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16 쿠데타와 중앙정보부
박종희는 육사 5기 김재춘, 8기 김중필과 김형국, 9기 강상욱과 은밀히 만나면서 쿠 데타 계획을 진행해 나갔었다. 청와대, 방송국, 육본을 일시에 점령하기 위해서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영등포의 제6군 관구사령부와 부평의 제33사단, 수색의 제 30사단, 서울 동부의 육군 6군단 포병대 5개 대대, 김포의 해병대 제1여단, 육군 제1공수특전단, 지방 주요 도시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전투부대, 육군본부 내부 협조 세력 등 5천여 명 이상의 군인을 동원해야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종희는 자정을 기해 영등포에 있는 제6군 관구사령부를 먼저 장악했고, 김포에서는 해병대 제1여단이 박종희와 합류하기 위해 한강을 지나 서울로 향했다. 3시경, 주한 미군 사령관 매그루더가 주한미국대사 마셜 그린에게 전화를 걸어 반란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는 그 시간, 마샬 그린은 박 선생과 함께 있었고 이미 군사혁명에 대한 설득을 한 후였다.
“대사님! 우리는 지금 혼탁한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기 위해 목숨을 걸고 궐기한 것입니다. 만약 대사님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몇 시간 내에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이미 서울 동서남북 외곽에 주둔한 병력은 대부분 혁명군에게 가담하였습니다. 자칫하면 미8군과도 유혈 사태가 날 수 있고, 북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마샬 그린 대사는 박 선생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내가 무엇을 해주면 좋겠소?”
“미8군이 직접 나서는 것만 막아 주시면 됩니다. 이 유혈 사태만큼은 막아야 합니 다.”
“알겠소!”
청와대의 윤보선 대통령은 북한군이 휴전선 일대에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매그루더 사령관을 불렀다. “휴전선 상황을 알고 있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휴전선 쪽 1군 병력의 일부만 빼면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습니다.”
“뭐요? 휴전선을 더 보강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병력을 빼다니 이게 말이 되오?” 윤보선 대통령의 언성이 높아졌다.
“미군을 동원해서 반란군을 진압해 주시오.”
“안 됩니다. 우리 미군과 유엔군은 내전에는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원칙입니다.”
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매그루더 사령관의 이 한마디가 박종희의 운명 을 갈라놓았다. 일찌감치 행동을 개시한 6군단 포병단이 남산까지 밀고 들어와 육군 본부를 장악했 다. 육군본부를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종희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에게 군사혁명의 선두에 서 줄 것을 간청했으나 장도영은 거절했다. 국군 통수권자인 윤보선 대통령은 유혈 진압만은 안 된다고 1군의 차출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고 국무총리 장면은 연락조차 끊긴 상황에서 장도영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쿠데타가 성공하는 발판이 되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종희와 김중필은 장교 250명과 사병 5,000명으로 새벽 3시 서 울을 장악하고 2시간 뒤에 방송을 통해 거사의 명분을 밝히고 ‘혁명 공약’을 선포했다. 5·16 쿠데타가 성공한 것이다. 육군본부 상황실에 임시로 설치한 군사혁명위원회는 KBS 라디오 5시 뉴스를 통해서 군사혁명 소식과 혁명 공약을 알리고, 관측기인 L-19 6대로 혁명 공약을 담은 삐라 10만 장을 서울 시내에 뿌렸다. 이 공약은 김중필 주도로 작성되었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우리 군은, 오늘 새벽을 기해서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우리 군이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 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겠습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 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겠습니다. 애국 동포 여러분, 저희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해 주시고, 동요 없이 각자 직장과 생업을 평소와 다름없이 유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육군 중장 장도영’ 1961년 5월 18일, 박종희 소장, 박종규 소령, 차지철 대위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 의 5∙16 군사혁명 지지 시위를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1961년 6월 10일, 법률 제619호 ‘중앙정보부법’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발족한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된 국내외 정보 사항 및 범죄 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 부서의 정보, 수사 활동을 지휘, 감독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중앙정보부는 대통령 직속의 최고권력기구이면서 현역 군인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 여 비상계엄 상태에서도 군부가 모든 분야에 실질적인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기획된 조직이었다. 중앙정보부 청운동 안가에서 박종희와 김중필이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 임자에게 달렸어. 법도 만들었으니 시끄러운 빨갱이들을 싹 다 잡아들여!”
