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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음식문화평론가] 인류의 역사는 음식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우리의 밥상은 이미 과거의 밥상이 아니다. 조선후기의 기록에 성인남자는 7홉의 쌀로 한 끼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지만 이제는 사실이 아니다. 최근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집계가 시작된 196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한 끼에 평균 밥 반 공기 정도로 버티고 있다. 반면에 육류소비량은 쌀 소비량을 추월하고 있다. 지난해 돼지, 소, 닭고기 등 3대 육류 소비량은 1인당은 60.6㎏으로 쌀 소비량을 넘어섰다. 우리경제의 산업화는 외식산업의 발달과 함께 식생활의 서구화를 가져왔다. 우리의 식탁에 20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브로콜리, 셀러리, 파프리카가 등장하고 식당에는 부대찌개, LA갈비 같은 정체가 모호한 음식들이 팔리고 있다. 인스턴트식품과 배달음식의 소비는 날로 늘어가고 있다.
한 시대의 음식문화 발전에는 항상 그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이 존재한다. 그들은 새로운 식재료와 요리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즐기며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식기와 식탁예절을 도입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오늘날의 음식문화를 만든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때이다.
◇절대 미각을 가진 최고의 미식가
‘일본 요리의 전설’,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魯山人, 1883년~1959년)은 참으로 특이하고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괴팍한 성격의 이단아이자 독선적이며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고집불통의 독설가였다. 로산진은 별난 면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만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것이다. 그의 자부심은 ‘유아독존’이라는 별칭처럼 오만에 가깝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그런 방자함이 나름의 근거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 이해가 가는 부분도 생긴다. 그는 절대 미각을 가진 최고의 미식가이자 요리사이며 도예, 서도, 회화, 전각 등 여러 방면에서 천재적인 재능으로 이름을 떨쳤다. 유명한 요리만화 ‘맛의 달인’의 주인공 카이바라 유잔은 로산진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유복자로 태어나 이집저집을 전전하다 6세 때 목판 일을 하는 후쿠다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어려운 여건 속에 자리를 잡는다. 그 집에서 평생의 유일한 학력이 되는 4년제 소학교를 다녔고, 전각을 접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식사 준비를 도맡아 하면서 음식과 식자재에도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소학교를 마친 후에는 양아버지 일을 도우며 독학으로 서예에 정진했다. 그는 21세가 되던 1904년에 일본미술협회가 개최한 천자문 쓰기 대회에서 다섯 명의 우승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 후 그는 서도 교실을 운영하다 조선으로 건너갔다. 조선 통감부 인쇄국에서 일하며 로산진은 조선의 도자기와 전각에 관해서도 관심을 두게 되었다. 조선에서 3년을 체류한 뒤 중국을 거쳐 귀국한 그는, 식객으로 주유천하하며 요리와 미식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그렇게 돌아다니면서도 도예와 전각, 서화에는 계속 정진하여 상당한 숫자의 작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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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인 미각과 오랜 식객 생활에서 터득한 조리 솜씨를 바탕으로 1921년에 회원제 식당 ‘미식구락부’를 개업해 호평을 얻었다. 본격적으로 요리의 길에 발을 디딘 로산진은 1925년 자신의 꿈을 집대성한 요리 왕국 호시가오카사료(星岡茶寮)를 열게 된다. 호시가오카사료는 요리장 겸 고문인 로산진 아래 요리사 20명, 여종업원 40명, 잡역부 10명을 거느린 대단한 규모의 요정이었다. ‘그릇은 요리의 기모노’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던 로산진은 전국의 도자기 가마를 돌면서 5000여 점의 고급 식기를 마련했다. 그중 상당수는 자신이 구상하는 요리와 어울리게 직접 제작했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그중에서도 일본 요리와 잘 어울리는 녹색의 오리베 접시를 즐겨 제작했다. 그는 종업원의 유니폼까지도 직접 디자인해서 입혔고 인사법까지 까다롭게 가르쳤다. “머리를 천천히 숙이고 천천히 들어라. 너무 느려도 안 되고 너무 빨라도 안 되며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해서도 안 된다”라고 훈육했다. 그러나 호시가오카사료에는 요정임에도 시중드는 게이샤나 가무는 없었다. 음식에 집중해야 한다는 그의 원칙 때문이었다.
