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이라는 이름의 외국어

와인이라는 이름의 외국어

에스콰이어 2024-11-20 00:00:02 신고

재밌는 사실이 있다. 와인 세계에서 최강대국은 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다. 보르도 블렌딩, 론 블렌딩, 부르고뉴의 아름다운 단일 품종 와인들, 루아르 밸리의 다양성, 알자스 리슬링과 샴페인의 기포로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 누구도 이 사실에 반기를 들 순 없다. 그런데 와인 교육의 최강대국은 영국이다.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라는 영국의 교육기관이 세운 커리큘럼에 따라 전 세계 거의 모든 와인 전문가가 기초 교육을 받는다. 이를테면 WSET는 와인 교육계의 〈성문종합영어〉이자 〈수학의 정석〉이다. 난이도에 따라 레벨 1부터 레벨 3로 나뉘는 WSET의 와인 전문가 과정을 제대로만 공부하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미국, 칠레, 아르헨티나, 뉴질랜드, 호주 등 전 세계 주요 와인 산지의 특성을 체계적으로 일별할 수 있다.
WSET 교육의 체계성은 심지어 와인을 꽤나 공부한 전문가들에게도 매우 유용하다. “와인에 급격히 빠져서 거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 와인 지식의 폭을 넓혀나가던 시절의 제게 WSET는 마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의 ‘디스크 조각모음’ 같았어요. WSET 과정을 들으며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제 얕고 넓은 지식들을 퍼즐을 맞추듯 그러모아보고 나니 빈자리가 보였고, 그걸 채울 수 있었죠.” 지난 2021년 ‘제20회 한국 소믈리에 대회’에서 우승한 스미스앤월렌스키의 김형욱 소믈리에의 말이다. 전 세계 70개국에 걸친 800개의 WSET 인증 교육기관이 동일한 커리큘럼에 따라 각 테루아르를 대표하는 와인들을 테이스팅한다는 점이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피에몬테에 대해 공부한 날은 그 지역의 네비올로를, 뉴질랜드에 대해 공부한 날에는 말보로 지역의 소비뇽 블랑을, 스페인의 리오하 지역에 대해서 공부한 날에는 템프라니요 품종의 와인을 테이스팅한다. 각 지역별로 나뉜 커리큘럼에 따라 레벨 2는 8주, 레벨 3는 16주간의 교육을 받는다. 긴 듯 느껴지지만, 커리큘럼이 다루는 방대한 지역과 다양한 와인의 종류에 비하면 매우 함축적인 과정이다. “업장에서는 잘 취급하지 않는 다양한 지역의 와인을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테이스팅하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았던 나의 기준과 감각을 평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김형욱 소믈리에가 덧붙였다.
잠원동에 있는 ‘WSA 와인아카데미’는 국내에서 WSET 프로그램을 가장 먼저 도입한 교육한 기관이다. 이 와인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은 동문은 현재 2만 명으로 체감상 와인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거의 절반이 이 아카데미에서 수강했다고 보면 된다. 특히 기본적인 커리큘럼에 자신들의 와인 경험을 흠뻑 녹여내는 김상미, 박수진 공동원장 두 사람의 강의는 수강생들 사이에서 ‘한 번 더 듣고 싶은 강의’로 유명하다. “단지 책에 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늘 쉰목소리로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들의 멱살을 잡아 끌고서라도 가르치는 강사님들의 모습을 보며 학자와는 다른 교육자의 면모에 존경을 느꼈어요”라고 김형욱 소믈리에는 말했다.
WSA 와인 아카데미의 내부 전경. 안쪽으로 싱크 시설을 갖춘 3개의 테이스팅 클래스룸이 있다.

WSA 와인 아카데미의 내부 전경. 안쪽으로 싱크 시설을 갖춘 3개의 테이스팅 클래스룸이 있다.

