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강력범죄에 신원 공개 여론 고조…정부 제도 도입
충분한 증거시 등 공개 한정에도 정당성 논란 여전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기자 = 최근 한 현역 장교가 동료 여성 군무원을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한 사건을 계기로 피의자의 신상정보 공개가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섰다.
경찰이 지난 7일 피의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하겠다고 결정하자 당시 피의자 신분이었던 양광준(38)씨가 이런 결정에 반발, 법원에 신상 공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당시 온라인에선 '토막 살해범에게 이의신청도 있냐?', '이런 범죄자는 무조건 신상을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였다.
춘천지법은 양씨의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고, 결국 양씨의 신원이 공개되면서 여론은 잠잠해졌다.
하지만 법원에서 유죄로 확정판결을 받은 범죄자가 아니라 수사 단계에서 범죄 혐의를 받는 피의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제도의 정당성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국민의 '법 감정'을 반영해 신상정보 공개 제도가 도입되고 이후 한층 강화됐지만 피의자의 인권이나 다른 가치도 고려돼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 과거엔 언론이 피의자 신상정보 먼저 보도
피의자 신상공개제도는 그 정보를 공개하는 주체가 경찰이나 검찰이다. 즉, 정부가 특정 요건을 갖춘 경우 절차를 밟아 피의자의 신상정보를 대중에게 알리는 제도다.
예전엔 정부가 피의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할지 말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피의자의 신상정보가 언론을 통해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사건 기사에서 피의자의 이름과 성명, 심지어 거주지 주소를 쓰는 것이 '관례'였다.
1990년대 들어 변화 조짐이 있었다. 우선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서울고등법원이 1996년 "범인과 범죄혐의자에 대한 공개적 신원 노출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으며, 그에 따라 범죄에 관한 언론의 보도에 있어서는 관계인의 신원을 밟힐 수 없다"는 '익명 보도 주의'를 천명했다.
대법원도 1998년 해당 서울고법 사건을 다룬 판결에서 "범죄 자체를 보도하기 위해 반드시 범인이나 범죄 혐의자의 신원을 명시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고, 범인이나 범죄혐의자에 관한 보도가 반드시 범죄 자체에 관한 보도와 같은 공공성을 가진다고 볼 수도 없다"고 판시했다.
2005년엔 국가인권위원회가 경찰이 피의자를 호송하는 과정에서 차량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호송차 안에 수갑을 채운 채 피의자의 얼굴을 보이도록 한 행위가 피의자의 인격권,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한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관련 제도 개선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에 경찰은 피의자의 얼굴이나 신원을 공개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언론도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익명 보도를 했다.
하지만 흉악 범죄가 잇달아 발생하자 피의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졌다.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당시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가 비등하자 가해자로 알려진 밀양 고교생들의 사진과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퍼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신원이 공개된 이들 중엔 이 사건과 무관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2009년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이 터지자 이젠 언론이 발 벗고 나섰다. 일부 신문사를 시작으로 언론사들이 일제히 강호순의 실명과 사진을 공개했다. 이는 흉악범의 신상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을 등에 업은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정부도 결국 정부 입법으로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특정강력범죄법)의 개정을 추진했고, 2010년 4월에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제도가 도입됐다.
◇ '신분증 사진도 한계'…신상공개제도 실효성 논란
개정된 특정강력범죄법은 '범행 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특정강력범죄 사건' 중 특정 요건을 갖췄을 때 해당 피의자의 신상 정보를 공개할 수 있게 허용했다.
그런데도 대중의 불만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대중은 흉악범의 '얼굴'을 원했지만 경찰이 이런 요구를 충족시켜 줄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당 법이 '피의자의 얼굴, 성명, 나이 등 신상에 관한 정보를 공개할 수 있다'라고만 했을 뿐 구체적인 방법론을 명시하지 않은 탓이다.
경찰은 신상정보 공개 결정이 난 피의자가 이동할 때 마스크를 씌우는 등의 조처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피의자의 얼굴이 언론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도록 했다.
하지만 변수가 발생했다. 2019년 전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붙잡힌 고유정이 경찰서나 법원에 오갈 때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것이다. 고씨의 '머리카락 커튼'에 신원정보 공개제도가 무력해진 셈이다.
이에 경찰은 '피의자가 동의하면 머그샷(범죄자 인상착의 기록 사진)을 배포할 수 있고 동의하지 않으면 신분증 사진을 공개할 수 있다'는 법무부와 행정안전부의 유권해석을 받아 2020년 'n번방 사건' 주범 조주빈의 신상정보 공개 때부터 피의자의 신분증 사진을 공개했다.
