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전쟁이 아니고요, 일방적 학살입니다!” 국제사회를 향해 이즈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외치는 절규다. 지난 1년 넘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는 엄청난 재난을 겪어왔지만, 국제사회는 팔짱을 끼고 바라보기만 해왔다. '전쟁이 아닌 일방적 학살'이란 절규는 이번이 처음 아니다. 팔레스타인의 참상을 알아보려 현지 취재를 갈 때마다 필자는 그런 말들을 듣곤 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선 지난 1년 사이에 무려 4만 3,0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전쟁이 아닌 학살'은 유대인들이 80여 년 앞서 겪었던 참담한 역사이다. 그 '피의 역사'를 기억하는 피해집단인 유대인이 오히려 가해자가 돼 전쟁범죄를 되풀이되고 있다. 240만 가자 주민을 상대로 지금처럼 살육을 이어진다면, 21세기 중동판 홀로코스트가 될까 걱정스럽다.
동유럽 독일 점령지역에 파견된 경찰대대가 유대인들을 강제이송하고 학살했음을 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다. 문제는 이들 경찰대대보다 더 무시무시한 살인부대를 보내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는 점이다. 동유럽의 독일군 점령지역에서 히틀러가 기획했던 '유대인 절멸'에 가장 큰 몫을 했던 집단은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이란 이름을 지닌 특수기동대(이동학살부대)였다.
공포의 아인자츠그루펜, 힘러와 하이드리히의 작품
A,B,C,D 4개의 아인자츠그루펜 특수기동대는 (중장년 징집자들을 끌어 모아 만든 경찰대대에 견주어) 히틀러에 대한 충성도가 훨씬 높은 골수 나치들이었다. 1938년에 창설된 이 부대는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직후부터 그 살벌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국가보안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 RSHA) 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그의 상관인 친위대(SS)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동의를 얻어 만들었다. 특수기동대는 전적으로 하이드리히의 작품이다.
특수기동대 편성은 연합부대의 성격을 지녔다. 무장친위대((Waffen-SS, 친위대의 군사조직), 비밀경찰(Gestapo), 보안경찰(Sipo 또는 Kripo), 보안대(SD), 치안경찰 등이 뒤섞였다. 원 소속을 달랐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나치 이념으로 무장한 냉혹한 학살부대원들이었고, 힘러와 그의 심복인 하이드리히의 감독과 지시를 받았다. 대대장을 비롯한 지휘관도 이들이 임명했다.
특수기동대는 각기 대대 규모로 모두 합쳐 3000명쯤이었다. 가장 인원이 많았던 아인자츠그루펜 A(총인원 990명)의 구성원을 보면 무장친위대 340명, 오토바이부대 172명, 치안경찰 133명, 비밀경찰 89명, 형사경찰 41명, 보조경찰 87명, 친위대 보안국 35명, 통역 51명 등으로 다양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1>, 개마고원, 2008, 414-415쪽).
하이드리히가 임명한 A,B,C,D 특수기동대 대대장들은 살벌한 외모를 지닌 우락부락한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친위대 보안국 국내담당 책임자로 있다가 D대대장으로 임명된 오토 올렌도르프(1941년 당시 34세)는 법학박사 학위 소유자였다(1943년 특수기동대를 떠난 뒤 독일경제부 국장 겸 차관보를 지냈다. 패전 뒤 교수형). 다른 지휘관들도 대부분 30대 나이의 전문직 출신이었다. 변호사가 많았고 의사, 오페라 가수 출신도 있었다.
히틀러가 인가해준 '특수 임무'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만 아니었다면, 독일 맥주홀에서 한 잔씩 들이키며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나 괴테의 파우스트를 놓고 얘기를 나누었을 지식인들이었다. 안타깝게도 전쟁은 그들을 학살자로 만들었다. 상관인 히틀러-힘러-하이드리히로부터 민간인을 죽일 경우 면죄부도 받았다. 그들 손에 살인 면허증이 쥐어진 배경을 보자.
