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김승훈 기자]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크리스마스 선물' 약속이 물거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의정갈등 해소를 위해 출범한 여의정 협의체가 2025년도 의과대학 정원 문제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출범 20일 만에 중단된 것.
의료계는 내년 의대 교육이 파행될 우려가 크다며 2025년도 수시모집 정원의 정시 이월 중단 등을 통한 사실상의 의대 증원 중단을 요구했으나 정부가 '내년도 정원 조정 불가'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자 더 이상 대화가 무의미하다며 참여 중단을 결정했다.
이에 대해 여권 내부는 물론 보수 언론에서도 정부가 갈등을 해소할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부여당, '내년도 의대 정원 조정 불가' 입장
한동훈 "휴지기 갖기로 해.. 다시 좋은 논의할 것"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드라이브를 걸었던 여야의정 협의체가 지난달 11일 공식 출범한 뒤 4차례 회의를 끝으로 중단됐다. 핵심 의제인 의대 정원을 놓고 정부와 의료계가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결국 출범 3주 만에 대화를 잠정 중단하게 됐다.
협의체 출범 당시 12월 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해서 국민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겨드리겠다던 여당의 다짐은 공수표가 됐다.
그간 의료계는 정부에 2025년도 증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시 중 정시 이월 중단 △예비 합격자 번호 배수 축소 △학습능력 떨어지는 수험생에 대해선 불합격 처리할 자율성 부여 △모집 요강에서의 자율성 부여 등 네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내년도 증원은 예정대로 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여야의정 협의체 여당 대표인 이만희 국민의힘 의원은 1일 오후 전체회의 후 브리핑을 통해 "의료계에서는 2025년도 의과대학 정원 변경을 지속적으로 요청해 왔으나, 입시가 상당히 진행된 상황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라며 "이런 상황을 감안해서 여야의정 협의체 대표는 당분간 공식적인 회의를 중단하고 휴지기를 갖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부도 이날 2025년도 증원은 불가능하다고 다시 못 박았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정부가 혼란을 초래하는 조치를 취하는 건 수험생과 교육 현장에 막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2026년 정원부터는 의사인력 추계위원회에 참여해 의견을 제시하면, 정부는 숫자에 구애받지 않고 의료계와 논의하겠다"며 "2026년 증원도 입시 일정을 고려하면 논의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빠른 시일 내에 더 많은 의료계 단체와 함께 야당에서도 참여해 대화가 다시 시작되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교육부는 2일 브리핑에서도 2025학년도 의대 증원 재검토에 대해 "구조적으로 어렵다"고 재차 강조했다.
구연희 교육부 대변인은 "정부는 열려 있는 자세로 논의에 임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도 "누차 말씀드렸지만 지금처럼 입시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구조적으로 논의 어려운 상황이고 2026학년도 정원부터 더 빠르게 논의가 시작되면 좋겠다"고 밝혔다.
한동훈 대표는 2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협의체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잠깐 휴지기를 갖고 다시 좋은 논의를 할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의료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라며 "앞으로도 계속 논의 이뤄지길 기대한다. 여야의정 협의체 출발한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의료계가 사실상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장이 열렸다는 것이고, 조건부 휴학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됐고, 의평원 문제도 가닥 잡았다"며 "정부와 의료계 이견이 차이가 큰 것은 우리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여당 입장에선 그 차이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의료계 "정부, 사태 해결 의지 없어.. 태도 변화 있어야 대화 재개"
전공의 대표 "이제 정부·여당 책임.. 최선은 내년 의대모집 정지"
반면, 의료계는 정부와 여당이 조금의 유연성도 보이지 않았다며 책임의 화살을 돌렸다.
의료계 대표로 참여한 의학회와 KAMC는 협의체 4차 회의 참여 직후 공동 입장문을 내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2025학년도 의대 정원안을 충분히 검토해 구체적인 조정안을 제시했고 2026학년도 증원 유예와 함께, 합리적인 추계 기구를 신설해 2027년 이후의 정원 논의를 진행하자는 제안도 협의체에 전달했다"면서 "입시 일정이 진행되고 있는 급박한 현실에서 유연한 정책 결정을 통해 의정 사태 해결의 의지를 조금이라도 보여달라고 간절히 요청했으나, 정부는 어떠한 유연성도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두 단체는 "'정책의 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한치도 물러나지 않는 정부와 여당의 일관된 입장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야당 역시 협의체에 참여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며 의정 사태 해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이어 "더 이상의 협의는 의미가 없고 정부와 여당이 사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지금 협의체 참여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참담한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했다.
