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새야, 넌 평생 날아오를 순간을 기다렸구나” 같은 가사를 들으며 운동장 퍼걸러에 앉아 있다 보면 한 시간에 한 대꼴로 버스가 오는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세계에 발을 디디고, 모르는 세상을 체화하는 듯한 풍요에 젖어들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음악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고교 시절에 다닌 기숙학교는 전자기기 사용이 금지된 곳이었으나 학습 증진을 위해 전자사전만은 유일하게 허용해 주었다. 지금은 단종된 아이리버 딕플을 나는 사전으로 사용하는 대신 그 안에 음악을 꽉 채워 틈날 때마다 들었다. 딕플의 용량은 4GB였는데(지금으로 따지면 말도 안 되는 용량이다), 음원을 저음질로 변환하면 최대 600곡까지 넣을 수 있었다.
지금은 일부러 음질이 낮은 ‘로-파이’를 찾아 듣는 이도 있고, 음악에 섞인 노이즈와 잡음을 아날로그의 유산 혹은 레트로 감성이라고 여기는 이도 있으나 당시엔 감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좋아하는 음악을 최대한 많이 저장하기 위해 고음질을 포기하고 저음질을 택했다. 음질이 튈 때도 있고 볼륨을 높이면 소리가 뭉개지기도 했지만 마냥 행복했다.
삭막하고 쓸쓸했던 고교 시절의 안식처가 음악이었다. 나의 희미한 정체성이 조금씩 색을 띠며 선명해졌던 것도 그 시기에 들은 음악 덕이 크다. 방과 후마다 컴퓨터실에 들러 새로운 곡을 다운로드하고 색다른 장르를 대담하게 접하는 게 하루하루의 수확이자 큰 즐거움이었다.
재즈도 그 시기에 접했다. 노라 존스, 마이클 부블레 같은 익숙한 뮤지션의 음악만 간간이 듣다가 쳇 베이커의 ‘Time after time’을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급속도로 재즈에 빠져들었다. 유선 이어폰을 타고 흐르던 나른하고 애수에 젖은 목소리. 기숙사가 소등되면 룸메이트들이 깨지 않게 조심하며 볼륨을 낮추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규칙 없이 자유롭게 변주되고, 슬픔은 달콤하게, 기쁨은 애처롭게 속삭이는 재즈를 들으며 어렴풋하게 삶을 배웠고, 속박 많던 그 시기를 무사히 통과했다.
학원에서 돌아오면 자정이었다. 모의평가를 망쳤던 날, 수시 불합격 소식을 접했던 날에는 눈이 아릴 때까지 울며 델로니어스 몽크의 ‘Round midnight’를 들었다. 지금은 몽크의 대표곡이자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곡이지만, 한때는 ‘너무 앞서갔다’ ‘어렵다’는 평가를 받으며 묻혔던 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 속의 자정은 가장 어두운 시간인 동시에 내일과 가장 가까워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곧 날이 밝아오는 걸 암시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내겐 지금이 자정이라 여기며 선율에 마음을 기대 고단한 시절을 버텼다. 얼마 전, 팬트리를 정리하다 예전에 쓰던 아이팟을 발견했다. 30핀 어댑터를 사서 충전했더니 놀랍게도 작동이 됐다. 한 시간도 안 돼 배터리가 소진되긴 했지만 줄 이어폰으로 오래전에 듣던 음악을 들으니 소실된 줄 알았던 감정과 낭만이 천천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좋은 음악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은 많이 옅어졌고, 이제는 음원을 저장해서 듣기보다 주로 스트리밍을 이용하지만, 여전히 음악은 불안과 아픔을 걸러주는 거름망이 되기도 하고, 나를 감싸안는 온실이 되기도 한다.
맑은 날이라 아이팟을 들으며 집 앞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다. 배트민턴을 치는 사람들,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부부, 나처럼 이어폰을 끼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이들. “하늘에 펼쳐진 무지갯빛은 지나가는 이들의 얼굴 속에도 숨어 있지. 난 세상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해.”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들으며 지나가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고 걷는 이들이 음악 속으로 숨어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들이 음악을 들으며 같은 풍경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되새긴다고 여긴다. 음악이라는 각자의 온실을 누비며 다시 살아낼 힘을 얻는다고 여긴다. 그들이 가꿨을 단정하고 밝은 온실을 상상하며 나 역시 계속 걸었다.
「
소설가.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 〈두고 온 여름〉을 펴냈다. 깊이 쓰고, 신중히 고치며 나아가는 중이다.
성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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