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성도그룹 회장, 임영숙
1950년
송상의 피난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간이 찾아왔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통해 최대 의 강대국이 된 미국과 소련은 세계 각지에서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였다. 그 틈바 구니에서 한국은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북쪽에서는 김일성과 김두봉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하였고, 남쪽에서는 이승만을 의장으로 한 미군정청 최고 자문기관인 '남조선 민주의원'이 만들어졌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양에서 태어나 중국 공산당과 함께 항일투쟁에 참여하 다가 1940년 소련으로 넘어가 소련군에 입대했다. 1945년 소련군과 함께 한반도로 돌아온 김일성은 이북 전지역에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외치며 토지개혁을 진행 했다. 한반도 북쪽이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9월 2일에는 맥아더 사령관이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미, 소 양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다고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남한 에서는 미군 극동사령부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었고,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 24군단 이 서울에 진주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 북한에서 조선신민당을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던 김두봉 위원장 은 1946년 8월 소련군의 압력으로 김일성이 만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합당하 여 북조선노동당을 창건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남북한 노동당이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으로 개편되자 최고인민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실권 없는 자리로 밀려 났다가 결국 숙청당하고 평남 순안 농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병환으로 1960년 사망했다. 김일성의 폭력적인 토지개혁은 송상에는 치명적이었다. 수백 년 동안 개간하고 넓혀온 그 많은 인삼 밭과 광산, 토지들을 모두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구정순 대방은 북쪽에 흩어져 있던 송방의 도반수들을 불러들였다.
“하도 엄중한 사안이라 이렇게 직접 오시라 했습니다.”
“대방 어른! 도대체 얼마나 중하길래 이렇게 급히 모이게 하셨습니까? 이렇게 모 두 모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지금 북쪽의 움직임이 심각해서 여러 도반수와 상의를 하려 하오. 김일성이란 자 가 소련을 등에 업고 우리 한국을 두 동강 내려 하고 있어요.”
“아니! 누구 맘대로 나라를 반으로 쪼갠다는 말입니까? 해방된 지 몇 년이나 되었다고 이런 쳐 죽일…”
“거기다가 토지와 재산을 깡그리 몰수해서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어 준다는 겁니 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이미 구 대방은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김일성의 토지개혁이 얼마나 허구이며, 결국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삼 밭을 뺏긴다면 큰일입니다. 땅이라 어디로 옮길 수도 없고...”
“일단 옮길 수 있는 것은 모두 남쪽으로 옮깁시다. 시간이 없어요. 부산으로 모두 옮기세요.”
구 대방은 일사불란하게 지시하고 지밀원으로 내려갔다. 지밀원에는 임치구가 간부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구 대방이 들어오자, 임치구 지밀원장과 간부들이 일어나 깍듯이 맞이한다.
“일단 돈 되는 건 모두 부산으로 옮기라고 했어요. 다른 지역도 옮기라고 전갈을 넣었고.”
“안 그래도 시간이 없을 것 같아 걱정했는데 잘 하셨습니다.”
“저희는 사람들을 이송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몇 명이나 되지요?”
“2만 명 정도 됩니다.”
구 대방은 임 원장을 쳐다보며 “이송 계획은 나왔나요?”라고 말했다.
“이미 짜 놓은 게 있습니다. 공산당들이 눈치 못 채도록 신속하게 움직여 객주에 모이게 한 다음에 조장을 따라 여러 경로로 흩어져서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준비했습니다.”
“며칠 걸리겠어요? 늦으면 꼼짝달싹 못 하고 낭패를 당할 겁니다.”
“10일 정도면 됩니다.”
구 대방은 탁자를 치며 흥분한다. 여태껏 이렇게 상기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지밀원장조차도.