이진우 대한의학회장은 회의 후 브리핑에서 "비록 협의체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국민과 환자 곁을 지키면서 정부의 잘못된 정책 추진을 막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며 "지금이라도 정부의 태도 변화를 촉구한다"고 했다.
정부와 여당의 '휴지기' 표현에 대해 "그건 정부·여당의 입장인 것 같고, 우리는 그렇진 않은 것 같다"며 "정부·여당에서 의대 정원에 대한 확실한 태도 변화, 정책 변화를 보여주면 그때 가서 다시 판단하고 논의하고 결정할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차기 의협 회장 선거에 나설 예비 후보자들도 정부와 여당을 비판했다.
주수호 전 의협 회장은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유치원생도 믿지 않는 산타의 크리스마스 선물 운운한 것부터 유치한 짓"이었다며 "엉킨 실타래가 더 얽히고설켜 다 버리기 전에 실뭉치를 자르고 잇는 수밖에 없다. 2025년 의대 입시 중지가 바로 그런 의미"라고 주장했다.
강희경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대위원장은 "두 단체의 결단을 존중하고 지지했으나 정부가 현 사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정부의 독선적인 태도가 사직 전공의들의 선택지를 명료하게 좁히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공의 단체도 "현재 최선은 2025년도 의대 모집 정지"라며 내년도 의대 모집 중지를 거듭 요구했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은 1일 페이스북에 "윤석열 대통령의 아집으로 여기까지 왔다"면서 "이제 전적으로 정부와 여당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유승민 "의대 정시 줄이고 수시의 정시 이월 안하는 것이 해법"
조선 "의료계, 정부, 정치권 책임감 안 보여".. 동아 "정부 무능"
여권에서도 정부의 무능을 지적하면서 내년도 정원을 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통령이 요지부동이니 교육부 장관, 복지부 장관도 딴소리를 못 하고 여의정 협의도 진척이 없다. 이대로 가면 파국이 예정되어 있다"며 "올해보다 더 심각한 내년의 의료 붕괴를 막고 합리적인 의료 개혁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대통령은 결단을 내리셔야 한다"하고 촉구했다.
이어 "의대생 휴학과 전공의 사퇴에다 앞으로 전문의와 전공의, 군의관과 공중보건의 공급에 극심한 혼란이 예고되어 있다"며 "이미 지난 2월 이후 암, 뇌, 심장, 혈관, 소아, 출산 등의 수술과 응급진료를 제때 받지 못하고 사망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을 향해 "의료사태를 해결하고 합리적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12월이 마지막 기회"라며 "내년 정원 4610명 중 수시 3118명(67.6%)은 모집이 끝나고 발표만 남았다. 내년 정원을 줄이는 방법은 정시 1492명(32.4%)를 줄이고 수시의 정시 이월을 하지 않는 방법뿐"이라고 강조했다.
유 전 의원은 "이 결정은 대학이 하기 어렵고, 대통령과 정부가 해야 하며 그 법적, 정치적 책임도 정부가 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보수 언론들도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조선일보는 2일 사설에서 "이 상황에 이르기까지 의료계와 정부, 정치권 누구 하나 책임감을 보이지 않았다"며 "정부는 미세조정을 요구한 대한의학회 등의 요구에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고, 국민의힘도 중간에서 조정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애초 협의체 구성을 제안한 민주당은 협의체에 참여조차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사설"협의체가 허무하게 파국을 맞은 데에는 여의정 모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며 "대통령실은 이날 협의체 중단에 대해 따로 입장을 내지 않았고, 고위 관계자가 '정부 입장은 변함이 없고 타협이 불가능하다. 협의체가 파행되더라도 바꿀 수 없다'고만 했다"면서 "의정 갈등이 이 지경에 이른 한 원인을 짐작하게 만든다. 어렵사리 마련된 대화의 불씨조차 살리지 못한 정부의 무능과 의료계의 무책임에 새해 인사가 '아프면 큰일 난다'가 될 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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