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한국 야구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점을 다시 확인한 대회였다. 안방에선 역대 최고 흥행을 기록했지만 국제무대에선 경쟁력을 잃어간다는 점을 뼈 아프게 보여줬다.
류중일 감독이 이끄는 야구 대표팀은 18일(한국시각) 호주전을 끝으로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프리미어12 24 B조 일정을 마쳤다. 대표팀은 대만, 일본에 패하고 쿠바, 도미니카공화국, 호주를 이겨 3승 2패를 기록했다. 조 3위에 그친 까닭에 2위까지 주어지는 슈퍼라운드(4강) 진출에 실패했다.
2015년 초대 대회 우승, 2019년 준우승을 차지했던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이번 대표팀은 평균 연령 24.6세의 젊은 선수들로 구성됐다. 30대 중반 이상의 1980년대생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1990년생 포수 박동원이 맏형이었다. 투수 중에선 1991년생 고영표, 야수 중에선 1993년생 홍창기가 최고참이었다. 1996년생 송성문이 처음으로 성인 대표팀에 발탁돼 주장을 맡았다. 전체적으로 경험 부족과 부상으로 인한 전력 누수가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투수진에서는 선발로 나선 4명 모두 5이닝을 넘기지 못하며 부진을 드러냈다.
실제 김혜성, 강백호 등은 군사훈련과 일정이 겹쳐 합류가 불발됐고, 문동주와 이의리 등은 부상으로 함께하지 못했다. 여기에 원태인과 구자욱, 김지찬, 김영웅 등 한국시리즈를 치른 삼성 라이온즈 소속 선수들이 모두 부상으로 이탈했다. 특히 투타의 구심점이 돼줄 것으로 기대했던 원태인과 구자욱의 이탈은 팀에 큰 타격이 됐다.
한국은 첫 경기부터 대만에 패해 위기를 자초했고, 숙적 일본과의 경기에서도 두 차례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역전패했다. 도미니카공화국을 상대로 0-6에서 대역전극을 펼치는 등 3승을 따냈지만 4강 진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대만전 패배가 사실상 결정적이었다는 말이 나온다.
가장 큰 문제는 확실한 에이스와 중심타자의 부재였다. 선발진은 5경기 동안 단 한 명도 5이닝을 채우지 못했다. 원태인, 손주영, 문동주 등이 부상으로 빠진 상황에서 고영표, 곽빈, 최승용, 임찬규 등 4명이 선발진을 꾸렸지만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들이라고 하기엔 초라한 성적표였다. 엄상백마저 막판 구위 저하로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선발진의 무게감이 더욱 떨어졌다.
선발진이 무너지면서 불펜진 과부하가 심각했다. 마무리 투수만 5명이 모인 불펜진이 그나마 강점으로 꼽혔지만 아쉬운 투수 교체 타이밍과 더불어 잦은 등판으로 위력이 감소했다. 이는 매 경기 한국이 고전할 수밖에 없었던 주요 원인이 됐다.
4번 타자 문제도 심각했다. 중심타자로 기대했던 구자욱이 부상으로 합류하지 못했다. 노시환과 강백호도 각각 부상과 기초군사훈련으로 나서지 않았다. 류중일 감독이 번갈아 4번에 기용한 윤동희와 문보경은 상대 투수를 위협할만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리드오프 홍창기와 3번 김도영 외에는 매 경기 타순이 바뀌는 불안정한 라인업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한국 야구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한때 대등한 승부를 벌였던 일본과의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 2015년 프리미어12 4강전 이후 프로 선수들끼리의 정예 대결에서 9연패 중이며, 일본이 사회인 야구 선수들을 파견하는 아시안게임을 제외하면 9년째 승리를 맛보지 못했다. 류현진, 김광현 등 확실한 에이스가 있었던 때와 달리 상대 에이스급 투수를 상대할 만한 선발투수조차 찾기 힘든 실정이다.
대만도 심상치 않다. 한국은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 예선에 이어 이번 대회에서도 대만에 패했다. 이제는 대만을 한 수 아래 나라로 여기기 어렵게 됐다. 류중일 감독도 "대만은 최근 어린 유망주를 외국으로 많이 보내 육성하는 분위기"라며 "볼이 빠르고 가능성 있는 어린 투수들이 많이 등장했다"고 경계심을 드러냈다. 마운드가 흔들린 한국과 달리 일본과 대만은 탄탄한 투수진을 앞세워 슈퍼라운드 진출권을 따냈다.
다만 이번 대회가 실패만 남긴 것은 아니다. 김도영이 타율 0.412에 3홈런 10타점을 기록하며 타자 중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는 쿠바전에서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평균자책점 1위 리반 모이넬로를 상대로 만루홈런을 터뜨리는 등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약점으로 지적됐던 3루 수비에 대한 평가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바꿔놨다.
박성한도 타율 0.357을 기록하며 기대 이상으로 활약했다. 2017년 SK 와이번스(현 SSG)에서 데뷔한 그는 2021년부터 풀타임 유격수로 성장했다.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저조한 활약으로 아쉬움을 남겼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도미니카공화국전 역전 결승 3루타를 포함해 14타수 5안타 2타점 4득점 OPS 0.938의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불펜에서는 박영현이 3경기 3⅔이닝 동안 1승 1세이브 평균자책점 0의 완벽 투구를 선보였다. 올해 소속팀에서 처음으로 마무리를 맡아 66경기 76⅔이닝 10승2패 25세이브 평균자책점 3.52를 기록한 그는, 성인 대표팀 두 번째 출전에서도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묵직한 직구로 상대 타자들을 압도했다. 일본전에서 그를 기용하지 않은 것을 두고 팬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 정도로 신뢰를 얻었다.
류중일 감독은 "2026 월드베이스볼클래식까지 15개월 정도 남았다"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르다. 선발투수도 그렇고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하나씩 잡아나가야 한다. 다음 WBC에는 꼭 본선에 오를 수 있도록 연구를 잘해보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또한 "생각보다 젊은 친구들이 잘해줬다. 특히 타선에서는 김도영이 다 한 것 같다"며 "어린 선수들이 모두 장하다"고 평가했다.
한국 야구는 2006년, 2009년 WBC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15년 프리미어12 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국제무대 강호로 자리매김했지만 그 영광의 순간들은 이제 너무 오래된 기억이 돼버렸다. 가장 최근의 성과인 2015년 프리미어12 우승도 어느덧 10년이 다 돼간다. WBC 3회 연속 조별리그 탈락, 도쿄올림픽 메달 획득 실패가 한국야구가 처한 현실을 뼈아프게 보여준다.
김도영, 박성한, 박영현 등 젊은 선수들의 성장은 희망적이지만 전반적인 전력 강화 없이는 국제무대에서의 경쟁력 회복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2026 WBC와 2028 LA 올림픽을 바라보는 한국 야구에 커다란 숙제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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