“안 돼요! 3일 내로 모두 남쪽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도 늦을지 몰라요.” 송상 식구들이 남쪽으로 내려온 다음 날, 이승만을 의장으로 한 미군정청 최고 자문기관인 '남조선 민주의원'이 구성되었고, 38도선을 허가 없이는 넘어올 수 없도록 월경 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송상 식구들을 전부 남한으로 내려보내고 마지막으로 탈출을 시도하던 임치구 원장은 조선노동당 당원들에게 잡혀서 인민재판에 부쳐져 즉결심판으로 사형을 당했다. 남한은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등 3개의 좌익 정당이 남조선로동당 (남로당)으로 통합하였으나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이주하가 미 군정에 의해 체포되는 등 좌, 우익이 충돌하였고, 부산에서 일어난 철도 노동자 파업이 전국으로 확산 하여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던 6월 25일 새벽 4시, 내리던 비가 걷히자 북한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북한군의 남침 암호명인 ‘폭풍’이 발동하자, 북한군 제1, 2, 3, 4, 5, 6, 12사단 과 제105 전차여단은 38도선 11개 지점에서 일제히 남침을 하였다. 서울은 제대로 대항도 못 해보고 사흘 만에 점령을 당했다. 다급해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도움을 청했고, 미군과 16개국 유엔군이 개입했지만 북한군은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9월 15일 새벽,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9월 28일에 드디어 서울을 되 찾았다. 기세를 몰아 북진을 시작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하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까지 밀어붙였다. 그러자 김일성은 중공에 도움을 요청했고, 18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또다시 역전되었고, 1951년 1월에는 서울이 다시 북한군에게 넘어갔고 두 달 만에 다시 서울을 되찾았으나 38도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남북한은 물론이고 미군과 중공군의 피해가 커지면서 서로가 휴전의 필요성을 느꼈다. 2년 동안 휴전을 위한 회담을 진행하면서도 남북한은 산봉우리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치르다가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너무나 엄청났다. 남한의 사상자만 150만 명에 이르고, 1천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국토는 황폐해졌고, 산업 시설은 잿더미가 되었다. 전쟁으로 식량이 모자랐고, 수많은 공장과 도로와 철도가 파괴되었다. 그것보다 심각한 것은 민족 간의 적대감이 극도에 달한 것이다. 남한에서는 북한과 관련된 자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형하였고, 북한은 남한과 관련된 자들을 '반동' 으로 몰아 무자비하게 죽였다. 임시로 나누었던 38도선이 휴전선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쟁과 38도선으로 10만 명 이상의 전쟁고아가 남과 북에 생겨났다. 이때 5,000명 이상의 북한 고아들은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유럽 여러 나라로 입양되었다. 김일성은 정부 수립 초기에는 농민의 지지를 얻고자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 일단 북한 주민들의 인심을 산 다음에 완전히 북한을 장악하면 마음대로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서 다시 거둬들이면 되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김일성은 농민과 노동자들을 심리적으로 조종했다. 그들의 증오와 피해 의식을 부추겨 북한의 지주나 종교인들을 반동으로 몰아 숙청하기 시작했다. 부산도 아수라장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밀려 들어온 피난민들로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처음에는 38도선 인근 주민들과 서울, 경기 지역의 민간인들이 대규모로 부산으로 들어왔고, 10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미군이 후퇴할 때 북한에 남아있던 민간인들이 대거 탈출하여 월남하였다. 피난민 수가 650만 명이 넘었다. 전쟁이 나기 전에 부산 인구가 약 47만 명이었는데 피난민으로 88만 명까지 폭발적으로 불어났다. 전쟁이라는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화폐 가치는 폭락하였다. 구정순 대방과 딸 영숙은 팔십 명 남짓한 상단 식구들과 부산에 도착했고 나머지는 남한의 각 지역으로 흩어졌다. 구 대방은 우선 집을 구하기 위해서 식구들에게 금붙이를 나누어 주고 남포동과 광복동, 초장동, 아미동에 집을 사거나 세를 얻으라 하고, 자신은 남포동으로 가서 방 두 칸이 있는 조그만 집을 구했다. 부산에는 봉래동과 청학동, 대연동, 남부민동에 40여 개의 수용소가 있었고, 유엔 으로부터 구호물자를 보급받았으나 부산으로 몰려온 피난민들을 구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산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은 스스로 살길을 마련해야 했다. 피난길에 소중히 챙겨왔던 패물을 팔기 위해 도떼기시장으로 모여들었고, 부두에서 험한 중노동을 하기도 하고,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에서 지게꾼이나 노점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도 못하는 사람들은 허기를 참지 못해 도둑질을 하기도 했고, 생존을 위해 현지 부자들의 첩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김일성은 광복 이후 소련 군부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자마자 토지개혁을 가속화하고 갈등을 부추겨 확고한 자기 세력을 구축함과 동시에 반대파 를 숙청하여 완전하게 권력을 장악하였다. 박종희는 육군사관학교 2기로 소령으로 임관하여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과장으로 재직 중에 남조선로동당 입당 전력이 들통나서 파면을 당했지만, 박종희의 능력을 아깝게 여긴 전임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의 도움을 받아 민간인 신분인 군무원으로 정보국 작전정보실장 직을 맡고 있었다. 박종희는 정보국에서 자신의 후임으로 들어온 전투정보과장 이홍락과 육사 8기 출신 김중필과 인연을 맺는다. 박종희와 이들은 자주 어울려 다녔고 후일 5·16쿠데 타의 주역이 된다. 이런 인연으로 김중필은 박종희의 형인 박철희의 큰 딸 박수옥과 결혼까지 하였다. 6.25 전쟁 중에 서울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박수옥이 대구로 피난 내려왔 다가 서로 눈이 맞았다. 그렇게 김중필은 박종희의 조카사위가 되었고 박종희는 김중필을 ‘임자’라고 불렀다. 6∙25 전쟁 6개월 전인 1949년 12월, 육본 정보국의 작전정보실은 박종희의 지시에 의해 북한 남침 준비 상황과 아군의 대책을 건의한 방대한 보고서가 만들어졌는데 보고서 내용은 이러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에 공격해 올 것이 확실하다. 적은 2, 3개월 이내에 남한 전역을 석권하기 위해 전 병력을 일제히 투입할 것이고, 총 병력 중 1진 선발대는 약 12만 명, 서울 이남 공격 단계에선 20만 명으로 예상된다. 적의 전차부대는 아군에 결정적인 위협이 될 것이고 소련의 직접 개입은 없으나 중공은 때에 따라 직접 지원할 수 있다.’
