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국경을 뛰어넘은 따뜻한 리더
김혜성(金惠聖, 1955~2023)
제18대 국회의원
∙연혁
1955년 경기도 화성 출생
1974년 홍익대학교사대부속여고 졸업
1978년 숙명여대 경영학과 졸업
1987년 연세대 경영학과 석사 졸업
1987년 신민주공화당 중앙당사무처 여성국 부장
1990년 민주자유당 여성국 정책부⋅기획부 부장
1993년 김영삼 대통령 비서실 제2부속실 국장
1997년 연세대 경영학과 박사 졸업
1997년 일본유통경제대학 객원연구원
2008년 친박연대 민생정책연구소 부소장
2010년 18대 국회의원
2010년 국회 <다문화가족정책연구포럼> 대표의원
2020년 (사)한국여성의정 사무총장
부처님의 자비로움을 타고났다
김혜성은 1955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꿈에서 부처님을 보시고 낳았다. 이런 태몽 덕분인지 어머니는 “이 아이는 돌부처만 봐도 인사를 하고 다닌다.”면서 스님이 될 팔자(八字)를 타고 난 것 같다고 하였다. 김혜성의 불심(佛心)은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움직였다.
군 장성 출신이었던 아버지는 근무지를 전국 팔도로 옮겨 다녔다. 초등학교 다닐 무렵 아버지가 경기도 수원에서 근무할 때 몇 년간 온 가족이 한 지붕 아래서 지냈을 뿐, 김혜성은 조부모와 외삼촌 등 친지들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경기도 화성에서 살았던 조부모는 만석꾼의 집안이었다. 김혜성이 서너 살 무렵 아버지가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 조모는 “우리 재롱둥이는 나한테 두고 가라”며 첫 손주였던 혜성을 곁에 두게 되었다. 그렇게 혜성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조부모 곁에서 귀염을 독차지하며 넉넉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조모도 김혜성의 남다른 불심(佛心)을 일찍이 알아보았다. 전쟁 직후라 모두가 땟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스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스님들은 산중의 절을 떠나 민가로 내려와 시주를 얻어가곤 했다. 김혜성의 조부모 댁 문전에는 시주를 구하는 스님의 목탁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김혜성은 목탁 소리가 들리면 잰걸음으로 달려나갔다. 목탁 소리를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스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조모는‘저 녀석이 부처님 기운이 들어 스님을 따라 절로 들어가면 어쩌나’하며 늘 마음을 졸였다.
김혜성은 조부모 댁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새벽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책상 앞에 앉아서 글쓰기를 했다. 김혜성은 책상머리에서 직접 그린 태극기를 바라보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런 자세는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했다.
김혜성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정성이었다. 퇴역군인이었던 아버지가 고희를 넘긴 나이에 알츠하이머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이때 김혜성은 치매에 좋다는 음식을 마련해서 아버지의 건강을 챙겼다. 김혜성의 이런 효심을 지켜본 육촌 동생은 “맏딸인 혜성 언니의 식이요법으로 아버님이 5~6년을 더 사셨다”고 회고했다.
타고난 리더십과 유머로 대중을 사로잡다.
중학교 때부터 서울 외삼촌 댁 마포에서 거주했던 김혜성은 마포구가 그의 성장의 무대였다. 홍익대학교사대부속여고를 다닐 때는 호국단장을 맡아 마포를 누비고 다녔다. 이때 마포구에 사는 여학생은 물론이고 남학생들까지 김혜성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인사였다. 숙명여대 경영학과 74학번이었던 김혜성은 대학 시절에도 위로 4년 아래로 4년은 김혜성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 때 사회를 보면서 김혜성은 일약 숙명여대 스타로 떠올랐다. 요즘 시대에 아이돌 스타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김혜성은 타고난 성정이 워낙 호인(好人)이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김혜성의 넉넉한 인품과 리더십에 매료되었다.
김혜성 의원이 18대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홍익여고 후배가 의원실 직원으로 들어왔다. 서울의 모 고등학교 영어교사였던 후배는 여고 선배였던 김혜성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학교를 그만두고 그의 밑에서 일하기를 자처했다. 김혜성 의원은 직접 운전을 하면서 의원실 보좌직원들과 함께 성북동 백숙집을 비롯해 서울 구석구석 맛집 투어를 다녔다. 김혜성은 초보 국회의원을 보좌하느라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맛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고 여겼다. 지금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대표가 된 그 후배 비서관은 “그때 의원님께 배운 것을 지금 직원들한테 그대로 하고 있다”면서 김혜성의 따뜻한 리더십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김혜성은 또한 배달 노동자, 청소용역 직원, 경비 아저씨에게는 더 깍듯이 대했고, 넉넉한 인심을 베풀었다. 국회에 있을 때는 청소하시는 분, 국회 경위분들까지 김혜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김혜성은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의정활동을 할 수 있도록 뒤에서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는 이들에게 진심을 다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김혜성의 따뜻한 미소와 친절, 그리고 나눔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김혜성은 마포구 공덕로터리에 있는 아파트에서 4년을 살았다. 그때도 4년 내내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면서 눈을 쓸었다. 경비 아저씨 혼자서 쌓인 눈을 치우는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었다. 그의 이런 측은지심(惻隱之心)은 18대 국회 의정활동에도 그대로 옮겨졌다. 다문화가족정책, 소상공인지원 정책 등이 그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돌봄과 지원이 필요한 이들에게 김혜성은 동료이자 대변인이 되고 싶었다.
