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준(국회 의원)의 말이다.
“아버님이 대선에서 패배한 뒤 재판을 받고 이미지가 많이 손상됐다. 그 때 건강이 많이 상하셨다. 연세가 많아지셔서도 그렇고. 그런데 1997년에 한 번 더 나가볼까 그러셨다. 사실 1992년 대선 출마 때도 가족들은 말렸다. 그 분의 일은 주위에서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그래서 나하고 삼촌 두 분이 점심때 찾아갔다. 아버지는 우리가 왜 왔는지 딱 아시더라. 내가 아버님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고 우회적으로 말씀드렸다. 그런데 아버님은 ‘너희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건강하잖냐, 나도 하고 싶은 일을 해야 건강할 것 아니냐’ 라고 하셨다. 한 번은 청와대 쪽에서 아버지를 현대그룹 회장 직에서 물러나게 하라고 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은 아버님에게 그런 말을 못한다. 그래서 내가 또 가서 말씀드렸다. 아버지에게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 라며 청와대의 요구를 전해드렸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내가 전국경제인연합회 명예회장이고 이화여대 명예박사인데 그건 그만 두라고 안 하더냐’고 비꼬듯이 말씀하셨다.”
왕회장은 2000년 들어 왜 거동마저 불편해졌을까?
이 대목에서 그의 전속 이발사 이야기가 관심을 끈다. 기자가 그에게 머리를 깎으면 서 들은 이야기다.
“한 겨울 눈이 많이 왔던 날 명예회장은 술이 취해 귀가했다. 새벽 1시쯤 청운동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집 앞에서 운전기사를 보내고 계단을 막 올라서던 순간 비틀거리면서 넘어졌다. 계단에 눈이 많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청운동 집은 주차장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높은 계단이 있다. 왕회장은 추운 날씨에 10여 분 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 가족들이 그를 서울아산병원으로 옮겼으나 다리에 큰 골절 상을 입었다. 연세가 있는 노인이라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머리를 조금 다쳤다. 이 때부터 왕회장의 눈빛이 초점을 잃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의 총기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왕회장은 병원에 한달 넘게 입원해 있었다. 그러나 외부에는 비밀에 붙여졌다. 이에 앞서 비슷한 사건이 또 있었다.
왕회장 측근의 말이다.
“왕회장님이 금강CC 골프장에서 넘어졌다. 간신규 사장 등과 함께 골프를 친 뒤 술에 취해 쓰러졌다. 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으로 후송될 정도였으니까 크게 다치신 것이다. 이후 거동이 불편 하셨다.”
왕자헌 회장 측 말에 따르면 왕회장의 병세는 그 뒤 회복되지 않았다.
“왕회장은 이후 부축 받지 않으면 걷기가 힘들어졌다. 친인척들이 세상에서 좋다는 약을 다 들고 왔다. 어떤 계열사 사장은 중국에서 내로라하는 침술사까지 데려와 치료를 했다. 그런데도 호전되 지 않았다.”
또다른 왕회장 측근의 설명도 비슷하다.
“왕회장은 아침 5시 30분쯤 일어나 텔레비전 YTN과 일간 신문을 모두 봤다. 정치인들이 답답하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침식사를 하신 뒤에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사람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손자도 못 알아 볼 때가 있었다. 피곤하면 증세가 더 심해졌다. 주변에서 ‘왕회장의 말은 이제 더 이상 신빙성이 없다’고 한 이유였다.”
왕회장의 비서 출신인 한 인사는 “그의 건강이 악화되자 별 일이 다 생겼다”고 말했다.
“왕회장님은 오후에 많이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룹에 뭔가 잘못됐을 때나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 있으면 간신들이 오후에 주로 보고했다. 가끔은 왕회장의 친필사인을 받아가기도 했다. 특히 그들이 왜 친필사인을 받아갔는지 생각해봐라. 그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또 다른 왕자헌 회장 측 인사의 말에 따르면 왕회장의 건강은 늘 나빴던 것은 아니 었다.
“왕회장은 하루 중 오전 7시~7시 30분에 가장 맑은 정신을 유지했다. 그렇다 보니 어떤 친척은 ‘왕회장님이 언제 사인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고 했다. 왕회장의 결재는 오전 7시에서 7시 30분 사이에 받는 게 정상이라는 말이다. 왕회장께서는 노인성 질환으로 기억을 잘 못하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옛날 일은 많이 기억했다. 옛 친구들을 자주 찾는 것을 보면 그렇다. 하지만 방금 전 일이나 며칠 전 일 등 최근 에 있었던 일은 기억하지 못했다. (전형적인 치매증상과 비슷했다는 설명이었다.)”
[다큐소설 왕자의난35]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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