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조창용 칼럼니스트] 소액주주에게도 대기업 이사의 충실의무를 지우는 '상법 개정안'이 점입가경이다. 민주당의 입법의지를 읽은 국힘당의 저지 노력이 양 당사자들인 소액주주 단체와 대기업 등기이사 사장단 사이의 기싸움으로 확산됐다. 급기야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모든 정치 사회 기업 진영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재계는 상법 개정안이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주 보호는 선진국에서 일반화돼 있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국내 증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려면 상법 개정안은 이번 정기국회 안에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
현행 상법의 ‘이사의 충실 의무’ 조항은 이사의 충실 의무의 대상으로 회사만 언급하고 있다. 이 때문에 총수 등 지배주주의 이익을 위해 나머지 주주의 이익을 희생시켜도 회사만 손해가 없다면 이사가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이에 따라 인수합병, 분할 등을 추진할 때 일반 주주의 이익이 침해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고, 이는 한국 주식시장이 저평가되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상법 개정 시도는 수년 전부터 있었지만 올해처럼 16개 기업 사장단이 한자리에 모여 입법 저지를 호소한 것은 드문 일이다.
상법 개정안은 이사 충실의무 대상을 '모든 주주'로 규정하고 있다. 현행법에서 이사가 충실 의무를 다해야 할 대상을 '회사'로 규정한 데 비해 광범위하다.
과거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LG화학의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 합병 과정에서 소액주주 이익이 훼손됐다는 논란이 컸다. 앞으로 이런 문제를 방지하고 밸류업 효과를 도모하겠다는 게 개정안의 목적이다.
그러나 아직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지 않은 대기업이나 사업 판단에 따라 대규모 증자 등을 결정해야 하는 기업에는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게 재계 중론이다. 소액주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별도 장치를 마련하는 등 세밀한 전략으로 해결할 수 있음에도 '법 개정'이라는 성과만 내세우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소액주주를 대변하는 단체에서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단체의 한 관계자는 "주주들이 가장 많이 관심갖고 있는 이슈는 횡령 배임을 저지른 대주주의 주주총회에서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한국 증시에서 거래 정지돼, 상장 폐지로 가는 종목들을 살펴보면 이사의 횡령이나 배임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런데도 논란의 이사가 버젓이 다음, 다다음 주주총회에서도 자신의 표를 다 행사하는 경우도 많다. 횡령 배임을 저질렀는데도 당사자를 회사에서 쫓아내거나 제재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지 않고 있다.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주셨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상법 개정을 둘러싼 재계와 투자자간 입장이 엇갈리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공개 토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지난 21일 한국경제인협회와 국내 주요 16개 기업 사장단이 상법 개정에 반대하는 긴급성명을 내는 등 집단 반발하자 토론을 통해 입장을 들어보겠다며 조정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이 대표는 22일 국회에서 민주당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재계는) 기업 경영에 애로가 예상되니 자제해 달라고 하는데 개인투자자, 소액 투자자들은 신속한 상법 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며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다툴 것이 아니라 공개 토론을 통해 과연 누구 주장이 옳은지 쌍방 주장을 통합해 합리적인 결과를 내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고 합리적 방안을 찾을 수 있다”면서 “토론 뒤 정책위의장 등이 쌍방의 입장을 취합한 후에 우리 당의 입장을 확실히 정리하겠다. 기업계와 투자자 측도 신속하게 공개 토론에 응해주길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상법 개정'을 놓고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아 온 김병환 금융위원장조차 24일 답을 내놓았다. "법 개정은 부작용이 많아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으로다. 사실상 상법 개정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힌 셈이다. 상법 개정은 회사 이사의 충실의무를 다해야 하는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24일 오전 KBS 일요진단 라이브 방송에 출연한 김 위원장은 "민주당이 상법 개정안을 낸 취지는 기업 지배구조에서 소액주주를 보호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위원장 입장에서도 기업 지배구조가 보다 투명하게 가야겠다는 데 동의한다. 다만 그 방법이 상법 개정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선 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상법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법리적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기업 경영이나 자본시장에 미칠 부정적 영향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면서 "이사가 회사에 대해 충실의무 다하도록 돼 있는데 주주까지 포함되면 의사결정이 지연될 수 있다.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것도 덤"이라고 밝혔다.