김혜성은 따뜻함이 배어있는 저음의 목소리와 흥을 아는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 났다. 김혜성이 일단 마이크를 잡으면 청중의 눈과 귀를 주목시켰다. 또 구수한 목소리로 흥을 돋우는 데 그의 가창력은 가수 뺨칠 정도였다. 당시 아나운서 출신의 국회의원이었던 변웅전 의원은 김혜성에게 “아나운서보다 목소리가 더 좋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되기 1년 전 김혜성은 일본 유통경제대학에서 유학했다. 이때 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삿포로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하였다. 김혜성이 인사말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보다 앞서 일본 주재 한국영사가 썰렁한 인사말로 분위기를 흐려놓았다. 이때 김혜성은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으니 인사말 대신 노래를 한 곡 들려드리겠다며 일본 대중가요를 불렀다. 이탈리아 테너가수 파바로티의 목소리를 닮은 김혜성의 노래를 들은 청중들은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노래 한 곡으로 어색하고 썰렁했던 국제회의장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학자에서 정치인으로 뒤바뀐 진로
김혜성은 학구열이 굉장히 높았다. 숙명여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잠시 한국야금 기획실에서 일했지만, 바로 연세대 경영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대학원을 마치고 유학을 다녀와서 교수가 되고 싶었다. 그의 전공은 조직행동론이었다. 조직 내의 개인이나 집단의 행동과 태도가 조직의 효율성 향상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관심을 갖고 이들의 관계성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김혜성은 이런 조직행동론에서 검증된 이론을 정당 활동 기간 중 실무에 적용했다.
김혜성은 박사과정 중에 여성 인재로 영입되어 신민주공화당에 입당하게 된다. 그의 입당은 정말 우연한 기회로 찾아왔다.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정계복귀를 선언한 뒤 신민주공화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즈음 김혜성은 지인으로부터 점심 식사에 초대되었다. 밥 먹는 자리인 줄 알고 나간 그 자리가 김종필 총재가 참여하는 간담회였다. 김혜성은 어안이 벙벙해서 앉아있는데 갑자기 그에게 마이크가 쥐어졌다. 총재에게 질문하라는 것이었다. 김혜성은 그날 간담회 참석을 계기로 정당에 영입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연세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유학을 가려고 마음먹고 있던 그에게 정당 입문은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김혜성은 신민주공화당 창당 준비하는 데 도움을 달라는 지인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지 못했다. 딱 1년만 아르바이트한다는 생각으로 일해보기로 하고 신민주공화당 창당멤버로 참여하게 되었다.
김혜성은 창당 이후 신민주공화당 중앙사무처 여성국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과 제2야당 통일민주당(약칭 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였다. 이를 두고 3당 합당 또는 보수대연합이라고 칭했다. 3당 합당 이후 김혜성은 민주자유당 중앙사무처 여성국 정책부장, 기획부장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김영삼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손명순 여사가 김혜성을 대통령 비서실 제2부속실 국장으로 발탁하였다.
민주자유당은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 등으로 계보가 난립돼 있었다. 복잡한 계보 싸움은 중앙당 여성국에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혜성은 입당 자체가 우연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계보로 분류되지 않았다. 중앙당 여성국에서 행사를 진행하는 것을 지켜보던 손명순 여사는 김혜성을 청와대 제2부속실 국장으로 낙점했다. 계파싸움이 치열한 정당 내에서 자기 정치를 하지 않고 5년 내내 청와대 부속실 살림을 도맡아줄 인재가 필요했고, 그 일을 해낼 사람이 무계보이자 강직한 성품을 지닌 김혜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손명순 여사의 혜안은 적중했다.
문민정부 5년 동안 김혜성은 청와대 제2부속실을 올곧게 지켜냈다. 구제금융으로 문민정부가 최대 위기를 맞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청와대를 떠나 자기 살길을 찾아갔다. 김혜성에게도 온갖 청탁과 회유가 밀려들었지만, 단 한 번도 흔들림이 없었다. 어느 날 친척 동생이 김혜성에게 물었다. 일찌감치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5년 내내 청와대 부속실에 머물러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김혜성의 대답은 간결하고 단호했다.
