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빨래는 예나 지금이나 전형적인 여성 노동이다. 가사노동이 남성에게 분담되는 흐름이지만, 빨래는 요리와 함께 여전히 여성 일상 중 하나다.
일상은 그림으로 옮겨진다. 인상주의는 역사나 신화가 아닌 일상을 그리는 작업이었기에 빨래하는 여성을 본격적으로 그린 건 이들 화가부터였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미국 초기 인상주의 대표 화가인 윌리엄 메리트 체이스(1849∼1916)가 그린 '빨래하는 날, 브루클린 뒷마당의 추억'(1887)부터 보자.
그는 '빛의 마법'을 사랑했다. 그가 쫓아간 빛이 빨래를 너는 여인에게 닿았다. 빨래들 미묘한 색 차이와 잔디 위에 떨어진 그림자들 명암을 보면 어느새 '빛과 색의 세계'에 빠져 마음이 따뜻해진다.
체이스 이후 미국 인상주의 화가인 존 슬론(1871∼1951)은 '뉴욕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다채로운 뉴욕 풍경을 그렸다. 아래 작품은 도심 한 건물 옥상에서 발견해 그린 '지붕 위 햇볕과 바람'(1915)이다.
맨발을 한 여인이 빨래를 널고 있다. 그림 톤이나 제목에서 느껴지듯 '빨래 널기 좋은 날'임에 분명하다. 여인의 하얀 옷, 하얀 빨래가 드리운 짙은 그림자로부터 따사로운 햇살을 간접 경험한다.
엘리자베스 스파호크 존스(1885∼1968)는 미국 여성 인상주의 화가다. 그녀가 찾은 일상은 여성 노동 현장이었는데, 체이스나 슬론과는 달리 빨래를 통해 낭만을 표현하기보다 당대 직업여성들 고됨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숍 걸즈'(1912)는 세탁한 옷을 정리하는 여성을 그린 그녀 대표작이다.
일상보다 노동으로서 빨래하는 여인을 천착해 그린 선구자는 프랑스 화가 오노레 도미에(1808∼1879)와 에드가르 드가(1834∼1917)였다.
드가는 산업화한 파리에서 힘겨운 노동에 처한 여성을 '세탁부'라는 제목으로 여러 차례 그렸다. 당시 교육받지 못한 여성이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대표적인 직업이 매춘부와 세탁부였다고 한다.
'다림질하는 여성'(1886)을 보면 온 힘을 다해 다림질하는 여성과 하품하며 잠시 휴식하는 두 여성을 대비시켰다. 하품하는 여성이 마시는 병에 든 액체는 술일까? 물일까?
후기 인상주의로 분류되는 폴 고갱(1848∼1903)도 빨래 소재 그림을 한 점 남겼다. 반 고흐 초청을 받아 잠시 정착한 프랑스 아를에서 그린 작품(1888)이다. 여성들이 시냇가에 모여 빨래하는 광경인데, 여인들 자세나 동작이 거칠고 모질어 보인다.
이 작품은 우리 대표 현대화가 한 명을 떠올리게 한다. '빨래터'라는 제목으로 빨래하는 여인들 모습을 여러 점 남긴 박수근(1914∼1965)이다.
위작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박수근 작품 중 최고 경매가(2007년, 45억2천만원)를 기록한 '빨래터'는 우리 할머니들, 어머니들 고된 일상을 특유의 질감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박수근은 평생 사랑했던 부인 김복순(1922∼1979)을 빨래터에서 만났다.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박수근은 아래 청혼 편지를 썼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빨래는 한자로 '세탁(洗濯)'이다. 오물과 냄새를 제거하는 일이다. 요즘은 기계가 대신해주지만, 빨래 과정에 필수적인 수단은 물과 햇살, 그리고 손이다.
손으로 붓을 잡고 작업하는 화가들이 빨래하는 모습에 주목한 건 손이 하는 노동의 봉헌을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흰 바탕 위에 그림이 살아나듯, 더러운 옷들이 탐스럽게 변신한다. 두 경우 모두 손은 노동을 초월해 '마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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