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퍼스 바자 내년 초 공개를 앞둔 디즈니+ 시리즈 〈트리거〉 촬영이 끝나고 석 달이 지났죠. 요즘 일상은 어떤가요?
김혜수 사소하지만 티는 안 나는, 미뤄왔던 일상을 정상으로 돌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보고 싶던 사람들도 만나고 집 안에 손볼 곳들도 고치고.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닐 일인데 전 늘 허둥대는 것 같아요. 일 이외엔 바보가 되는 것같이 ‘어떻게 해야 하지’ 막 그러면서 분주해요.
하퍼스 바자 〈소년심판〉 〈밀수〉 〈슈룹〉까지 연달아 작품을 지나온 이후 번아웃을 겪었고 휴식의 시간을 보냈다고 했죠. 다시 찾은 현장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 궁금했어요.
김혜수 제가 천부적인 재능이 있거나 대사만 외우고 현장에서 감정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아니에요. 대본을 정말 면밀히 보고, 잠을 줄여서 보고, 또 보고. 밤새 그렇게 안 해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저는 시간을 들여야만 하는 사람이거든요. 너무 오랜 세월 조금 자는 습관을 지니다 건강과 컨디션을 위해 변화가 필요하더라고요. 작년에 일을 쉬면서 일찍 잠드는 연습을 했죠. 그래서 초반에는 대본을 보다 졸리면 바로 잤어요. 근데 일할 땐 어쩔 수 없더라고요. 십수 년 영혼을 바쳐 일을 했지만, 그건 지난 작품을 위한 거였고 이 작품은 또 새로운 것이잖아요. 그러면 안 되겠더라고요.
하퍼스 바자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높은 편이죠?
김혜수 한 작품의 메인 캐릭터가 된다는 건 허투루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극을 이끌어가는 역할, 이런 얘긴 하고 싶지 않아요. 누가 누굴 이끌어요, 자기 것 잘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자기 것을 잘할 게 너무 많기 때문에 절대 느슨하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하퍼스 바자 예능 프로그램 〈어쩌다 사장〉이나 유튜브 〈피디씨 by PDC〉 채널에서 동료 배우와 지인들 앞에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 반가웠어요. 스스로 “나 정말 철이 없다”고 말하거나 후배들에게 막역하게 대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김혜수 제가 일상에서 모르는 게 참 많아요. 철도 완전 없고요. 선배가 되다 보니 어른스러운 사람으로 비춰질 때가 늘어요. 물론 그런 모습이나 순간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거든요. 어떤 분야의 시니어가 되다 보면 그런 환상이 있잖아요. 한 가지 일을 저렇게 오래 하는 사람은 그들만의 무언가가 있을 거야. 의도가 없어도 타인이 의도를 읽는 경우도 생기고요. 그런데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경험치가 쌓여도 매너리즘에 빠지고 후퇴할 수도 있고요. 섣불리 이야기하거나 제게 편한 얘기만 들으려고 하진 않아요. 그건 제가 애를 써서 노력하는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려 하고 자기 객관화를 철저히 하게 된 습관은 일찍이 현장에서 일해온 영향도 큰가요?
김혜수 명확한 거 좋아해요. 명확해진 것만 내 것이 돼요. 내 스스로 명확하게 정리가 되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라 막연하게 남아 있거든요. 막연한 건, 막연히 있다 떠나가요. 경험에서 알게 된 거죠. 어릴 때부터 누가 배우로서의 단점을 지적하면 저는 그냥 수긍이 되더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고. 감추고 변호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한두 번은 그냥 넘어갈 수 있더라도 결국 오래 일하다 보면 스스로 알아차리게 되죠.
드레스는 Ferragamo. 부츠 힐은 Benedetta Boroli.
하퍼스 바자 상대의 장점을 아끼지 않고 칭찬하는 면모도 드러났죠. 정작 자신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김혜수 그 순간에 정말 집중하고 진심인 것. 예를 들어 지금 인터뷰를 하면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에만 집중하는 거죠. 어떤 생각을 하든 이 대화를 위해 생각하는 거고요.
하퍼스 바자 그런 태도가 작품마다 새로운 인물로 사는 데 유효했겠어요.
김혜수 저는 현장에서 집중력이 뛰어난 배우에게 완전히 매료돼요. 선배든 후배든, 처음 본 사이든 그게 제일 중요해요.
하퍼스 바자 얼마 전 SNS 피드에 1993년 개봉한 영화 〈첫사랑〉 포스터를 올렸죠. 이명세 감독님과 함께한 코멘터리를 담은 블루레이가 출시될 예정이에요.
