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중국이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반도체 장비 확보를 막기 위해 대(對)중국 수출을 통제에 나섰다. 한국도 수출 통제 국가에 포함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들이 비상이 걸렸다. 그런데 이웃 국가인 일본의 경우 수출 통제 국가에서 제외됐다. 업계에서는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적 외교와 미국 정계를 대상으로 한 대관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2일(현지시간) 수출 통제 대상 품목에 HBM 제품 등 반도체 관련 기기를 추가했다. 이번 수출 통제에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Foreign Direct Product Rules)을 적용했는데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만든 제품이더라도 미국산 소프트웨어나 장비, 기술 등이 사용됐다면 수출 통제를 준수해야 한다. 미국의 기술력이 들어간 모든 반도체 장비에 대한 중국 수출을 금지한 것으로 사실상 모든 반도체 업계를 대상으로 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수출 통제는 오는 31일부터 적용된다.
다만 미국 상무부는 미국과 동등한 수준의 수출 통제 제도를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해당 국가 기업이 반도체 장비를 중국에 수출할 때 상무부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밝혔다. 통제를 받지 않는 국가는 일본을 포함한 33개국으로 한국은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국내 기업의 경쟁력이 수출 허가 국가 기업들에 비해 약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미국과 동등한 수준의 수출 통제를 하고 있다는 미 상무부 설명과 달리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중국 수출 비중은 빠르게 올라가는 추세다. 미국 CNBC에 따르면 일본 반도체 업계 1등 고객이 중국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반도체 장비 대기업 도쿄 일렉트론의 상반기 매출 부중의 44%가 중국으로 이는 지난해(23%)대비 두 배 가까이 오른 수치다.
반도체 및 평면 패널 디스플레이를 제조하는 스크린 홀딩스 역시 중국에서의 매출 비중이 43%에 달했다. 자체 통제가 이뤄지고 있어 일본을 제외했다는 미국 상무부의 명분과 달리 일본 반도체 업계의 중국 의존도는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이 수출 통제 국가에서 제외된 것은 미국과의 외교적 관계가 큰 영향을 미친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일본은 미국 외교에 국내보다 많이 투자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에 대한 로비 금액만 해도 국내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격차가 크다. 미국 의회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일본이 로비에 사용한 금액은 총 2353만9000달러(한화 약 330억5000만원)이다. 반면 국내의 경우 557만7000달러(약 78억3000만원)으로 4배 이상 차이 난다. 국내의 경우 미국에 대한 로비를 점차 줄이고 있으며 올해 미국 대관 비용은 지난 10년간 역대 최저다.
국내는 대한민국 정부가 대표로 로비를 진행하는 반면 일본은 △일본 정부(Government of Japan)을 비롯해 △일본무역진흥기구(Japan External Trade Organization) △일본국제광광기구(Japan National Tourism Organization) △ 제조수입 진흥 기구(Manufactured Imports Promotion Organization) △고베시(Kobe Government) 등 5개다. 이중 무역 문제를 다루는 일본무역진흥기구의 로비 금액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등록된 로비스트 수에 있어서도 국내는 1명, 일본은 무려 29명으로 큰 격차를 보였다.
올해 들어 일본은 미국·대만 등과 협력하면 반도체 굴기를 본격화하고 있다. KB증권이 발표한 '진격의 일본 반도체'란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일본 반도체 산업이 △미중 분쟁의 반사이익 △AI 가속화에 따른 반도체 수요 증가 △엔저로 인한 수출 증가와 환차익 기대 등의 요인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김세환 KB증권 연구원은 "최근 글로벌 첨단 반도체 기술 패권을 거머쥐려는 미·중 간 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은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일본이 반도체 수출 통제 제외국에 속한 것이 그동안 진행했던 로비전과 외교의 승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의 부흥을 위해 미국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으며 외교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며 "이번 조치도 그 일환 중 하나인데, 반도체 재기를 노리는 일본 입장에서 자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강화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부 외교력을 총동원해 국내 반도체 기업들을 지원 사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 또한 국가의 핵심 수출품인 반도체 산업을 구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현재 연세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반도체산업은 외교, 국방, 경제의 다양한 요인에 영향을 받고 있기에 더 이상 민간의 영역이 아니다"며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으면 도태되는 것은 한순간이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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