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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허드슨강 근처 나이악의 상인계층 집안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호퍼는 꽤 유복한 삶을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호퍼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왔다.
고교시절 학교신문에 그림을 그리면서 호퍼는 자기는 화가가 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의 부모는 호퍼를 자주 뉴욕에 데리고 다녔다. 그 영향으로 에드워드 호퍼는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호퍼는 삽화가로 처음 화가 생활을 했는데, 삽화가 자기 관심분야는 아니었지만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제한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까닭에 창작활동을 마음껏 할 수 없는 호퍼는 부모의 허락을 받고 파리로 갔다.
엄마가 소개한 하숙집에 살면서 다른 화가들처럼 자유분방하게 살지 않고 학구적이고, 착하게 지냈다고 한다.
다른 화가보다 빛에 관심이 많아 호퍼는 그동안 본인이 알던 것보다 더 많은 빛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최근 발견된 편지에 따르면, 10년 동안 알타라는 여자에게 구애했는지만 결국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인 1909년 그는 <여름 실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하의를 탈의한 여자가 바닥에 앉아있는 그림이다.
이는 해당 여성이 성적 트라우마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데, 혹자는 그림 속 여성이 호퍼 본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평소 그림을 통해 목소리를 내기 원했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그를 비판했다.
1913년 아모리쇼에서 <항해>라는 작품을 판 후, 10년 동안 작품을 팔지 못하던 호퍼는 1923년, 당시 꽤 잘 나가던 조세핀 니비슨과 첫 만남에서 운명임을 직감했다.
조세핀의 추천으로 사람들이 호퍼의 그림을 사기 시작했고, 조세핀의 도움으로 수채화 기법을 배웠는데 이는 호퍼가 유화를 그리는데 도움이 됐다.
호퍼는 평범한 주택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글로스터에서 그는 다른 화가들처럼 해변을 그리지 않고, <앤더신의 집> <철길 옆의 집>처럼 여러 집과 교회 등 건축물을 그렸다.
조세핀과 결혼한 후, 그의 그림은 좀 더 자유로운 색채를 보여줬다.
또, 호퍼의 그림에는 다른 화가들과 다르게 도시의 풍경만 그리지 그 안에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인물화를 그리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그를 인물화나 풍경화 전문 화가라고 단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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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매트>에서 한 여자가 혼자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고독을 즐기는 건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호퍼를 최고의 이야기꾼이라고 평가한다.
수다스럽고 활달한 아내와 달리 조용한 성격의 호퍼는 한 주제에 많은 관심이 생겨야 그림을 그리는 성격이라 1년에 2작품 정도를 그렸다.
다른 모델보다 편해서 아내를 모델로 삼았는데, 연극과 영화를 좋아한 까닭에 얼굴은 아내 대신 배우의 얼굴로 바꿔서 그리기도 했다.
호퍼는 히치콕의 영화를 좋아했는데, <사이코>는 오히려 반대로 히치콕이 호퍼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세핀은 호퍼의 매니저 역할을 잘 수행했지만, 같은 화가인데 자기는 그림 그릴 시간이 없어서 불만이었다.
조세핀의 일기에 따르면, 호퍼는 다정한 남편이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호퍼의 그림 속에선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없다. 심지어 눈을 마주치는 경우도 드믈다.
생전 조세핀은 한 인터뷰에서 남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에드워드 호퍼>는 히치콕과 뱅크시 등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화가 에드워드 호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림으로 사회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기 원했지만, 정작 그가 태어난 미국에선 그런 그럴 배척했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힘들었지 짐작케 한다.
또, 아내 조세핀을 만나 화가로 승승장구했지만, 정작 아내는 본인이 더 잘 나가던 화가였지만 남편 뒷바라지로 그림도 못 그리고, 그렇다고 호퍼에게 사랑받은 것도 아니어서 ‘예술가들의 예술가’였어도 가정엔 소홀한 호퍼의 이면을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에드워드 호퍼>는 27일 개봉한다.
/디컬쳐 이경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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