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전에서 만난 신진서(왼쪽)와 딩하오. 신진서를 꺾은 딩하오는 여세를 몰아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사진제공 | 한국기원
2024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가 22일 막을 내렸다.
삼성화재배는 1996년 창설해 올해로 29번째를 맞은, 최고 권위의 세계기전 중 하나다. 29회를 치러오는 동안 삼성화재배는 다양하고 파격적인 진행방식으로 ‘도전과 실험의 기전’으로 불려왔다.
‘초청’ 형식으로 진행되던 보수적인 바둑계에서 실력 위주의 ‘오픈’ 개념을 도입한 대회도 삼성화재배였고, 지금은 일반화된 자비 참가, 통합예선, 아마추어 문호개방 등도 모두 삼성화재배에서 시작됐다. 삼성화재배는 세계바둑계의 판도를 보는 바로미터였다.
이번 대회는 아쉽게도 지난해에 이어 또 한 번 ‘중국 환호’, ‘한국 침묵’의 결과였다. 두터운 선수 층의 중국, ‘원톱’ 신진서 의존도가 높은 한국바둑의 장단점을 고스란히 노출한 대회였다.
8강전 대진추첨에서 최고의 난적 신진서를 뽑은 딩하오가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다.
딩하오는 역대 5번째로 2연패에 성공했고, 당이페이는 3년 전 기록한 자신의 최고성적인 16강을 훌쩍 뛰어넘었다. 중국은 2019년 제24회 대회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4강 무대를 독식했다.
‘세계가 쫓는’ 신진서는 한국선수로선 유일하게 8강에 올라 기대를 모았지만, 중국의 인해전술에 막혀 복수우승의 꿈을 내년으로 미뤄야 했다.
중국의 기세는 통합예선부터 거셌다. 13장의 본선 티켓 중 11장을 중국이 쓸었다. 19차례 열린 통합예선 중 최고기록이었다. 한국은 강동윤과 무명의 안정기만이 예선을 통과했다.
중국의 기세는 본선에서도 이어졌다. 32명 본선 참가자 중 절반인 16명으로 시작한 중국은 2회전에 10명을 올리며 점유율을 63%로 끌어올렸다. 커제(4위), 당이페이(3위), 천센(22위), 딩하오(5위)는 한국의 최상위급 박정환(2위), 변상일(3위), 김명훈(5위), 강동윤(6위)를 1회전에서 탈락시켰다.
2회전이 끝났을 땐 중·한 선수 차이가 7대1로 벌어졌다. 최정·김은지에 랭킹 4위 신민준마저 대진표에서 자취를 감췄다. 신진서만 살아남았다.
중국 선수단은 대회 내내 신진서의 기보를 집단연구했다고 한다. 누군가 한 명이 신진서만 잡아주면 중국이 우승한다는 생각이었고, 작전은 적중했다.
전 세계 초고수들의 추격을 받고 있는 1인자 신진서. 이번 삼성화재배 8강 탈락은 그의 어깨에 지워진 짐의 무게를 실감케 했다.
대회 첫 출전에 4강까지 오른 진위청은 20살로 신진서보다 4살 어리다. 중국갑조리그 다승왕에 오르며 동갑내기 왕싱하오와 대륙의 1인자를 다툴 재목으로 꼽힌다. 본선에 오른 한국선수 중 신진서보다 어린 선수는 17세의 소녀기사 김은지 뿐이었다.
그래도 웃을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한국의 최대 성과는 최정·김은지의 활약이었다. 한국여자랭킹 1·2위인 두 선수는 세계대회 우승 경험이 있는 구쯔하오와 셰얼하오를 이기고 16강에 나란히 올랐다. 세계대회 사상 첫 여자동반 16강기록이었다. 2년 전 준우승했던 최정처럼 김은지도 남자선수와의 대결에서 경쟁력이 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신진서를 받쳐줄 주력부대의 부재는 심각하다. 박정환은 쇠락의 기미를 보이고, 변상일은 기복이 심하다. 재목으로 꼽히던 한우진, 문민종은 아직 종합대회 우승경험이 없다.
진위청, 왕싱하오 같은 젊은 강자의 육성이 시급하다. 지금의 여자리그, 레전드리그와 같은 10대 선수들만의 리그 창설이 절실한 이유다.
한국은 29번의 삼성화재배에서 14차례 우승했다. 중국이 13회, 일본이 2회였다. 내년 대회는 중국에게 동률을 허용하느냐, 차이를 벌리느냐가 걸린 대회가 될 것이다. 그 짐을 더 이상 신진서에게만 지울 수는 없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한국기원의 분발도 요구된다. 프로9단 양재호 사무총장의 미래를 읽는 수읽기와 바둑계 안팎을 아우르는 화합력, 행정력이라면 내년을 기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신진서만 잡으면 우리가 우승”이라는 중국선수들의 말만큼은 내년 대회에서 듣고 싶지 않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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