김혜수 21살에 찍어 22살 때 개봉한 작품이에요. 저에겐 정말 첫사랑 같은 작품이죠. 실제 그맘때 첫사랑을 하기도 했고. 제 작품 다시 잘 안 보거든요. 지나간 걸 곱씹거나 추억하는 편도 아니에요. 그런데 이 영화만큼은 매년 한 번씩 본 것 같아요. ‘첫’이라는 말이 너무 예쁜 거예요, 여전히 설렘과 아련함이 들기도 하고.
더블 브레스트 재킷은 Rokh. 스타킹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단발머리를 한 영신이 너무 귀엽더라고요.
김혜수 그때 긴 머리를 처음 잘랐거든요. 호빵 같은 그 머리가 웃기고 좋은 거예요. 제 머리카락이 방방 뜨는 편인데 기분도 좀 날아갈 것 같고. 감독님이 리허설을 오래 시키는 편이신데 탈의실에 숨어서 문 잠그고 자고 연출부들이 찾아다니고 그랬어요.(웃음) 이전에 영화를 몇 편 찍었지만 콘티를 제대로 볼 줄도 몰랐거든요. 당시에 콘티에 맞춰 디테일하게 촬영하는 걸 감독님 덕에 처음 알게 됐죠.
하퍼스 바자 지금의 베테랑 배우 김혜수를 떠올리면 상상이 안 돼요. “그 자리에 내가 나갈 자격이 있는가, 준비가 돼 있는가.” 항상 인터뷰에서 ‘자격’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해왔더라요. 그게 당신을 움직이는 동력이라고도 밝혀왔죠. 그 생각을 체득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나요?
김혜수 조금씩 터득해온 것 같아요. 현장은 수업료를 내고 배우러 오는 곳이 아니니까 내 컨디션이나 시간에 대해 익스큐즈를 댈 수 없죠. 그러니까, 저는 그 말의 무게를 항상 생각해요. 현장에서는 내가 해내는 것만 진짜예요. 무언가를 아름답게 하려면 아름답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걸 알아요.
보디수트, 폼폼 스커트는 Alaïa.
하퍼스 바자 작품이 끝날 때마다 스스로 잘 다독이는 편인가요?
김혜수 여전히 나에 대해선 아쉬움이 굉장히 커요. 매 촬영이 끝나는 그날 돌아가는 길에 모니터를 꼭 해요. 자기 모니터를 불편해하는 배우도 있는데, 저는 부릅뜨고 봐요. 놓친 걸 메워야 하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만회를 못할 때도 있죠. 그럼 결국 안 되는구나, 깨닫고. 공부는 노력하면 그만큼 결과가 나오더라도 연기는 그때의 컨디션, 상대와의 케미스트리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니까요. 낙담하고 실망하는 상태를 오래 가져가지 않으려 해요. 잘 털어내죠.
튜브톱 드레스는 Toteme.
하퍼스 바자 오래도록 꾸준히 사랑받는 물건에는 ‘클래식’이라는 수식이 붙죠. 오늘 촬영을 함께한 100주년을 맞은 까르띠에 ‘트리니티’ 링처럼요. 38년이라는 시간 동안 차곡차곡 배우의 길을 걸어온 배우 김혜수에게도 걸맞은 수식이죠. 그토록 오래 연기할 수 있었던 건 종국엔 즐기고 사랑하기 때문인가요?
김혜수 예전엔 연기를 얼마나 좋아해서, 현장을 얼마나 즐기기에 그토록 오래 하는 거냐는 질문을 받을 때 모르겠다며 손사래를 쳤어요. 카타르시스 같은 감정도 모르겠고, 부담감에 두렵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여전히 즐길 수 있는 여유는 없지만 무언가를 해냈을 때 기대하지 않은 행복을 얻는구나, 느껴요. 이것도 어떤 종류의 사랑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저는 제가 가진 것보다 더 해내야 되는 사람이거든요. 제 인생에서 정면으로 도전하고,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성장할 수 있는 일은 연기였으니까요. 대단한 일을 한다고 말할 순 없지만, 아마 이걸 평생 추구할 거예요. 저는 그 감각이 있어야 살 것 같고 살아 있다는 활력이 생겨요.
재킷, 벨트, 베레는 모두 Dolce & Gabbana. 이너 톱, 팬츠, 슈즈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트리니티 링은 다양성의 가치와 모든 형태의 사랑을 상징하죠. 연기라는 일은 물론, 배우로서 사는 삶 역시 ‘사랑’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고요. 당신에게 사랑은 어떤 형태인가요?
김혜수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연기를 사랑하는 일. 제 인생에서 저를 제일 허용하는 게 사랑이에요. 사랑에 대해서는 장벽도 없고, 미리 준비하거나 의도하거나 그런 것도 없고요. 가장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두어도 되는 유일한 개념인 것 같아요. 저에게는.
※ 화보에 촬영된 제품은 모두 가격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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