소련을 침공하기로 마음먹은 히틀러는 침공 3개월 전인 1941년 3월13일 국방군 최고사령부를 통해 전쟁 중에 적용될 '특별 지역'에 대한 '지침'을 내려 보냈다. 독일 육군사령부의 책임 범위를 전선의 바로 뒤에 해당되는 좁은 작전지역으로 제한한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사 연구자 제프리 메가기(미 홀로코스트기념관 연구원)이 독일군 지휘부에 대해 쓴 책(Inside Hitler's High Command, 2000)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문제의 특별지역 안에서 친위대 원수 하인리히 힘러는 히틀러가 인가한 '특수 임무'를 수행하고, 그 특별지역보다 더 후방에 있는 점령지는 제국판무관(민정장관)의 행정적 지배 아래 들어가고, 그들 또한 히틀러 총통으로부터 지침을 받도록 했다. 히틀러의 논리는 명쾌했다. 그는 동유럽에서 자신의 인종적․이데올로기적인 정책을 (마음껏) 펴나갈 작정이었다](제프리 메가기,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플래닛 미디어, 2017, 212쪽).
여기서 '특수 임무'란 유대인 제거를 가리킨다. '인종적․이데올로기적인 정책'이란 것도 결국 '유럽 땅에서 유대인을 보고 싶지 않다'는 히틀러의 극단적 반유대주의에 따른 전쟁범죄적 정책이다. 국방군 최고사령부를 통해 '독일 육군의 책임 범위를 전선의 바로 뒤 작전지역으로 제한한다'는 히틀러의 지침을 전해 받자, 독일 육군사령부 장성들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메가기의 풀이에 따르면, "히틀러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특수 임무'에 전적으로 협력하면서도 그것과 연관되는 것을 피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 학살이란 특수 임무에 '연관'된다면 그것은 곧 독일 국방군이 전쟁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독일 육군 지휘부는 아인자츠그루펜 기동학살부대가 전선 후방의 '특별지역'을 누비고 다니면서 유대인들을 학살하더라도, 독일국방군이 얽혀 들어가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 했다(하지만 이런 분리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독일국방군도 손에 피를 묻혔다).
전체주의 국가구조가 홀로코스트 불렀다
헤린더 파우워-스투더(오스트리아 빈대학, 윤리학․정치철학)는 나치 독일의 잘못된 법 집행을 비판적으로 다뤄온 연구자다. 그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 독일의 판사와 변호사 등 법률가들이 어떻게 나치 정권의 잔혹행위를 감싸주면서 정의로워야 할 법 개념을 왜곡했는가를 다룬 역작(Justifying Injustice, 2020)을 근래에 냈다. 독재자 히틀러를 정점으로, 그에 충성하는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가 권력을 휘두른 '전체주의적 국가 구조'가 홀로코스트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짚었다.
파우워-스투더에 따르면, 독재자 히틀러는 독일 사법 체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재판부의 선고가 마음에 안 들면 선고를 취소하고 재심을 명령하는 권한을 휘둘렀다.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한 경우라도 법원 바깥에 비밀경찰(게슈타포)가 기다리고 있다가 붙잡아가 처형하는 야만을 서슴지 않았다. 독일 본토에서 무법 행위가 일상적이었으니, 독일 점령지에서 상식과 공정이 지켜지길 바랄 수 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치 친위대 법원'의 등장이다.
[1939년 10월17일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불과 몇 주 만에 나치 친위대와 경찰 사법권은 무장 친위대원, 친위대 특무대원, 참전 경찰부대원의 범죄에 대한 관할권을 갖게 됐다. (힘러가 내세운 주장에 따르면) 보통 군사법원은 나치 친위대원의 정치적 사고방식과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아서 그들을 재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헤린더 파우워-스투더, 히틀러의 법률가들: 법은 어떻게 독재를 옹호하는가>, 진실의힘, 2024, 224쪽).
윗글의 '친위대원의 정치적 사고방식과 세계관'은 다름 아닌 히틀러와 골수 나치들이 입만 열었다 하면 내뱉은 '유대인 없는 세상 건설'이었다. 이에 따라 독일과 독일 점령지의 주요 도시에 나치 친위대 법원들이 세워졌다. 이는 마치 어느 독재국가의 정보기관이 자체적으로 '정보기관 법원'을 만들어 정보 요원이 불법행위를 저지르다 걸리더라도 '내 식구 감싸기'를 하겠다는 터무니 없는 발상이나 다름없다. 만에 하나 미국의 워터게이트 도청사건(1972) 때 이런 보호장치가 있었더라면, 리처드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파우워-스투더의 지적에 따르면, 친위대 사법부는 사실상 공정한 사법부와는 거리가 먼 형식적인 제도였다. "구체적인 나치 친위대 형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나치 친위대 판사들의 역할은 나치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가치에 헌신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판이다(헤린더 파우워-스투더, 225쪽). 실제로 친위대 법원은 독일 점령지에서 (친위대원들이 주축인) 특수기동대의 학살을 '범죄'로 다스리지 않았다.