그러나 보고서의 내용을 신뢰하지 않았던 정보국장 장도영은 애써 만든 보고서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박종희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소령으로 복귀하였고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 을 거쳐 9월 15일 중령으로 진급하고 육군본부 수송 지휘관을 맡았다. 1953년에 육 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됐고, 1955년에는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이후 1957년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간 박종희는 임기를 다 채우기도 전에 제7사단 사단 장으로 다시 부임했다. 전쟁시에나 가능한 초고속 승진이었다. 김중필은 미국 유학 장교단에 뽑혀 조지아 주의 포트 베닝(육군 보병학교)에서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서 계속 정보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때 김중필을 만나기 위해 부대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미국에서 김중필이 친형처럼 따랐던 박수근 선생이었다. 김중필은 면회 온 사람이 박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한걸음에 달려 나갔다.
“박 선생님! 미국에서 언제 오신 겁니까?”
“반갑네! 반가워! 일주일 정도 되었네”
둘은 연인 마냥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김중필은 같은 동향에 5살 위인 박 선생에 게 많이 의지했다. 낯선 미국 땅에서 자신을 살갑게 대해준 박 선생이 고마웠고 마냥 좋았다. 김중필이 미국에서 나오기 얼마 전에 박 선생이 미국 정보부인 CIA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정이 많고 부잣집 도련님같이 생긴 사람이 정보부 요원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박 선생은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으로 구정순 대방이 아끼는 지밀원 간부였으며 별 명이 ‘부여 박 선생’으로 천재 중의 천재였다. 영어, 일어, 독어, 러시아어 등 언어에 능통했고 한 번 보면 책이든 무엇이든 잊어버리지 않는다. CIA 내에서도 핵 심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다소 왜소한 체격의 박 선생은 김중필의 손을 잡으며 “다음 달에 북한과 정전협정이 체결될걸세. 그리고 10월에는 한미 방호조약이 체 결되고 11월에 닉슨 부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게 돼”라고 말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엄청난 정보에 김중필은 놀랐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박 선생은 말을 이어 갔다.
“앞으로는 정보가 최고의 자산이 될 것이네. 자네는 이미 미국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고 국군에서도 계속 정보 계통에 근무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거야. 지금 특무대가 언젠가 정보부로 바뀌게 될 테니 잘 주시하고 있으라는 말을 하는 것이야. 알겠는가?”
김중필은 갑자기 눈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나갈 길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박종희 장군과는 자주 연락하는가?”
“집사람은 자주 왕래하는 것 같은데 저는 명절 때나 만나는 정도입니다.”
김중필은 박종희의 소개로 조카인 박수옥과 1951년에 결혼했다.
“자주 어울리시게. 같은 정보과 출신들이지 않나? 이홍락도 그렇고. 이홍락은 미군 쪽과 인맥을 잘 닦는 모양이더군. 약삭빠른 친구야.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지금 이승만 정권이 오래 갈 것 같지가 않아서 그래.”
“이승만 대통령은 현재 미국이 밀고 있잖아요? 그런데…”
“권력의 속성이지. 한 번 잡으면 놓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아. 독재로 가고 있으니 조만간 파국으로 가고 세상이 또 바뀔 것이네. 이게 세상의 이치야. 흐름을 읽으면 앞날이 보이기 마련이지.”
김중필은 박 선생의 혜안과 정보력에 경외심마저 들었다.
“나도 이제 조국으로 돌아오려 하네. 조국을 위해 나도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
김중필은 박 선생의 손을 잡으며 “선생님, 그러면 아예 오신 겁니까? 잘 되었습니다! 이제 가까이에서 저를 좀 도 와주세요”라고 말했다.
“내가 모시는 분이 있지만 틈틈이 자네를 보러 오겠네.”
박 선생이 어깨를 두드리자, 김중필은 궁금했다. 천하의 박 선생이 모시는 분이 있 다니.
“선생님은 어디에 계실 겁니까? 부여로 가십니까?”
“아니! 부산으로 갈 것이네. 그곳에 대방 어른이 피난 내려오셔서 터를 잡고 계시 지.”
“대방 어른이라 하시면?”
“아! 하도 입에 익어서 그만… 나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시지. 언젠가 자네에게도 소개를 해줌세. 대단한 분이시지.”
박 선생은 구 대방의 얼굴이 생각나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팩션소설'블러핑'43]에서 계속...
[ '블러핑' 와디즈 펀딩]
[미드저니 와디즈 펀딩]
Copyright ⓒ 저스트 이코노믹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지금 쿠팡 방문하고
2시간동안 광고 제거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