“나를 믿고 발탁해주신 여사님을 IMF로 힘들다고 어떻게 그 곁을 떠날 수 있겠나. 그리고 청와대 5년의 생활을 30년의 생활과 바꿀 수는 없었다.”
김혜성은 부처님의 자비로움을 닮아 넉넉한 인품을 지녔지만, 조직행동론을 전공한 학자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사심(私心)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업무를 처리해냈다. 김혜성은 문민정부에서 대표적인 청백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손명순 여사는 5년을 한결같이 문민정부 부속실을 지켜왔던 김혜성을 무척 아꼈다. 손명순 여사는 문민정부 임기 말에 김혜성의 등을 떠밀어 박사 논문을 쓰도록 했다. 6개월간 휴가를 준 것이다. 손명순 여사의 배려가 없었으면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헌법소원으로 되찾은 비례대표 의석
문민정부 임기 말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혜성은 다시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모교인 숙명여자대학교를 비롯해 그를 필요로 하는 대학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만났다. 김혜성은 학교에만 머물지 않고 커뮤니케이션 회사를 차려 경영에도 참여했고, 몇몇 기업에서 경영 자문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던 차에 김혜성에게도 국회에 들어갈 기회가 찾아왔다. 기회가 현실이 되는 과정은 매우 험난했다. 김혜성은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박연대 비례대표 9번으로 출마했다. 당시 한나라당에는 친이계 친박계로 나뉘어 치열한 계파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18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비주류세력이었던 친박계 의원들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하게 되었다. 이에 친박계 의원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름을 걸고 ‘친박 무소속 연대’를 결성하게 된다. 친박계 일부는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고, 일부는 원외 정당인 ‘미래한국당’에 입당하였다. 미래한국당에 입당한 친박계는 이후 ‘친박연대’라는 이름으로 정당을 창당하였다.
친박연대는 18대 국회의원 선거를 불과 20여 일 앞두고 급조된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4월 9일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지역구 선거에서 6명의 당선자를 배출했고, 정당지지도 13%로 비례대표도 8석이나 얻어 총 14명의 당선자가 나왔다. 4월 9일 총선 이후 지역구 당선자 6명은 한나라당으로 복당했고, 비례대표 8명만 친박연대 이름으로 남았다. 그런데 비례대표 중 3명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2009년 5월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친박연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3명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였음에도 후 순위였던 3명의 후보에게 의원직이 승계되지 않았다. 공직선거법에 선거범죄로 인한 당선무효로 국회의원에 궐원이 생겼을 경우 후순위자가 의석을 승계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2009년 6월 25일 비례대표 지방의회 의원이 선거범죄로 당선무효가 되었을 때 후 순위 후보의 의석 승계를 제한하는 공직선거법 조항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이로써 친박연대 비례대표 후 순위 후보들도 헌법소원을 제기하여 3명 후보자가 2009년 11월 3일 의원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이 김혜성이었다. 당시 헌법재판소 결정문에 따르면, “선거법이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자 명부상의 차순위 후보자의 승계까지 부인함으로써 선거를 통해 표출된 선거권자들의 정치적 의사표명을 무시⋅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선거범죄에 관해 귀책사유가 없는 정당이나 차순위 후보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지나친 제재로 공무담임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혜성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친박연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어 국회에 입성하였다. 김혜성은 본의와는 무관하게 계파 갈등의 결과물이었던 정당에서 극심한 부침을 겪었다. 친박연대 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2010년 2월 당명이 ‘미래희망연대’로 바뀌었고, 그해 4월 두 달 만에 ‘한나라당’에 흡수되어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문화가족에 대한 따뜻한 시선
김혜성은 2009년 11월 3일 자로 국회의원직을 승계하였다. 18대 국회에 뒤늦게 들어왔지만 의정활동 채비는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오랜 기간 당 여성국장, 민생정책연구소 부소장을 지내면서 체득한 아젠다를 입법과 정책제안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짧은 임기 동안 내실 있는 의정활동을 하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그중 하나가 ‘다문화정책’이었다.
김혜성은 18대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2009년 11월 ‘국회다문화가족정책연구포럼’을 창립하였다. 공동대표를 맡아 2년간 전국을 돌며 수많은 다문화가족을 만났다. 그 결과물로 <우리 안의 국경>이란 책을 출판했다. <우리 안의 국경>이란 제목에는 우리가 다문화가족을 대하는 차별적 시선이 묻어나 있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의 ‘국경’에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다른 저개발국가에 대한 차별이 내재되어 있었다. 다문화 현상은 21세기 모든 국가가 숙명처럼 수용해야 하는 시대의 흐름이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차별적 시선으로 다문화가족을 대하고 있었다.