힐베르크, 유대인 학살 전모 밝히다
히틀러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하인리히 힘러와 그의 심복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지도자(Führer)의 뜻'임을 내세워 모두 합쳐 1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즉결 처형했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유대인 절멸수용소에서의 독가스 학살보다 조금 앞서 벌어졌던 아인자츠그루펜 특수기동대의 대량학살을 가리켜 연구자들은 '홀로코스트 1단계'로 일컫는다. 2단계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절멸수용소에서의 처형이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던 라울 힐베르크(전 버몬트대 교수, 1926-2007)는 홀로코스트 연구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작(The Destruction of European Jews, 초판 1966년, 2003년 개정판)을 냈다. 원서의 두께가 800쪽이 넘는 대작이다(한국어 번역본은 1,2권 합쳐 1,700쪽). 초판본은 1961년에 만들어졌으나 출판은 5년 뒤 이뤄졌다. 책이 워낙 두껍다는 의견에 따라 1985년 학생들을 위한 360쪽 짜리 축약판이 나왔다.
초판 출판이 5년이나 미뤄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미 프린스턴대 출판부로 보내진 원고를 심사했던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에 있다고 알려진다. 아렌트는 그리 분명치 않은 이유를 대며 힐베르크의 원고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글에 힐베르크의 초고 내용을 많이 참조했다. 이는 나중에 표절 논란의 구설수에까지 올랐다(본 연재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둘러싸고 아렌트의 유명한 '악의 진부성'을 곧 다룰 예정이다. 아렌트의 테제가 표절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아렌트의 '악의 진부성' 해석에 동의하기 어려운 독자분들도 있겠기에, 좀 더 차분히 살펴볼 참이다).
힐베르크는 미군이 독일에서 압수해 모은 나치의 기밀문건들이 포함된 1차 자료들을 바탕으로, 나치 히틀러 정권이 '유대인 절멸'로 나아가는 과정(합법을 가장한 유대인 차별과 폭력적 약탈, 게토로의 주거 제한과 폴란드로의 추방, 동유럽의 유대인 게토와 수용소에서의 대량학살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나치의 학살집단인 아이자츠그루펜 특수기동대가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실상도 비중 있게 다루었다. 힐베르크의 조사에 따르면, 4개의 특수기동대가 저질렀던 학살의 대대별 현황은 다음과 같다.
특수기동대 A와 B는 오스트란트(발트 3국 지역과 벨라루스)에서, 특수기동대 C와 D는 우크라이나, 폴란드 동북부 비아위스토크에서 학살 작전을 벌였다. △특수기동대 A(1942년 1월 보고): 리투아니아 13만 6,421명, 라트비아 3만 5,238명, 에스토니아 963명, 벨로루시 4만 1,828명, 러시아 3,600명. 합계 21만 8,050명. △특수기동대 B(1942년 12월15일 보고) : 7a 부대 6,788명, 7b 부대 3,816명, 7c 부대 4,660명, 8부대 7만 4,740명, 9부대 4만 1,340명, 스몰렌스크 부대 2,954명. 합계 13만 4,298명. △특수기동대 C는 소속 경찰 두 부대(4a와 5)가 1941년 12월 초까지 9만 5,000명. △특수기동대 D는 1942년 4월8일까지 9만 1,678명을 죽였다고 보고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1>, 개마고원, 2008, 521-522쪽).
홀로코스트 1단계, 유대인 130만 명 학살
1942년 12월29일 힘러는 히틀러에게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비아위스토크에서 36만 3,211명의 유대인이 제거됐다고 알렸다. 특수기동대가 죽인 유대인 희생자들을 모두 합하면 90만 명에 이른다. 힐베르크에 따르면, 이 집계는 기동대 학살로 숨진 유대인 전체 희생자의 2/3쯤이다. 90만 명에 더해 또 다른 유대인 희생자 40만 명쯤은 루마니아의 오데사, 달니크, 골타 수용소에서 죽거나 여러 유대인 게토와 수용소, 또는 숲과 들판에서 병들거나 굶어 죽었다. 이 130만 죽음의 1차 책임은 히틀러와 그의 심복 힘러와 하이드리히, 그들의 도부수(刀斧手)였던 특수기동대에게 돌아간다.