◇혀는 물론 눈까지 즐거워야 한다
회원 1호로 귀족원 의장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등록을 하자, 일본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회원 수는 일단 400명으로 제한했다. 호시가오카사료는 “미식의 본질은 맛있게 만드는 솜씨가 아니라 맛이 있을 수밖에 없게 하는 재료”라는 로산진의 지론이 완벽하게 구현된 곳이었다. 그는 최고의 식자재를 가장 신선한 상태로 확보하기 위해, 산지에서 제일 빠른 운송 수단으로 도쿄에 가져왔다. “맛없는 것을 맛있게 만드는 비결은 없다”라는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 기후현 나가라강의 은어와 후쿠이현 와카사의 옥돔, 고등어는 전용차 편으로 가져왔고, 아카시의 도미는 비행기로 날아오기도 했다.
로산진은 “요리는 혀뿐만 아니라 눈까지 즐거워야 한다”며 음식을 어울리는 그릇에 아름답게 담는 ‘모리쓰케’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위생 관념도 철저해서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한 올 나왔다고 요리사 전원의 머리를 박박 밀게 한 적도 있었다. 규율에도 엄격해 폐점 시간을 9시 30분으로 정하고 철저하게 지켰다. 한번은 총리대신 가토 다카아키가 술을 마시다 문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 한 잔만 더 하고 가겠다고 떼를 썼다. 로산진은 그에게 “천하의 정치가가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그것은 범죄”라며 야박하게 쫓아내 버렸다. 그 시절에는 호시가오카사료의 회원이 아니면 일본의 명사가 아니다”라거나 “일본의 앞날은 호시가오카사료에서 결정된다”라는 말이 다 떠돌 정도로 성가가 높았다.
로산진은 자존심이 강했다. “사람들에게 욕먹을 각오로 고백하자면, 나만큼 미식 체험을 한 사람은 흔하지 않다. 아침부터 밤까지 수십 년 동안 한순간도 빠짐없이 입으로 맛보는 체험을 했다. 나에 버금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을 내세울 정도였다. 1954년에는 록펠러 재단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서 도예 전시회를 열었다. 간 김에 유럽까지 날아가서 피카소와 샤갈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록펠러 재단에서 지원하겠다는 경비를 일정에 제약받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자비로 여행했는데, 그로 인해 생긴 현재가치 악 10억 원의 부채 때문에 말년에 많은 고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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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미식은 ‘무미’
로산진은 유럽과 중국의 음식에 대해서는 혹평을 남겼다. “나쁜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든 해보려는 궁리 끝에 만들어진 것이 유럽과 중국요리이지 싶다. 따라서 다소 억지스럽고 좀스러우며 단조롭다 못해 괴상해서 설령 입맛에 익숙해져도, 눈에 호소하며 기쁜 마음을 불러오는 아름다움은 바랄 수 없다”라고 했으니 독설도 이런 독설이 없다. 실제로 그는 프랑스에 갔을 때 1582년에 창업한 파리의 최고급식당 ‘라 뚜르 다르장’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곳의 유명한 오리요리를 양념하지 말고 가져오라고 해서 일본에서 공수해 간 간장과 와사비를 곁들여 자신의 방식으로 먹은 것이다.
그는 궁극의 미식은 ‘무미(無味)’라고 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맛에 엄청난 매력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무미의 미’를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 바다에서는 복어, 산에서 나는 재료로는 고사리를 꼽았다. 복어회는 어떤 생선과도 비교할 수 없는 궁극의 맛이며 세계 3대 진미에 들어가는 푸아그라보다 맛있다고 했다. 고사리는 살짝 데쳐서 간장만 곁들여 먹으면 무미를 즐길 수 있다고 설파했다. 감각기관을 총동원해야 그 맛을 느낄 수 있으므로 무한의 묘미가 있다는 것이다. 1955년에 로산진은 오리베 부문 ‘인간국보(중요무형문화재기술보지자)’로 지정됐지만, 형식과 권위를 극도로 혐오한 그는 바로 사퇴하고 말았다.
로산진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의 삶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내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100년 후의 친구들이다. 모두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단 한 가지는, 로산진은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만들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로산진의 기여로 오늘의 모습을 갖춘 일식, 와쇼쿠(和食)는 201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일본의 미술관들은 ‘와쇼쿠의 천재 기타오지 로산진의 미’라는 타이틀로 그의 유작전을 잇달아 열었다. 100년 후의 친구들은 로산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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