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독특한 집단을 낳았다. 거친 풍파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재벌이지만 ‘부의 대물림’ 시기만큼은 이들도 예외다. 그들이 갈라서고 쪼개질 때 나라 경제가 휘청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가 금융 계열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 왔다.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타가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자본과 금융시장 역할이 갈수록 긴요해지는 요즘, 재벌가의 숨은 조력자 혹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던 금융 계열사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올해 처음 ‘위기’라는 말을 안 들었다.”
삼성전자 관리자급 간부가 전한 최근 사내 분위기다. 입사 이래 20여 년 동안 ‘위기’라는 말을 듣지 않은 해가 단 한 해도 없었는데 올해 처음으로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기감을 느끼고 정신 똑바로 차리자’는 분위기일 땐 서로 위기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꺼낼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회사가 진짜 위기에 처하다 보니 그 누구도 위기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더라는 얘기다. 그만큼 삼성전자 임직원들간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위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19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각고의 노력으로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라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2010년 경영 복귀 당시 던진 메시지는 삼성그룹의 일원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칠 만큼 사회 전체적으로 위기의식을 고취시켰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 삼성전자 직원들이 '위기'를 입에 담지 않는 이유
2014년 그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10년이 흐른 지금, 선대 회장이 그토록 염려했던 ‘삼성전자의 위기’는 현실이 됐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전자의 시설투자는 약 53조원, 이 가운데 파운드리 부문에 15조원 이상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파운드리 주문 물량이 밀려든다는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는다. 주문이 없어 설비 ‘셧다운’ 뉴스만 전해질 뿐이다. 마치 선대 회장의 불길한 예언이 현실로 다가온 듯하다.
위기를 잘 극복하길 바라지만, 만에 하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면 그 때는 어떤 상황이 전개될까. 멀리 거슬러 갈 것도 없다. 핀란드의 노키아, 미국의 모토로라가 결과를 잘 보여줬다. 한때 초격차 기술을 기반으로 전 세계를 휩쓸었지만 혁신을 게을리하면서 순식간에 시장에서 사라졌다. 일본의 도시바 역시 150년 역사를 뒤로 한 채 끝내 지난해 말 상장 폐지됐다.
1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삼성그룹은 1999년 자동차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큰 타격을 입고 오랫동안 후유증에 시달린 바 있다. 하지만 업력 5년의 삼성자동차는 업력 55년의 삼성전자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요즘 급락했음에도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21일 기준 336조원. 현대차의 7배, 네이버의 10배다. 2~5위 기업을 다 합친 규모와 비슷하다. 게다가 반도체가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육박한다. 삼성전자가 몰락하면 국민경제도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실물시장뿐만 아니라 금융시장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삼성전자 주식으로 노후를 대비한 동학개미는 은퇴 이후의 삶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일개 개인이 느낄 충격이 이 정도인데 은행, 보험, 증권 등 자산운용을 주업으로 하는 금융회사들이야 말해 뭣할까. 이런 연유로 금융감독 당국은 금융기관들이 특정 회사의 유가증권을 지나치게 많이 보유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한 회사의 위기가 금융회사의 위기로 전이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취지에서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국내 대기업들의 과도한 중복투자가 결국 은행의 연쇄 도산으로 이어진 점을 떠올려 보면 수긍이 가고도 남는다.
■ 삼성전자 위기와 삼성생명의 상관관계
다만 삼성생명은 우리나라 금융회사 중 유일하게 해당 규제에서 벗어나 있다. 보험업법 제106조는 대주주 및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자회사가 발행한 채권 및 주식 소유의 합계액이 총자산의 3%를 초과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 위반시 5년 이하 징역 등의 처벌을 받는다. 올해 6월말 기준 삼성생명의 총자산은 약 320조원. 특정 회사의 주식 소유액이 9.6조원(3%) 이내여야 한다. 하지만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보유 지분은 8.51%(21일 종가 기준 28.7조원)로, 법에서 규정한 한도를 19.1조원이나 넘어선다.
그럼에도 처벌을 받지 않는 이유는 하위 ‘보험업 감독 규정’에서 주식 평가액을 시가가 아닌 취득원가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모인 총자산은 시가로, 분자인 주식 소유액은 원가로 평가하는 희한한 방식이다. 삼성생명이 1980년 취득한 삼성전자 지분(5억815만7148주)의 원가는 약 5444억원(주당 1072원)으로, 이를 적용하면 규정 한도(9.6조원)의 5.7%에 불과하다. 44년 전 투자한 5000억원이 56배 불어나 28조원이 됐는데 평가액은 28조원이 아니라 5000억원을 반영하고 있는 것. 금융당국이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주식 과다 보유를 허용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편의를 봐주고 있는 셈이다.
삼성그룹에 특혜를 주는 편법을 바로잡기 위해 민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2014년부터 보험업법 개정 노력이 있어 왔지만 ‘발의-폐기’를 반복하며 수포로 돌아갔다. 삼성의 반대와 금융당국의 미온적 대처가 원인이었다. 올해 출범한 22대 국회에서도 일명 ‘삼성생명법’ 발의 여부는 주요 이슈 중 하나지만 총대를 멨다는 의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삼성만을 위한 특혜법은 또 있다.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제24조다. 금산분리를 위해 금융 계열사가 다른 비금융 계열사 주식을 5% 이상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재용 3세 세습 과정에서 삼성생명 등 금융계열사들은 이를 버젓이 어기고도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삼성이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며 법률을 개정하고 부칙을 만들어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보유를 예외로 인정해 줬다.
■ 삼성의 법률 접근법 "지키지 말고 바꿔라"
본론으로 돌아가서, 만약 삼성전자에 심각한 위기가 닥친다면 삼성그룹 금융계열사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독립경영이 보장되지 않는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증권, 삼성카드는 법이 허하는 선에서 최대한의 금융지원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과거 삼성자동차 사례에서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 당시 삼성생명의 무담보 신용대출 규모만 4200억원에 달했다. 1999년 4200억원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최소 4조원 이상이다. 만일 삼성생명이 과거 삼성자동차에 한 것처럼 미래 어느 시점에 천문학적인 신용대출을 삼성전자에 지원하게 된다면 삼성생명 주가는 온전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삼성생명 보험계약자들의 보험금은 안전할 수 있을까.
올해 6월말 기준 삼성생명의 총자산에서 삼성전자 지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9.0%에 달한다. 삼성전자 주가가 급락하면 삼성생명의 순자산 규모도 크게 쪼그라들고, 건전성 지표인 지급여력비율(K-ICS) 역시 추락하는 구조다. 최악의 상황이 도래해 삼성전자 주식이 휴지조각이 될 경우 보험업법에 명시된 자산운용의 안정성, 유동성, 수익성, 공익성 원칙은 공염불로 전락하고, 피해는 고스란히 보험계약자들에게 전이될 수밖에 없다.
물론 시장에선 ‘설마 삼성전자에 뭔 일이 생기겠어’란 분위기가 여전히 우위에 있다. 하지만 지난 세월 ‘설마’가 ‘현실’로 다가온 경우는 부지기수다. 이건희 전 회장의 말처럼 ‘글로벌 일류기업’이 한순간에 몰락한 사례도 차고 넘친다. 지금이라도 삼성그룹에 금산분리 원칙이 엄격히 적용돼야 하는 이유다.
증권가의 한 관계자는 “삼성생명 이사회가 회사와 주주, 보험계약자의 이익에 충실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룹 총수의 지배력 유지가 최우선 고려사항일 것”이라며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상법 개정이 대안이 될 수 있을 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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