김혜성은 <우리 안의 국경> 서문에서 다문화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시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프랑스인들이 만든 서초동의 서래마을은 선망하지만 안산의 이주노동자촌은 특별구역으로 바라본다. 서래마을에 가서는 1만원이 넘는 커피값을 지불하고도 흡족해하지만, 안산의 다문화촌에서 사먹는 양꼬치 하나는 가격을 따지고 질을 따지며 의심의 눈초리를 쉽게 거두지 않는다. 강남 학원의 미국인 영어선생은 쉽게 믿지만, 강북의 필리핀 영어선생은 쉽게 믿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김혜성은 국적에 따라 다문화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갖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확한 논리로 “그것은 잘못된 시선이며, 차별”이라고 설명한다.
“공항 검색대에서나 확인받는 국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개인으로 보지 않고 그 개인이 속해 있는 전체로 단정해버린다. 개인은 전체가 될 수 있지만 전체가 개인이 될 수는 없다. 국적은 출생지일 뿐 개인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지도로 국가와 민족을 구분하고, 남극과 북극으로 나누고, 동쪽과 서쪽의 위치를 확인한다. 지도를 통해 세상의 중심이 어디인지, 어느 나라가 부자고 어느 나라가 가난한지 구분하고, 어느 민족이 우수하고 어느 민족이 뒤떨어지는지 차별한다.”
김혜성은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누구보다 애국심이 강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보다는 차별 없는 공존과 화합을 통한 따뜻한 공동체가 유지되기를 더 소원했다. 김혜성은 이런 따뜻한 공동체에 대한 소망을 <우리 안의 국경>에 고스란히 담아놓았다.
“다문화 현상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는 우리의 새로운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다문화와 함께 공존할 때 우리 안의 국경(차별)도 사라지고, 국경 없는 미래도 약속받을 수 있다.”
김혜성은 2009년 기준 110만 명이 넘어선 다문화가족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문화가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답을 직접 찾아 나섰다. 그리고 다문화가족이 간절히 원했던 지원사항을 담아 2010년 5월 4일, 2011년 3월 17일, 2011년 6월 24일 세 차례나 「다문화가족지원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하였다. 이 가운데 두 건의 개정안이 국회여성가족위원회 대안으로 성안되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10년 5월에 발의한 개정안에 따르면, 결혼이민자에게 온라인, 방문교육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어교육을 지원하도록 하였고,「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가정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결혼이민자 등을 보호⋅지원하는 내용을 신설하였다. 2011년 6월 24일에 발의한 개정안에 따르면, 현행 여성가족부가 민간법인 또는 단체에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지정⋅운영하는 방식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설치⋅운영하고, 필요한 경우 관련 사무를 법인과 단체에 위탁운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지방자치단체에 다문화가족 지원을 담당할 기구와 공무원을 두도록 하였고, 다문화가족 지원센터 전문인력에 보수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여 다문화가족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이 이뤄지도록 배려하였다. 그리고, 턱없이 부족한 예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기획재정부가 관리하는 복권기금이 다문화 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소상공인에게 사회적 안전망 구축
김혜성이 집중한 두 번째 아젠다는 소상공인에 대한 탄탄한 지원제도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는 우리 경제의 실핏줄 기능을 담당하면서 경제 양극화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의 몰락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김혜성과 비슷한 연배의 직장인들이 퇴직 후 치킨가게, 호프집 등을 창업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2010년 말 당시 전국적으로 소상공인 수가 500만명을 상회하고 있었으나, 소상공인의 경영환경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소상공인 비율은 OECD 평균의 2배가 넘고 있었다. 중산층의 기반이 되었던 직장인들이 퇴직 후 창업경영 등에 대한 교육이 부재한 상태에서 창업하다 보니 상당수가 1년 이내에 폐업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정부는 기업친화적 정책을 펼치면서 대형할인점이나 SSM의 골목상권 침투를 수수방관했고, 소상공인들의 숨통을 옥죄고 있었다. 김혜성은 결국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격으로 소상공인 업계가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것을 제안하면서 소상공인들을 위한 입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생존 현장을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소상공인들과의 수차례 정책간담회를 거쳐 소상공인들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4가지 정책제안을 발표했다.
첫째, 소상공인 정책을 전담할 정부조직을 신설하는 것이었다. 당시 소상공인 정책은 중소기업청의 소상공인 정책국에서 담당하고 있었지만, 자영업자를 포함한 5백만명의 소상공인이 우리나라 전체 일자리의 40%를 제공하고 있는 실정을 감안해 소상공인연합회라는 법정단체 설립을 주장했다. 그리고, 정부 차원에서는 획기적인 예산증액을 포함해 종합적인 정책적 지원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면서, 대통령 직속으로 소상공인위원회를 신설할 것을 촉구했다.
