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제 계약 부부 소재…상처받은 두 남녀의 '구원 서사'
미스터리 요소로 긴장감 가미…공간 이미지와 음악도 존재감
(서울=연합뉴스) 김경윤 기자 = "나는 당신 안 꼬셔요. 그러니까 당신도 내 앞에서 편해져요. 당신이 그냥 당신이어도 내 앞에서 괜찮다고."
어린 시절 트라우마 때문에 한껏 웅크린 채 자신을 경계하는 한정원(공유 분) 앞에서 1년짜리 계약 아내가 된 노인지(서현진)는 건조하게 말한다.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도, 심지어 잘 아는 사이도 아니지만 부부다. 심지어 두 사람은 정원의 전 부인 이서연(정윤하)의 추천으로 결혼하게 됐다.
계약으로 성사된 결혼이자 끝이 정해진 관계다.
누군가의 눈에는 비정상적인 가짜 부부지만, 둘은 함께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트렁크'가 29일 그 속의 복잡하고 섬세한 이야기를 대중 앞에 꺼내놓았다.
부유한 음악 프로듀서인 정원은 하루도 약 없이는 잠들지 못한다.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절규, 자신의 무력함이란 악몽 속에서 한 치도 성장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됐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귀를 막아 버텼을 뿐이고, 나이가 든 뒤에는 헤드폰을 끼고 음악 속에 묻혀 안식을 찾았다.
아이처럼 전 부인 서연에게 매달리지만, 돌아오는 것은 다정하게 밀어내는 손길뿐이다. 계속 자기와 만나고 싶으면 1년짜리 기간제 결혼을 하라는 무리한 요구도 한다.
인지는 결혼 직전 남자친구의 잠적으로 파혼했다. 기다림과 부정, 분노 끝에 인지는 '결혼이 역겹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결혼제도에 복수라도 하듯 VIP 기간제 결혼 서비스 회사 직원으로 일하며 지금까지 4번의 결혼생활을 마쳤다.
지금껏 만난 남편들은 대부분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이었다면, 이번에는 몸은 멀쩡하지만 정신이 위태위태한 정원을 만난다.
이 시리즈는 결혼과 관계, 상처와 관련한 여러 질문을 던진다.
정원과 인지는 가짜 부부지만, 오히려 이 거짓 관계 속에서 진짜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편안함을 느낀다.
평소 불면증에 시달리던 정원이 인지와의 대화 끝에 약을 먹지 않고도 불편한 소파에서 깊은 잠을 자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지는 한 차례 파혼으로 가슴에 깊은 흉터가 남았기에 상처투성이인 정원을 끌어안을 수 있다.
정원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던 거대한 샹들리에 일부가 깨지고, 인지가 정원 위로 떨어지는 유리 파편을 막아서며 피를 뚝뚝 흘리는 장면도 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규태 PD는 제작발표회에서 "비현실적인 것들에서 오는 현실성, 가짜 속에서 진짜 사랑을 찾는 과정"이라며 "인지와 정원의 '구원 서사'를 시청자들이 각자 해석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트렁크'는 공유와 서현진이라는 두 배우의 조합만으로도 크게 주목받았다.
설레는 '로맨스 장인'인 두 배우지만, 이번에는 좀 더 온도와 조도를 낮춰 부서지기 쉬운 모호한 감정을 표현했다.
등장인물들은 서로 대놓고 욕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 뒤에 감정을 숨기고,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모순된 마음이 새어 나오면 눌러 넣는다. 마치 딱딱한 트렁크에 욱여넣은 짐들처럼.
정윤하가 입체적으로 표현한 서연의 비틀린 캐릭터도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축을 차지한다.
서연은 정원이 매달릴 때마다 우월감을 느끼고, 그를 시험하듯 기간제 결혼을 '벌이자 휴가'라며 강요하는 인물이다.
정원이 자기 말 한마디 때문에 샹들리에를 버리지 못하고, 자기 차를 부수며 질투하는 것을 여유롭게 지켜보던 서연은 정원이 자기 손에서 벗어나려 들자 불안해한다.
이들의 이야기 사이 사이에 안개 낀 호숫가에 떠오른 시체와 트렁크, 인지 곁을 맴도는 수상한 남자가 등장하면서 극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공간과 음악의 존재감도 두드러진다.
정원이 사는 거대한 집의 나선형 계단과 거대한 샹들리에, 비정형적인 아치 형태의 복도와 창이 이질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정원과 인지가 가까워지는 장면 뒤로는 탱고 음악이 깔리고, 정적인 장면에선 백색소음이 청각을 곤두서게 한다.
'그들이 사는 세상', '아이리스', '괜찮아, 사랑이야',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등을 만든 김 PD가 연출했다. 총 8부작으로 제작됐으며, 언론에는 1∼5회가 먼저 공개됐다.
과도한 노출 장면들이 도구처럼 쓰인다는 점은 아쉽다.
특히 정원의 마음을 재보며 불안해하다가 재혼한 남편 윤지오(조이건)와 벌이는 서연의 정사 장면이 길고 과감하다.
정원의 트라우마 회상 장면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상대로 부부간 강압적인 성관계를 하는 모습도 다소 불편하게 다가온다.
김 PD는 "베드신은 그 인물의 캐릭터나 상황적인 감정선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었다"며 "자극적인 요소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he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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