“의장님, 염려 마십시오. 제 밑에 있는 특무부대에서 일단 3천 명을 차출해서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3년 안에 중정 요원을 30만 명으로 증원하겠습니다. 30만 명이면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자네가 책임지고 알아서 해.”
“의장님, 긴히 상의드릴 사안이 있는데…”
“뜸 들이지 말고 이야기해.”
“멜로이 유엔군 사령관이 전한 말인데, 우리나라에 미군을 위한 마땅한 위락시설이 없어 연간 3만여 명이 일본으로 휴가를 간다고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무언가 조치를 해야지. 일본에 좋은 일 시킬 순 없지 않은가? 방법이 있는가?”
김중필은 가지고 온 지도를 펼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네, 의장님. 여기 이곳이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위치입니다.”
“이 위치면 조금 외지면서 시내로 나오기도 좋겠군… 알아서 진행해”
워커힐 호텔은 이렇게 중앙정보부 주도로 건설되었다. 중앙정보부는 방대한 조직을 활용하여 반정부 세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한편, 막 대한 자금을 만들어 독재 정권의 철저한 하수인 역할을 했으며, 여론을 정부에 유리하게 조성하는 기획 업무에 공을 들였다. 1961년 7월 3일 반공법을 공포하여 중정을 최고의 공포기관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반공법은 공산 계열의 활동에 가담하거나 이를 방조한 자의 처벌에 관한 법률이다. 국가보안법이 일반적인 반국가 행위의 처벌법이라면, 반공법은 공산 계열의 활동에 관한 처벌법으로, 국가보안법보다 한수 위의 특별법의 성격을 띠고 있어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야당과 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반공법으로 인해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 금지되고, 특히 언론에 대한 탄압이 대대적으로 시작 되었다. 한국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이 새로운 정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두 나라가 있었다. 바로 북한과 미국이었다. 케네디가 대통령이던 시절은 반공주의가 미국인들로부터 지지를 받던 시기였다. 동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은 1961년 베를린에 장벽을 설치했고, 1년 후에는 ‘쿠바 미 사일 위기’로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의 공포 속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또한 베트 남에서는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응오딘지엠 정권과 공산당이 싸우는 중이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에서 존 F. 케네디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반공 정책을 추진했다. 한국의 5∙16 군사 쿠데타는 존 F. 케네디가 반공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박종희의 쿠데타 계획을 포착한 미국 CIA는 5월 16일 케네디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했으나 상황을 주시하며 일단 지켜만 보자고 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박종희가 해방 이후 남로당에 가입했던 사실을 CIA로부터 보고를 받고 박종희를 의심하고 있었고, 박종희는 쿠데타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케네 디 대통령을 설득하는 일이 급선무였던 상황이었다.
1961년 11월 11일, 미국 행 비행기에 오른 박종희는 11월 14일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백악관에서 1시간 20분 동안 정상회담을 했다. 이 회담에서 박종희는 케네디에 게 자신의 반공 사상을 증명해야 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한국은 미국과 친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당연합니다.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미국과 우방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군사 쿠데타로 이룬 정권으로 그게 가능합니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케네디를 보며 박종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서두르듯 내뱉았다.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할 용의가 있습니다.”
케네디는 반색하며 다가가서 박종희의 손을 잡았다. 김중필의 조언이 제대로 먹힌 순간이었다. 박종희는 이 한마디로 완벽한 친미 반공의 면모를 입증했다. 짙은색 안경 너머로 박종희의 눈은 반짝였다. 이를 통해 박종희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한미, 한일 관계를 정립하는 중요한 인물 로 부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케네디는 박종희가 자진해서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겠다고 했을 때 큰 숙제를 풀어낸 것처럼 기뻤다. 이것은 미국의 아시아 반공 전략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케네디에게 박종희는 예상치 않았던 선물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부여 박 선생이 임영숙과 식사를 하다가 “우리도 이참에 증권회사를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앞으로는 상장회사가 많이 늘 어 날것이고, 우리도 제도권으로 진입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가끔 박 선생으로부터 미국의 증권회사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증권회사 설립에 관해 박 선생님에게 전권을 맡기고 진행을 허락했다.
1962년 7월 19일 명동에 성도증권 본점을 만들고 부산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 지점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임영숙은 송상이 운영하던 모든 조직을 주식회사 체제 로 바꾸고 성도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팩션소설'블러핑'46]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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