둘째, 소상공인들이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신용카드 수수료를 낮추는 것이었다. 소상공인들은 신용카드 수수료를 대형할인마트 수준인 1.5%까지 낮춰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김혜성은 소상공인들이 카드 수수료로 인한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한 현실적 대안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국회기획재정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김혜성 의원은 한국은행 총재에게 금융결제원과 협의를 거쳐 현금카드결제서비스를 활성화시켜 수수료를 1%까지 낮출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는 훗날 영세 자영업자 신용카드수수료의 획기적 인하를 현실화하는 주춧돌이 됐다.
셋째, 자영업자에 대한 근로장려세제를 차질 없이 적용하자는 것이었다. 2007년부터 일용근로자들은 근로장려금을 지급받았지만, 자영업자들은 근로빈곤층에 포함되었음에도 소득파악이 어렵다는 이유로 근로장려금 지급대상에서 제외되었다.개념적으로 자영업자도 근로빈곤층(Working poor)에 해당되기에 근로장려금을 지급받을 수 있어야 하지만, 정부의 준비소홀로 자영업자에 대한 근로장려세제 적용은계속 미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에게 근로장려세제를 적용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소득 파악의 문제였다. 장부기장이 소득파악을 위한 첩경이었지만, 소상공인들 입장에선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판단해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소상공인들이 근로장려세제 혜택을 받는 것보다 장부기장 비용이 더 큰 부담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김혜성은 묘안을 짜냈다. 카드수수료 인하를 유도하기 위해 제시한 현금카드결재서비스 실행에 필요한 신용카드단말기에 장부자동기장 기능을 탑재하여 보급한다면, 소상공인들의 장부기장 비용을 획기적으로 경감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김혜성은 기회재정부와 국세청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일용근로자보다 6년 늦게 자영업자에게도 근로장려금이 지급될 수 있도록 했다.
넷째, 정부가 소상공인에게 필요한 정보제공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당시 통계청은 내비게이터 서비스를 통해 지역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소상공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김혜성 의원은 국회기획재정위원회에서 국세청이 신용카드가맹점의 신용카드 결제 및 현금영수증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받고 있는데, 이 정보를 가공해서 통계청이 상권별로 제공한다면 소상공인들이 유용하게 활용하게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러한 정책제안들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소상공인 지원을 위한 제정법이 꼭 필요했다. 김혜성은 2011년 8월 19일 소상공인연합회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소상공인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기 위한 소상공인 진흥기금 설치를 골자로 한 「소상공인 지원에 관한 법률」을 대표발의하였다. 김혜성은 이 제정법을 발의한 뒤, 소상공인 대표와 전문가들과 함께 수차례 공청회를 개최하여 여론 수렴에 나섰다. 하지만 정부는 물론 소속 정당에서도 나라 곳간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했다.
김혜성이 「소상공인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숨은 공로자가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공인회계사 출신인 김혜성의 보좌관이었다. 세무와 기업회계, 그리고, IT 전문가로 소상공인들의 애로사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보좌관은 김혜성의 비밀병기였다. 김혜성이 보좌관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를 소개한다.
김혜성의 보좌관은 국정감사 때마다 전문가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대기업을 비롯한 공기업, 공공기관 및 금융기관들의 횡포를 조목조목 지적했고, 경제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소상공인들에게 생존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인지 국정감사에서 타깃이 되었던 관계자들은 김혜성 의원의 보좌관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급기야 이들은 당의 중진의원과 친‧인척간이었던 일부 의원들에게 보좌관을 음해하는 로비를 서슴치 않았다. 로비를 받은 의원들은 김혜성 의원에게 보좌관 면직을 요구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김혜성 의원은 보좌관에 대한 터무니없는 음해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했다. 그 날도 당의 중진의원이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보좌관을 해고하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김혜성 의원은 대화 도중 보좌관을 불렀다. 김혜성 의원은 스피커폰을 켠 뒤 수화기 너머 있는 의원에게 “지금 우리 보좌관이 나와 함께 있으니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라”고 말했다. 김혜성 의원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이렇게 답변했다.
“의원님께서 우리 보좌관을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저는 보좌관을 제 분신처럼 신뢰하고 있습니다. 제 보좌관의 면직 여부는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그 자리에 있던 보좌관은 김혜성 의원의 단호함에 어안이 벙벙했다고 한다. 김혜성은 이렇듯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흔들림이 없었다.
소상공인 지원, 첩첩산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소상공인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성안되었지만, 국회법사위 문턱을 넘기에는 첩첩산중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당시 국회지식경제위원회 위원장이 제정법은 본회의 통과가 어렵다는 이유로 「소기업 및 소상공인 지원을 위한 특별조치법 일부개정법률안」으로 바꿔치기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에도 국회에서는 힘 있는 여당의 다선의원이나 상임위원장이 초선의원이 심혈을 기울여 성안한 법안을 가로채는 일이 간간히 있었다. 입법 도의에는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본회의 통과를 수월하게 한다는 미명 아래 법안 도둑질이 관행처럼 이뤄졌다.