그래도 논란은 여전했다. 신분증의 사진이 예전에 촬영됐거나 과도하게 보정돼 현재 피의자 모습과 크게 다른 까닭에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2022년 신당역 살인사건 피의자 전주환, 지난해 신림동 흉기 난동 피의자 조선, 같은 해 또래 여성 살인사건 피의자 정유정 등의 신상 공개 논란을 거치면서 신분증 사진의 한계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현행 '특정 중대범죄 피의자 등 신상정보 공개에 관한 법률'(중대범죄 신상 공개법)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 중대범죄 신상 공개법, 피의자 머그샷 강제 촬영 허용
중대범죄 신상 공개법은 특정강력범죄법과 달리 신상정보 공개 결정일 30일 전후 모습을 공개하도록 하고 필요한 경우 수사기관이 강제로 피의자의 얼굴을 촬영할 수 있게 했다.
공개 대상 범죄도 내란·외환, 현주건조물 방화치사상, 중상해·특수상해,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조직·마약범죄 등으로 넓혔다.
재판 단계에서 신상정보를 공개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피고인'도 신상정보를 공개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신상정보 공개심의위원회에 대한 법률상 근거 규정을 마련하고, 피의자 의견 청취 절차, 신상정보 공개 전 5일 이상의 유예, 불송치·불기소·무죄 확정 시 형사보상 등의 조항을 신설해 절차상 문제의 소지도 줄였다.
올해 1월 중대범죄 신상 공개법이 시행된 이후 이별 통보 여자친구 살해 피고인 김레아(4월), 강남 오피스텔 모녀 살해 피의자 박학선(6월), 70대 아파트 이웃주민 살해 피고인 최성우(9월), '순천 묻지마 살해' 피의자 박대성(9월), 양광준(11월), 여자친구 살해 피의자 서동하(11월) 등의 머그샷이 공개됐다.
◇ 찬반양론 대립…'신상 공개 만능주의' 지적도
국민의 법 감정에 발맞춰 피의자의 신원정보 공개 제도가 강화됐지만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제도가 도입된 이래로 신상 공개의 정당성을 둘러싼 찬반 입장이 대립해 왔다.
중대범죄 신상 공개법안에 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찬성론은 ①피의자의 기본권보다 국민의 알권리 및 공익적 목적이 중요 ②일반 국민을 흉악범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의 확보 필요 ③추가 범죄 신고나 증거의 확보에 도움 ④재범 방지 ⑤주요 외국에서도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하는 경향 ⑥국민 여론 상 신상 공개에 관한 사회적 합의 등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반대론은 ①피의자의 초상권과 프라이버시권 등 기본권 침해 ②헌법상 무죄추정 원칙 위배 ③얼굴 공개로 인한 피의자의 재범 방지 및 범죄예방 등의 효과 불분명 ④공개 대상 범죄를 명확하게 확정하기가 어려움 ⑤얼굴 공개는 공익성보다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 ⑥피의자의 가족에게 피해를 발생시켜서 형벌의 자기책임 원칙에 반하고 실질적인 연좌제 작용 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이 가운데 이 법의 제정 취지인 국민의 알권리 보장과 범죄예방을 놓고도 의견이 갈린다.
범죄 예방과 관련해 문재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작성한 ''특정 중대범죄 피의자 등 신상정보 공개에 관한 법률'의 위헌성 검토'(2024) 논문에 따르면, 신상공개제도의 범죄예방에 효과가 없다는 실증적인 연구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단, 이 제도가 없었으면 대상 범죄가 더욱 늘었을 것이라는 반론이 틀렸다는 결정적인 자료도 없는 탓에 범죄 예방효과에 대한 찬반양론이 가능한 상황이다.
국민의 알권리는 이 제도로 충족되는 것은 명확하다. 정부가 이 제도를 통해 피의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면 국민이 피의자의 신상정보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단, 형량의 저울에서 국민의 알권리 반대편에 놓인 무죄추정의 원칙 등의 가치를 훼손할 만큼 국민의 알권리 충족이 중요한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중대범죄 신상 공개법은 그 죄를 범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을 경우에만 피의자의 신원을 공개하도록 했지만, 피의자는 피의자일 뿐 유죄로 확정판결을 받은 자가 아니다.
김광현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제도의 현황·존폐·보완 검토'(2023)란 보고서에서 "무죄추정 원칙은 우리 형사절차의 전 과정을 지배하는 지도원리"라며 "국민의 알권리가 무죄추정 원칙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에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흉악 범죄가 세간의 주목을 받을 때마다 피의자 신상공개제도가 확대돼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받는 '신상공개제도 만능주의' 풍조도 문제로 지목된다.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연구원의 강서영 책임연구관은 '피의자 신상공개제도에 관한 헌법적 연구'(2023)에서 이런 풍조가 "범죄의 본질을 왜곡하고 예방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라고 짚었다.
이어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사회의 안전을 방위해야 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라며 "그럼에도 국가는 강력범죄 피의자를 대중 앞에 내세우고 전시함으로써 이런 국가의 중요한 책무를 손쉽게 완료한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pseudoj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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