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구씨 작가] 어린 시절 어른들의 생신이나 명절에만 외가와 친가에 내려갔다. 네다섯 시간을 자동차로 이동하여 도착한 (또 다른) 집은 모두가 따뜻하게 반겨주었지만, 어제와 다른 조명아래서 이야기를 나누고, 어제와는 다른 이불을 덮고 자는 며칠만으로 그곳에 적응할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긴 하루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피로감이 누적되는 것을 느꼈다. 바리바리 짐을 챙겨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 집 현관문 앞에 섰을 때의 그 안도감. 문손잡이를 돌리며 느끼던 행복은 비교할 것이 거의 없다. 집에 들어오면 평소에는 몰랐던 집 냄새가 난다. 무거운 가방을 손에서 내려놓고 나니 가방 끈으로 빨개진 손도 반갑다.
서울에서 여러 전시장을 보고 (우리의) 작업실로 돌아온 날, 사람 많은 지하철을 뚫고, 다 같이 한마음으로 역사의 계단을 올라 작업실에 다시 도착했을 때도 그런 마음이었다. 매일 아침시간에 작업실에 오며 걷던 길을 늦은 오후에 걸어 작업실로 향했다. 문 앞에 나란히 서서 작업실 도어록의 캡을 위로 올렸을 때 며칠의 여행으로 나갔다 돌아오는 것처럼 안도감을 느꼈다. 순간 느낀 포근함은 집 앞에 서서 느낀 감정과 닮아 있었고, 작업실에 느끼는 편안함이 이 정도일까 싶은 맘에 스스로 놀랐다. 어떤 조건이 이러한 공간을 만드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 공간과 오랫동안 보낸 시간일까. 공간에서 즐거웠던 기억일까. 그 공간을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일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공간에서 오랫동안 보낸 시간 속에는 대부분 동료가 있었고 동료가 있던 순간들은 거의가 즐거운 기억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길을 잃어도 그 길이 새로워서 기뻤고, 무엇인가가 실패해도 따뜻한 음료 한 잔을 먹으며 보름달도 초승달도 아닌 달을 보며 즐거워했다. 벚꽃 잎을 줍고 책갈피를 만들고 한발 뛰기를 해왔던 시간에서 철이 없다고, ‘우리는 철이 언제 들까’라며 자조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모두 낭만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 같기도 했다. 철이 없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어른의 행동을 취한다. 길에서 거나하게 술 취한 사람이나 인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진정으로 철이 없다. 주변의 예술인들은 자기 재떨이를 가지고 다닐 만큼 피해 주는 것을 끔찍하게 고려한다. 그렇지만 토끼풀이 보이면 바로 네잎클로버를 찾는다.
그런 노력으로 공기 중에 낭만이 둥둥 떠다니는 것인지 작업실 밖에서 상처를 받더라도 이렇게 저렇게 넋두리를 하다 보면 응급처치가 된다. 마음 상한 일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 여러 나날들이 작업실 문 앞에 선 나를 이렇게 포근하게 만들어 주다니 이렇게 복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불과 몇 개월 전 무더운 여름까지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무더운 여름, 매일 같이 작업실에 가 에어컨을 틀고 뭐가 되었든 작업을 했다. 그렇게 같이한 시간이 체에 잘 걸러져 기분 좋은 일들만 남았나 보다. 땀과 실패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작업실이라는 공간이 방보다 편안해졌고 내년에 우리는 저 어딘가 큰 공간으로 이사를 가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2년 새에 짐이 많이 늘었다. 어디로 가든 무조건 더 넓어야만 한다. 앞으로 계속해서 우리의 짐은 늘어날 것이겠지만 모든 짐이 너무 짐스럽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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