김혜성 의원은 18대 국회에 뒤늦게 들어와 1년 6개월을 영혼을 갈아넣다시피한 「소상공인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당시 야당의 중진의원이자 상임위원장에게 날치기당했다는 억울함에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그러나 김혜성은 역시 대인배였다. 누구의 이름으로 법안이 통과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상공인들의 자립과 이익을 대변하는 내용이 얼마나 충실하게 담겼느냐가 더 값지다고 판단했다. 김혜성이 성안한 제정법의 내용이 개정안에 고스란히 담겼으니 그것으로 족하다며 마음을 추스렸다.
결국, 국회지식경제위원회에서 대안으로 성안한「소기업 및 소상공인 지원을 위한 특별조치법 일부개정법률안」이 2011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여야 합의 하에 상임위와 법사위를 통과한 이 개정안은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157명 가운데 157명이 참석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김혜성은 자식이나 다름없었던 소상공인지원법안이 국회본회의에서 재석의원의 만장일치로 통과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다. 무엇보다 소상공인들의 법적 지위가 보장되었고, 매년 관세징수액의 3%를 소상공인진흥기금으로 전입시켜 안정적인 재원이 확보되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
김혜성은 그해 연말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제는 소상공인들이 시위나 농성을 하지 않고서도, 대표를 통해 이해당사자나 정부 책임자들과 책상에 마주 앉아 소상공인의 권익을 위한 주장을 당당히 펼칠 수 있게 되었다”며 소상공인연합회가 법정단체가 되어 소상공인 이익을 대변할 수 있게 된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겼다.
그런데 법 개정이 끝이 아니었다. 소상공인연합회라는 법정단체 설립 근거법이 마련되었지만, 단체 설립과정에서 몇 해 동안 소상공인 단체 간의 진흙탕 싸움이 벌어졌다. 복수 단체가 경쟁을 벌이면서 도저히 타협의 빌미가 보이지 않자, 중소기업청의 중재로 어렵사리 소상공인연합회를 법정단체로 출범시켰다.
법정단체가 출범한 뒤에도 내부 갈등은 계속되었다. 소상공인연합회 주요 간부는 정계 진출을 선택했고, 700만 소상공인의 권익향상보다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직위를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누구보다 사심 없이 소상공인들에게 탄탄한 법적 경제적 기반을 조성하는 일에 매진했던 김혜성은 법 개정이후 10년 이상 소상공인단체들이 밥그릇 싸움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김혜성은 소상공인단체가 법정단체가 되면 적어도 소상공인들이 길거리에 나가 생존권 투쟁을 하는 일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상공인연합회가 700만 소상공인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소상공인단체는 더 이상 소상공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정단체가 아니라, 주요 간부들이 공익보다는 사익을 추구하는 활동으로 정계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전락했다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김혜성은 보좌관과 함께 고생 끝에 일궈낸 소상공인의 법적 지위가 그들의 안전망이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러나 김혜성은 절망하지 않았다. 김혜성은 2023년 8월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경제의 실핏줄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가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고, 조만간 자영업이 붕괴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다”면서도 “피할 수 있는 위기도 없지만 극복하지 못할 위기도 없다는 경제학자 케인즈의 말을 마음 깊이 새기며 실질적 대안을 중심으로 지혜를 모아 해결책을 찾는데 힘을 보탤 것”이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이 인터뷰는 김혜성이 세상을 떠나기 넉 달 전에 이뤄졌다. 김혜성의 비밀병기였던 보좌관에 따르면, 마포에 사무실을 내고 2024년 총선에 도전해서 사심 없이 소상공인들의 이익을 대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김혜성은 국회를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소상공인들이 안착을 위한 연구활동을 지속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의 소상공인들의 위기를 소프트랜딩으로 안착시키기 위해 정책 대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회적 약자와의 동행, 변하지 않는 꿈
김혜성은 18대 국회에서 늦은 출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다 입법 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 총 272개의 법안을 대표발의했는데 그 중 33개의 법안이 소상공인지원법안을 포함하여 사회적 약자에게 힘이 되는 법안이었다. 김혜성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그림자로 존재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의 손을 잡고 희망을 향해 나란히 걷고 싶었다. 그들과의 동행으로 살만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김혜성이 정치하는 이유였다.