국민의힘 시도지사협의회도 24일 입장문을 통해 "지난 19일 야당이 발의한 '상법 개정안'은 기업을 위기로 몰아넣는 메가톤급 입법이다"라며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많은 기업이 기업사냥꾼의 제물이 되고, 소송 남발로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협의회는 "야당이 추진하는 상법 개정안에는 우리 경제를 흔들고, 기업의 발목을 잡는 내용의 '개정 내용'을 담고 있다"며 "야당이 제시한 상법 타협 가능 대안은 무의미하니, 입법을 자제해달라"고 촉구했다.
이어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당내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의견을 신속히 수렴해 단합된 모습을 보여달라"며 "당 차원에서는 상법 개정안의 위험성을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달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윤석열 대통령은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질 경우, 재의요구권을 행사해달라"고 건의했다.
이번 상법 개정안은 지배주주로부터 독립된 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길을 확대하고, 이들이 선임된 이후 지배주주보다는 회사와 일반 주주의 편에 설 수 있도록 법적 의무를 강화함으로써 앞서 언급한 각종 사익 편취와 약탈적 자본 거래를 막아보자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또 이사들이 주주 이익에 더 충실해져야 하는 만큼 주주 환원 등 자본 배치 효율성에도 더 많은 관심을 둘 수밖에 없을 것이며 현재 지지부진한 정부의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에도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재계는 상법 개정안에 대해 결사반대다. 국민의힘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논거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먼저, 재계는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 명시가 기업의 투자와 신산업 진출을 어렵게 하고, 소송 남발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회사법 학자는 이사와 회사 또는 이사와 주주의 이해가 상충하는 상황에서만 충실의무가 적용된다고 보고 있으며, 개정안도 이런 점을 제안 이유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지배주주가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면 경영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투자하고 신사업에 진출할 수 있다. 또 지배주주와 그 특수관계인이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 소수주주 과반결의제도를 활용한다면 지배주주가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거래마저도 공정성 시비 없이 진행할 수 있다. 또 회사의 손익에 영향을 미치는 거래는 이미 규율되고 있으니 이번 개정으로 새롭게 규율되는 것은 합병 등 자본거래에 불과하다.
또 주주에 대한 의무 위반을 이유로 주주들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려면 여러 난관을 뚫어야 한다. 우선, 주주에 대한 의무 조항만 존재하고, 별도의 책임 조항이 없는 상황에서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미국과는 달리 입증 책임이 전환되지 않는 것 또한 큰 어려움이다. 소송이 너무 적을까 오히려 걱정된다. 한편, 주주에 대한 의무 위반을 이유로 배임죄가 성립하는지도 의문이다. 배임죄가 성립하려면 위임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상법은 회사와 이사 사이에 대해서만 위임 관계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와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관련해서 재계는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침해’와 ‘먹튀 조장’으로 맞서고 있지만 정말 철 지난 반론이다. 20년 전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대다수 국민이 자본시장에 참가하고 있는 2024년 현재 이러한 주장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외국계 펀드보다는 우리 토종 행동주의 펀드가 이들 제도를 더 많이 활용하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밸류업의 열매를 행동주의 펀드와 함께 누렸기 때문이다.
상당수 회사의 이사회를 외국 기관 연합이 장악할 것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이 없다. 이사들의 임기가 같은 해에 일제히 만료된다는 비현실적 가정에 근거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집중투표제를 극소수 나라에서만 활용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미국 대형 상장회사들은 평상시 과반 득표 제도를 통해 이사를 선임하지만 이사 선임을 위한 위임장 대결이 있는 경우에는 집중투표제도와 본질적으로 같은 최다 득표제로 전환해 이사를 선임하기 때문이다.
논란을 종합해보면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기업 거버넌스 문제의 핵심은 지배주주의 이해가 회사 또는 일반 주주의 이해와 상충할 때 이사들이 일방적으로 지배주주 편을 든다는 점이다. 회사의 손해가 예상됨에도 특정 계열사를 위한 일감 몰아주기 등을 용인하고, 일반 주주에게 불리한 조건임에도 계열사 간 합병과 주식 교환 등을 눈감아준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다.이젠 치욕스런 코리아디스카운트를 우리의 힘으로 끝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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