특수기동대는 130만 명의 유대인만 죽인 게 아니다. 소련군 포로(정치위원, 유대인)들과 비유대계 민간인들도 죽였다. 나치에 맞서는 기미만 보여도 처형 대상이었다. 비유대인들이 떼죽음을 겪은 사례 하나. 1942년 5월27일 하이드리히가 아침 출근길에 베를린-프라하 고속도로에서 체코 반독 저항세력의 폭탄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프라하 병원에서 상관인 힘러가 급히 보낸 의사들의 치료를 받다가 8일 뒤 죽었다. 그 보복으로 피바람이 불었다. 힘러는 암살범들과 관련된 리디체 마을에 친위대 병력을 보내 남자 172명은 즉결 처형, 여자와 청소년을 수용소에 가두었다. 리디체 마을은 부타고 무너져 그야말로 그라운드 제로가 됐다.
힐베르크는 이런저런 학살 사건들을 모두 합쳐 특수기동대와 관련된 희생자 규모를 200만으로 추산했다. 그 가운데 유대인은 130만이다. 유대인 홀로코스트 희생자 600만이 사실이라면, 특수기동대에 죽은 유대인 비율은 20%가 넘는다. 적어도 5명 가운데 1명이 특수기동대 손에 죽은 셈이다. 골수 나치 대원들조차 막판에는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사람 얼굴을 바라보고 죽이는 피로감을 줄이는 대안으로 나온 것이 절멸수용소의 독가스 치클론B였다).
"발가벗겨진 유대인들, 피를 뒤집어쓴 채 기어갔다”
[바로 내 앞 구덩이 가장자리에 자리 잡았던 사살조는 (특수기동대 소속) 보안대원들이었다. 사살조 뒷줄에는 자동소총의 탄창을 채워 사살조에게 전해주는 다른 보안대원들이 서 있었다. 벌거벗은 유대인들이 구덩이 앞으로 밀려와 그들보다 먼저 사살된 유대인들의 시체 위에 엎드렸다. 그들을 향해 일제 사격이 가해졌다. 사살이 동시에 집행된 구덩이가 여러 개 있었다. 학살은 하루 종일 계속됐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아주 평범한 사람들: 101예비경찰대와 유대인 학살>, 책과함께, 2010, 210쪽).
지난 주 글에서 1943년 11월 폴란드 루블린 외곽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했던 '추수감사절' 작전에 대해 살펴봤었다. 위에 옮긴 글은 학살 구덩이 10m쯤 떨어진 곳에서 경비를 섰던 101예비경찰대원이 남긴 훗날 증언이다. '추수감사절' 작전은 치안경찰의 도움을 받아 아인자츠그루펜 특수기동대가 벌인 집단 학살극이었다. 학살 현장에서 101예비경찰대대원들은 유대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를 했고, 사살은 특수기동대가 맡았다. 총살은 하루 종일 이어졌고 구덩이마다 유대인 희생자들이 가득했다.
[구덩이 앞에서 사격이 벌어질 때 공포에 얼어붙는 유대인들도 있었다. 총에 맞아 죽은 유대인이 바로 눈앞에 엎어져 있고, 그중 일부는 몸이 아직도 떨면서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구덩이에서 물러나는 유대인은 즉각 사살 당했다. 그러면 다른 유대인들이 시체를 구덩이 안으로 끌어내렸다. '저열한 사디스트들'도 있었다. 임신부의 배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산 채로 구덩이에 넣는 자들이 그들이었다. 한 작전에서는 발가벗겨진 유대인들이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기어가기도 했다] (라울 힐베르크, 519쪽).
위에 옮긴 글은 특수기동대의 유대인 학살 현장 모습이다. 더 처참한 학살 기록들이 있지만, 읽어내려 가기가 불편하니 이쯤해서 그친다. 냉혹한 살인광인 친위대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조차 학살 현장에 와서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고 한다.