소상공인지원법 외에 김혜성이 마음을 담은 법안으로 「소프트웨어진흥법 개정안」이 있었다. 2010년 조달청 나라장터를 통해 발주된 20억원 이상의 소프트웨어 계약현황을 보면, 전체 발주건수 중 대기업 계약건수가 전체의 79.6%를 차지하고 있고, 금액으로는 91.9%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기업이 싹쓸이를 하고 있어 중소IT기업이 참여할 틈이 없었다. 실제로 대기업이 수주한 정보화사업을 시행하는 주체는 중소기업이었다. 다단계 하청계약을 통해 중소기업이 수행하지만 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정도의 대가만을 받고 있었다. 실제 사업은 다단계 하청으로 중소기업이 수행하고 대기업은 폭리를 챙기면서 공공기관 소프트웨어사업을 독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혜성은 이런 대기업의 횡포를 바로잡고 싶었다. 우리나라 IT 중소기업들은 이미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유지보수에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대기업의 횡포를 바로잡고 불공정 관행을 없애 중소기업이 중견IT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으로 분리‧분할 발주제도를 실행시켰다. 그리고, 국방이나 안보 등에 해당하지 않는 공공소프트웨어 개발사업에는 대기업이 참여할 수 없도록 했다. 이런 내용은 「소프트웨어진흥법 개정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이로 인해 IT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불공정 다단계 하청계약에서 벗어나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김혜성의 또 하나의 서민을 위한 입법은 공동주택 어린이집을 면세 사업자로 만들어준 것이다. 당시에도 대한민국 출산율은 OECD 국가 중 최저치를 기록할 정도로 심각한 인구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저출산 문제의 해결책 중의 하나로 부모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보육시설을 확대하고 지원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국세청은 정부의 출산장려 정책의 취지에 역행해 공동주택의 보육시설을 보육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반사업자로 간주해 부가가치세를 부과하는 정책을 실행하고 있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김혜성은 정부가 숨어있는 세원을 적극적으로 찾아 복지예산을 마련할 것을 강조해왔다. 세무당국이 유흥주점이 ‘신용카드 깡’등으로 손쉽게 탈세하는 방식을 차단함으로써 방치하거나 숨어있는 세원찾기에 적극 나설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세무당국의 세원 찾기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바로 공동주택 어린이집 사업장이었다.
세무당국이 2010년 10월경 전국 상당수 아파트대표자회의에 그동안 부과하지 않았던 단지 내 보육시설 임대료에 부가가치세를 부과하는 통지서를 발송하였다. 서울 노원구의 A아파트 대표자회의는 관할 세무서로부터 지난 2004년부터 5년간 단지 내 보육시설 임차인으로부터 받은 임대료에 대한 부가가치세와 가산세를 미납했다는 이유로 총 3천여만원을 납부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이런 세금폭탄 통지서를 받아든 전국의 아파트대표회의와 단지 내 보육시설은 일제히 세무당국에 원성을 쏟아냈다. 공동주택 보육시설은 영리사업이 아닌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여겼던 터라 부가세를 소급해서 납부하라는 것은 세무당국의 횡포나 다름없었다.
김혜성은 전국의 아파트 주민들의 이런 원성에 가장 먼저 귀를 기울였다. 그는 2010년 10월 대구지방국세청 국정감사에서 “최근 일선 세무서들이 아파트 단지 내 보육시설 임대료 관련 부가세로 수백, 수천만원을 소급해 한꺼번에 부과하고 있다.”며 “이같은 부가세 부담이 지속되면 전국 아파트 단지 내 보육시설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정부의 출산장려정책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지적하고 나섰다.
그러나 세무당국은 “부가가치세는 영리목적의 유무를 불분하고 사업상 독립적으로 재화나 용역을 공급하는 경우 과세되는 세금”이라며 세법상의 원칙을 들어 공동주택 어린이집에 계속 부가세 부과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다면 부가가치세법 개정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김혜성은 2011년 1월 13일 부가가치세 면세대상에 공동주택 영‧유아 보육시설 임대용역을 포함시키는 내용의 「부가가치세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하였고, 그해 12월 30일 국회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로 인해 당시 3만6000여 곳에 달하는 공동주택 어린이집의 관리운영에 실질적인 세제지원이 이뤄지게 되었다.
당사자 정치의 꿈은 계속되었다.
김혜성의 18대 국회 의정활동은 떠들썩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민과 약자를 돌보고 그들의 사회적 안전망을 만드는 일에는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김혜성은 18대 국회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새로운 출발을 꿈꾸고 있었다. 19대 국회에서는 학창시절 꿈을 키웠던 마포에서, 마포구민들의 꿈을 실현하는 데 함께하는 이웃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혜성에게 재선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김혜성은 19대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지만, 재선 국회의원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2020년 1월호 헌정(憲政)지 기고한 칼럼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여성정치, 곧 당사자 정치를 갈구하고 있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언제까지나 희망이나 바람을 촉구하고 문을 두드릴 뿐 결정에는 참여할 수 없는 정치, 항상 밀리고 밀려 ‘다음에’, ‘나중에’를 말하는 정치가 여성들의 전유물이어야 하는가? 어느 청년 여성이 “나를 대표할 수 없는 사람들의 대의민주주의가 종식되길 바란다. 기존의 정치 그 자리에 여성의 이름으로 다시 쓰인 정치를 원한다”고 힘주어 부르짖듯 이젠 바뀌어야 하고 달라져야 한다. 여성차별과 여성과 관련된 문제는 부딪치며 겪어온 당사자들이 가장 잘 풀어갈 수 있다는 뜻에서 ‘당사자 정치’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정치가 되어야 한다.”
