 술 한잔하고, 허심탄회하게 수다도 떠는 거지.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 굴러가고 있다. 말하자면 그 시간들이 내가 찾는 빛이 아닐까. 심지어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동료와 함께하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물론 모든 과정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불안한 순간도 많지만.(웃음)
그럼에도 가끔 찾아오는 섬광 같은 찰나를 좇아 나가는 거겠지?
맞다. 그런데 사는 게 다 똑같지 않나? 우리가 간간이 행복하지, 계속 행복할 수는 없으니까.(웃음) 그래서 그 순간들이 더 소중한 거지.
최근 찾아온 ‘간간이’ 행복한 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때는 언제인가?
제주 해안도로에서 바이크를 타고 시속 40km 정도로 아주 천천히, 정처 없이 달린 것. 그 감각이 참 흥미롭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나는 계속 움직이고 있지 않나. 바람이 내 살갗을 스치고, 눈으로 보이는 풍경은 쉴 새 없이 변하며 흘러간다. 심지어 그게 너무 아름다운 거지. 그렇게 달리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소란한 생각들이 점차 사그라든다. 음… 그래도 결국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러고 나서 같이 간 동료와 맛있는 거 먹으면서 소주 한잔하며 하루를 마무리해야 하니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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