학살 증거 없애려 구덩이 파헤쳐 소각
힘러는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과 친위대를 장악해 권력 서열상 스스로를 2인자인 헤르만 괴링에 못지않은 인물로 스스로를 과대평가했다. 이것저것 생각이 많은 교활한 힘러의 머릿속엔 주군으로 모시는 히틀러 말고는 두려워할 자가 없었다. 그래도 두려움이 아예 없진 않았다. 언젠가 적군이 진격해 들어오면 그의 부하들이 저지른 대량학살의 증거들이 드러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는 뒤늦게 시신 구덩이들을 파헤쳐 전쟁범죄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다.
[1942년 6월 힘러는 특수기동대 4a 지휘관 파울 블로벨에게 "처형작전의 흔적을 말소하라”고 지시했다. 그에 따라 블로벨은 구덩이를 파내서 시체를 태워버리는, 암호명 '1005부대'를 구성했다. 블로벨은 보안경찰장교들과 협의해가면서 시체 구덩이를 찾아 점령지역 전체를 뒤졌다. 한번은 친위대 보안청의 고위장교가 블로벨을 차에 태우고, 마치 여행객들에게 역사적인 장소를 보여주는 여행 가이드처럼, 3만 4,000명의 유대인을 살육하고 파묻은 키에프(우크라이나 키이우) 근처의 구덩이를 보여주었다] (라울 힐베르크, 521쪽).
힘러의 지시에 따라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구덩이 파헤치기 공사가 벌어졌다. 특수기동대원들의 감시 아래 삽을 들고 그 궂은일을 해낸 이들은 노예노동으로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가던 유대인 수감자들이었다. 구덩이에서 금반지 등 귀중품이 보일 경우 특수기동대원들은 반납 규정을 어기고 주머니에 챙겼다(이들 가운데 몇몇은 '제국 재산'을 훔쳤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땅에 묻힌 시신들을 파내 모두 불태워 없애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시 물자부족으로 시신을 태울 휘발유가 넉넉하지 못했다. 시신 처리는 더뎠다. 소련군이 진격해 들어왔을 때까지 소각 작업을 마친 지역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거듭된 전투로 인간의 죽음에 무감각해진 소련군 병사들조차 그 지옥 같은 현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알려진다.
교수형은 겨우 4명, 나머진 감형 뒤 풀려나
독일 패전 뒤인 1947년 7월 친위대 병력이 포함된 아인자츠그루펜 특수기동대 재판이 열렸다.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정치군사 지도자들을 다룬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이어 열린, 나치 의사 재판을 비롯한 여러 '후속 재판'의 하나였다. 24명의 특수기동대 지휘관들이 기소되었고, 14명에게 교수형이 내려졌다(무기징역 3명, 20년형 2명, 10년형 2명, 자살 1명).
실제 교수형 집행은 위에서 살펴본 박사급인 D대대장 오토 올렌도르프, B대대장 에리히 나우만, D대대에 속한 11b 중대장 베르너 브라우네, 시신 소각을 지휘했던 특수기동대 4a 지휘관 파울 블로벨 등 4명에 그쳤다. 1951년 이들 4명은 처형됐지만, 함께 교수형 언도를 받았던 나머지 10명은 감형 조치로 목숨을 건졌다. 전후 미․소 냉전이 격화되고 독일의 탈(脫)나치화가 시들해지는 분위기 아래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948년 12월 '크리스마스 특사'로 일본 전범자들을 풀어주었던 것처럼) 독일 전범자들은 잇단 감형과 사면으로 풀려났다.
오늘 글에서 아인자츠그루펜(특수기동대)가 유대인 130만을 포함한 200만의 목숨을 앗아갔음을 살펴봤다. 모두 합쳐 3,000명 규모의 4개 대대가 저지른 학살치고는 규모가 너무 엄청나다. 그런 대량학살을 가능하게 한 것이 다름 아닌 독일국방군의 협력이었다. 독일 정규군이 거들지 않았다면 그렇게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 과정에서 독일군도 손에 피를 묻혔다.
글이 또 길어졌다. 다음 주엔 "독일군은 손에 피를 더럽히지 않았다”는 이른바 '독일군 신화'의 실상과 더불어, 지면 관계상 또 미루게 된 '골드하겐 논쟁'(독일인들은 모두 히틀러의 나치 이념에 열광하는 자발적 처형자인가, 아닌가를 둘러싼 논쟁)을 독자들과 함께 들여다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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