헌정(憲政)지에 실린 김혜성 의원의 글을 읽으면서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이런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수많은 여성 청중들이 모여 있는 광장에서 여성이 왜 정치에 나서야 하는지를 설파하는 여성지도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김혜성은 2020년 12월 9일 핀란드에서 전해진 “전 세계 역대 최연소 34세 여성총리의 선출과 내각 19명 중 여성 12명 발탁의 ‘여초내각’ 구성”이라는 뉴스를 보며 온몸으로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김혜성에게 정치는 내 삶과 1cm도 떨어질 수 없는 내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현실적 지배력이라고 여겼다. 정치에서의 소외는 곧 삶의 주도권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혜성은 헌정(憲政) 칼럼에서 핀란드에서 벌어진 여성정치가 우리나라에서도 가까운 장래에 가능하기를 소망하면서 글을 맺었다.
김혜성은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소속으로 마포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려 하였으나 같은 당 비례대표 김성동 의원에게 밀려 공천을 받지 못했다. 비록 19대 국회에서 펼치고자 했던 꿈이 실현되지 못했지만 김혜성은 정치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2013년 전‧현직 여성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한국여성의정>을 설립하는 과정에 많은 힘을 보탰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정당에서 누구의 계보냐에 따라 공천에서 배제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정치권의 계보싸움은 우리 정당사에서 퇴출되어야 하는 약점이 되고 있었다. 하물며 한국여성의정에서도 여야 편가르기가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김혜성은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김혜성은 누구에게나 호인(好人)이었다.
김혜성은 넉넉한 인품 덕분에 편가르기가 고질병이 되었던 정치권에서도 “사람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여성의정> 설립을 주도했던 신명 전 민주당 의원은 “김혜성 의원은 새누리당 내에서도 넉넉한 인품으로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법인 설립하는 과정에서 새누리당 여성의원들을 발기인으로 모집하는 데 김혜성 의원의 도움이 컸다.”고 회고했다.
김혜성은 2013년 <한국여성의정> 설립과정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초창기 한국여성의정에서 정책연구위원으로 여성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다양한 연구사업 등에 참여했다. 2016년부터 2년간은 교육실장을 맡아 전국 8개 지역에 여성의정 정치학교를 설립하여 지방선거에 출마하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역량강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2019년 5월 사무차장을 맡아 여성의정 살림을 챙겼고, 2020년 5월부터 1년간 여성의정 사무총장직을 수행했다. 이때 김혜성은 사무국 직원들 사이에서 “왕 언니”로 불리며 넉넉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김혜성에게 <한국여성의정>은 그와 같은 여성정치인들이 재기를 꿈꾸고, 청년여성들이 당사자 정치에 도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큰 그릇이었다. 김혜성 역시 2024년 총선에서 재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총선 준비를 위해 2022년에 한국여성의정을 잠시 떠났다가 2023년 봄에 <기관지 여성의정> 편집위원장으로 돌아왔다. 법인 설립과정부터 함께했던 한국여성의정은 그에게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공간이었다.
김혜성은 한국여성의정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에게 비보(悲報)를 전했다. 그는 2023년 11월 23일 한국여성의정 운영위원들과 함께 강릉여성수련원으로 워크샵을 떠났다. 그 자리에서 기관지 편집위원장으로서 발표를 하던 도중 갑자기 쓰러져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한국여성의정 기관지 2024년 19호에는 김혜성을 추도하는 글로 가득 채워졌다.
김혜성은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2009년 12월 국회보에 실린 글에서 그가 꿈꾸고 있었던 세상을 보여주는 글귀를 찾아냈다.
“가여낙성(可與樂成)”
‘함께 일의 성공을 즐길 수 있다’는 뜻의 한자성어이다.
사회라는 공간(空間)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時間)에 맞춰, 다양한 모습의 사람(人間)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함께 미소 짓는 것만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란 얘기다.
김혜성은 가장 높은 곳을 향하는 삶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미소지을 수 있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이웃과 함께 웃을 수 있는 삶을 꿈꾸고 있었다.
따뜻한 미소를 가진 사람, 김혜성은 지금도 어디선가‘가여낙성(可與樂成)’의 삶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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