물론 WSA에 WSET 과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WSG(Wine Scholar Guild), FWS(French Wine Scholar) 등의 다양한 과정도 진행 중이다. 특히 프랑스 농림부의 공식 후원으로 탄생한 프랑스 와인 전문가 과정(FWS)과 부르고뉴 와인 마스터 과정 등은 이미 전문가의 반열에 오른 이들에게도 큰 힘이 되는 교육과정이다. 2022년 아시아 베스트 소믈리에에서 여성 최초로 우승을 거머쥔 한희수 소믈리에는 지금은 롯데백화점 본점 소속으로 본점의 와인을 총괄하고 있다. “2019년, 소펙사 코리아에서 주관하는 ‘한국 소믈리에 대회’에 출전해 처음으로 결승 진출에서 좌절을 맛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저는 프랑스 보르도에서 공부한 프랑스 와인 전문가였고, 제 와인 공부가 부족하지 않다고 느꼈는데, 결승 진출 좌절 이후 새로운 시각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찾은 곳이 WSA였어요. 그때 제가 들은 수업이 프랑스 와인 전문가 과정인 FWS였는데, 이 과정을 들으며 정말 꼼꼼하게 제가 놓쳤던 것들을 점검하고 깨닫고 반복해 학습하는 과정을 거쳤고, 결국 이듬해인 2020년에는 같은 대회 결승 무대를 밟았지요. WSA 와인아카데미가 프랑스에서 와인을 공부한 자칭 프랑스 전문가에게도 뭔가를 깨닫게 해준 셈이죠.” 한희수 소믈리에가 말했다.
나는 지난 2023년에는 WSA에서 WSET 레벨 2 과정을, 올해는 레벨 3 과정을 들었다. 기자인 내가 WSA 와인아카데미에서 레벨 2와 레벨 3 수업을 연달아 들으며 가장 크게 깨달은 건 와인이 하나의 새로운 언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와인에 대해 말하는 용어들을 두고 ‘와인의 언어’라고 표현한다. 이를테면 소비뇽 블랑은 ‘구스베리’,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를 마시면 ‘체리’나 ‘산딸기’ 등의 단어를 사용해 상대방과 같은 감각을 느꼈다는 사실을 소통한다. 그러나 종종 나는 와인을 표현하는 언어의 존재보다 와인 그 자체가 언어가 될 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하우스 파티에 초대받았을 때 그날의 메뉴를 물어보고 메뉴에 어울리는 와인을 고르는 사람, 또 그가 고른 와인의 선택을 보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정보를 읽을 수 있다. “맞아요. 와인은 너무도 다양해서 어떤 와인을 선택하든지 그 취향 하나만으로도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어요. 예를 들면 누군가가 바롤로를 좋아한다면, 저는 그 사람이 약간의 ‘반전 매력’을 선호한다고 느낄 것 같아요. 바롤로를 만드는 네비올로 품종의 와인은 맑고 투명한 루비 빛깔을 띠고, 후각에서는 말린 장미와 제비꽃 향이 나지요. 그러나 입안에 넣으면 무척이나 터프한 타닌의 감각이 반전의 매력을 선사해요.” 한희수 소믈리에가 말했다.
와인은 마치 외국어와 같다. 어쩌면 당신의 세계는 아직 이 와인이라는 외국어와 큰 접점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치 영어를 할 줄 알면 우연히 초대받은 해외의 파티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것처럼, 와인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알게 되는 순간 당신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초대받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당신의 잔에 따라진 와인을 마시고, 미간을 찌푸리며 “와우, 이 와인은 정말 멋진데요”라고 한 마디를 내뱉는 순간 당신을 초대한 호스트의 눈에는 사랑이 서릴 것이다. 와인을 대접하는 사람은 손님이 와인을 칭찬해줄 때 가장 행복하다. 요리사와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 와인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적절히 감탄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어디서고 사랑받을 것이다. 이것만은 약속할 수 있다.
WSA 와인 아카데미의 로비 전경. 로비에는 각종 향신료 샘플들이 상비되어 있어 쉬는 시간이면 이곳에 나와 아니스와 클로버 등에 익숙해지려 향을 맡곤 했다.

WSA 와인 아카데미의 로비 전경. 로비에는 각종 향신료 샘플들이 상비되어 있어 쉬는 시간이면 이곳에 나와 아니스와 클로버 등에 익숙해지려 향을 맡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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